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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고담-23화 (23/66)

23화.

이번엔 백아가 감당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출입을 반복했다. 백아는 탁자에 상체를 완전히 기댄 채로 헌원이 움직이는 대로 천천히 흔들렸다.

“아…… 응…… 하 으아…… 응.”

짧게 끊어지던 백아의 숨결이 조금씩 길어지며 숨 사이사이로 신음이 섞였다. 백아가 헌원의 손에 뺨을 비볐다. 헌원을 꼭 잡고 있기만 하던 손도 가눌 만해진 백아는 헌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무서웠습니까?”

헌원의 질문에 백아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추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굴리던 백아는 결연한 표정이 되어 크게 가로저었다.

조금, 헌원이 조금 평소와 같지 않아 잠시 두렵긴 하였으나 그 기색은 금세 사라졌다.

거기다 헌원은 화가 난 것도 백아를 탓한 것도 아니었다. 백아에게 설명하려 산짐승 흉내를 냈으니 산짐승처럼 두려운 것은 당연했다. 백아는 산짐승이 두려운 거지 헌원이 두려운 건 아니다.

지금은 부드럽고 따스하게 백아를 안아 주고 있었으니 무섭지 않았다. 다만 풀린 다리를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이 힘들 뿐이다.

하지만 이 자세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헌원이 정말 정말 깊게 들어와 백아를 가득 채웠으니까. 백아는 헌원이 깊게 들어오는 것이 정말 좋았다.

백아는 입을 열어 헌원에게 제 생각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헌원이 다시 움직였다. 백아의 생각은 터져 나오는 신음으로 인해 말이 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한동안 흐리던 날이 개고 오랜만에 날이 맑았다.

한철의 장마는 올해엔 봄 가뭄을 해소하지 못할 만큼 적게 내려 문서 관련 일을 하는 헌원의 관청에서도 올해의 작황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부쩍 외출이 잦아진 백아가 흠뻑 젖어 들어오는 일은 없었던 듯했다.

고뿔이 걸렸을 때도 부슬비를 오래 맞아 그랬던 탓이었고…… 남들에겐 악재인 비 적은 장마가 헌원에겐 안도할 일이었다. 백아가 외출에 흥미를 보일 한동안은 큰비는 지지 않기를.

가뭄을 걱정하는 앞에서 소리 내 말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생각이라 헌원은 문서를 정리하며 농사 걱정을 하는 이들의 대화를 듣는 척만 했다.

“이 관원께선 큰 관심이 없으신가 보군.”

“예?”

“올해 작황 말일세, 듣고 있지 않았는가?”

“아…… 태창령께서 적절히 대처하시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으니 대사농께서도 특별히 염려하고 계시…….”

누군가 던진 물음에 헌원이 무심코 대답하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헌원은 뒤늦게 분위기를 눈치채고 뒷말을 흐렸다. 주위를 둘러보자 대화를 나누던 관원들이 입을 다문 채 헌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헌원은 아차 했다. 제 실수였다. 말직인 관원이 승상과 대사농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일이라곤 없다시피 했다. 등청하는 방향도 다르니 낼 수 있는 수라곤 엿듣는 방법뿐이었다. 당연히 함부로 입 밖에 내었다간 치도곤을 칠 터다.

그러나 승상을 부친으로 두고 있는 헌원은 그 처지가 달랐으니 간혹 이야기가 나오면 이렇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헌원의 부친이 이 승상인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상기하는 일은 관원인 헌원에게 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 관원이야 헌원을 아우처럼 여겨 자상했으나 다른 관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더러는 헌원의 출생을 시기하는 이도 있었다.

거기에 본디라면 낭관 정도의 관직을 받아야 했을 헌원이 관원에 머물러 있으니 헌원을 탐탁지 않아 하는 몇몇 동료 관원들과 위화가 있었다.

헌원이 아부나 뇌물을 받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들과 함께 어울렸다면 분위기가 조금 달랐겠으나 그와는 거리가 먼 인사였다. 해서 헌원은 관에서는 부친에 대한 언급을 늘 조심하고 자제했다.

“하긴, 승상 댁 자제께서 곡기 걱정을 할 일이야 있으시겠나.”

매번 헌원을 비꼬곤 하는 천 관원이었다. 그에 단짝처럼 맞장구치는 백 관원이 옆에서 비죽였다. 옆에 섰던 유 관원이 천 관원의 허리를 쿡 찌르자 천 관원은 크게 헛기침했다. 이번은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괜히 어색해진 자리를 피했다.

이후 헌원은 입을 닫고 백아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내내 백아를 떠올린 탓에 오늘따라 더 백아가 보고 싶었다.

헌원은 한달음에 귀가하여 침소로 들어섰다. 그러나 백아는 보이지 않고 어지러운 내부를 정리하는 단이만 있었다.

뒤늦게 별채 앞마당에서 랑이도 보지 못했던 걸 떠올렸다. 백아가 안에 있었다면 랑이가 먼저 반겼을 터인데 백아를 보고픈 마음이 앞서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단이를 두고 외출을 하였을 리는 없고, 랑이를 데리고 정 부인께라도 갔나 생각하는 사이에 단이가 헌원을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작은 마님은?”

“욕탕에 계십니다. 금일은 내내 물놀이를 즐기셨어요.”

조금은 푸념이 섞인 단이의 말투에 헌원은 지난밤에 읽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랑을 이루지 못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용왕의 셋째, 인어의 이야기였다.

서역의 동화는 체감상 꽤 오랜만이었는데 흥미를 끌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욕탕에 가신 겐가. 종일 날이 맑아 고뿔 염려는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너는 왜 침소에 있느냐, 마님을 모시지 않고?”

“아 그것이, ……갑자기 뛰쳐나가셔서요. 의복을 가지러 온 김에 침소가 어지러워……. 남 호위께서 지키고 계십니다.”

헌원의 하문이 추궁으로 변할까 단이가 급한 대답을 내놓았다.

백아를 염려하던 헌원은 안심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큰일은 없을 터였다. 욕탕이 아닌 더 먼 곳에 가더라도 고생하지 않을 테고 돌아올 수도 있을 터이니. 헌원은 갑자기 떠오른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냈다.

“알았다. 내 것도 준비하여 천천히 오너라.”

“네, 주인마님.”

헌원은 단이의 대답을 뒤로한 채 백아가 있을 욕탕, 별채의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아와 헌원은 혼례를 올린 후에도 한동안 안채에서 생활했다.

거처는 준비되었지만 부모님이나 가족과 떨어져 단둘이 생활하기엔 백아가 어렸다. 서쪽의 담을 터 넓은 부지를 확보한 별채는 백아 나이 다섯 즈음 이미 지어 놓은 지 오래였다.

이후로도 한동안 비어 있던 별채는 헌원이 급제하며 주인을 맞았다. 이 승상은 관직을 받은 그날로 헌원을 불러 일렀다.

“지금까지는 백아가 어려 혼례를 올리고도 내 집에서 네 모친이 너희를 돌보았다. 하나 이제 네가 관직에 올랐으니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일가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신 말씀을 엄히 지키려 하시는 이 승상의 재촉에 헌원은 당일로 거처를 옮겼다. 헌원이 별채에 당도하니 이미 짐을 옮기고 정리한 가솔들이 헌원과 백아를 맞이했다.

지나치게 신속한 처사에 헌원은 지레짐작을 했다. 이 승상께서 그간 정 부인과의 시간을 많이 빼앗겨 서운하여 그러신가 보다 하고 말이다. 두 분 금실에 훼방을 놓은 것 같아 죄송스럽기까지 했다.

몇 년을 차근차근 준비한 탓에 별채는 헌원의 마음에 쏙 들었다. 백아가 뒹굴 수 있을 만한 넓은 침상부터 서가를 모두 옮겨 온 아늑한 서재까지 어느 한 곳 헌원의 취향이 아닌 곳이 없었다.

다만 하나, 잠자리가 바뀐 백아가 낯설어하여 잠을 설칠까 염려했다. 다행히 백아는 헌원과 함께면 잠자리는 크게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바뀐 잠자리에 적응하지 못한 건 헌원이었다.

날이 지기도 전에 품에서 잠든 백아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던 헌원에게 뒤늦게 벅찬 기쁨이 밀려왔다.

급제니 장원이니 하는 것들은 예정된 순서였던 터라 헌원은 그에 큰 감흥이 없었다. 대신 그 감흥을 일깨운 것은 헌원과 백아의 공간으로 명명된 별채에 단둘이 함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정말로 백아와 부부로 불릴 자격을 갖추지 않았나 말이다.

그동안은 같이 있다 해도 함께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라 부부, 반려, 정인 등 평생을 함께할 단둘을 칭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별채를 준비할 때도 기쁘긴 하였으나 별채를 기꺼워할 백아를 기대하는 점이 더 컸다.

그러나 이제는 둘만의 집을 얻고, 둘의 침소에서 둘이 생활할 것이다. 정식의 부부가 된 것이었다. 헌원은 뒤늦게 이 승상의 깊은 뜻을 이해했다.

정작 부부의 내밀한 일은 아무것도 치르지 않았던 때였지만 따로 공간을 얻은 것만으로도 헌원은 뿌듯하고 행복했다. 헌원은 그렇게 곤히 잠든 백아를 바라보며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새웠다. 그리고 밤을 새우는 내내 백아에게 더 무엇을 해 줄까 고심했다.

다음 날, 헌원은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며 지난밤의 깨달음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헛되었다. 이 승상을 마주한 헌원은 밤새 생각한 것 중 아무것도 꺼내 놓지 못하고 가장 기본적인 인사만 올렸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이 승상은 그런 헌원의 마음을 짐작했음인지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래, 마음에 드느냐?”

“예.”

“그래, 독립하였으니 선물을 주어야지. 갖고 싶은 게 있느냐?”

이 승상이 직접 하문하여 이번에는 밤새 고심한 것을 말씀드릴 수 있었다.

“……별채에 욕탕을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어렸을 적 백아가 숲을 헤맨 것은 계곡에 가기 위함이었다. 헌원과의 물놀이를 기억해 다시 즐기고 싶었다던 백아는 이후로 숲에 들어가지 못하니 자연히 계곡에도 갈 수 없었다. 그를 내내 염두에 두고 있던 헌원은 백아에게 집 안에서도 물놀이를 즐길 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했다.

“목욕간은 이미 있지 않으냐? ……흐음, 백아를 위함이냐?”

“예, 아버님.”

“허허, 녀석. 그래, 알았다. 원하는 대로 짓거라.”

이 승상은 흔쾌히 그러마 하고 허락을 하였다. 그러나 이 승상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백아를 위해서라면 한계를 두지 않는 헌원의 머릿속엔 이 승상이 기함할 만한 구상이 있었다. 미리 알거나 보았다면 헌원을 구슬려 다른 목록을 불러 보라 하였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승상이 헌원의 구상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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