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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고담-21화 (21/66)

21화.

왕, 왕!

신을 흔들어 빼낸 백아가 팔을 닿지 않을 높이까지 들었다. 강아지는 놓친 비단신을 다시 잡으려 백아의 발치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백아가 강아지를 밟지 않으려 발을 옮기자 강아지가 백아를 따르며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길어야 한나절인 시간 동안 꽤 친해졌는지 강아지가 제법 백아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놀며 천진하게 웃는 백아의 밝은 얼굴에 헌원은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감상했다. 화폭에 옮겨 간직하고 싶을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헌원의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낯선 이를 발견한 강아지가 헌원과 백아 사이를 가로막으며 헌원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아르르-

“어, 헌원!”

헌원을 경계하는 강아지의 모습에 백아가 당황하여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그러나 강아지는 백아의 품에 안겨서도 헌원을 향해 경계의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래 봐야 헌원의 손바닥만 한 작은 것이 왕왕대는 것이라 헌원은 오히려 강아지가 마음에 들었다. 조그만 것이 낯선 수컷에게서 백아를 지키겠다고 용을 쓰는 것이니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있나. 헌원을 경계하는 건 서열을 가르치면 될 터였다.

헌원은 향을 풀었다. 저 민감한 어린 짐승이 헌원을 경계하는 건 헌원에게서 나는 향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헌원을 저보다 약한 개체로 여겨 겁도 없이 왕왕 짖어댄 게지.

헌원의 향이 거세지자 강아지가 다리 사이로 꼬리를 말았다.

“이리 주시겠습니까?”

헌원의 요청에 백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강아지를 제 뒤로 감추었다. 강아지가 헌원을 경계하니 떼어 놓으려는 생각이었다.

“물면 어떡해요.”

“이젠 경계하지 않는 듯하니 괜찮습니다.”

헌원의 말에 백아는 고개를 흘깃 돌려 강아지를 보았다. 강아지가 짖지 않았다. 조심스레 손을 돌려 앞으로 가져왔으나 강아지는 역시 얌전했다. 괜찮은 건가? 백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헌원을 보자 헌원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헌원이 괜찮다면 괜찮겠지.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 되어 백아는 걱정을 담은 눈길로 조심스레 강아지를 건네었다.

기분 좋은 정인의 걱정을 받으며 헌원은 강아지를 받아 들었다. 숱이 많은 보드라운 털 결을 몇 번 쓰다듬자 강아지는 다리 사이로 감추었던 꼬리를 다시 들었다. 그러고는 헌원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백아에게서 나는 수컷의 향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챈 것이다.

“서원 누님이 보내 주셨대요. 북적의 왕이 키우던 개라셨어.”

서원은 이 승상의 차녀로, 헌원의 둘째 누이였다. 북방 유지의 막내와 성혼한 서원은 황명을 받들어 국경에 가 있었다. 초봄에 한 번 소식을 보내었으니 슬슬 소식이 올 때도 되긴 했다.

“조만간 들르신대요. 그때까지 훈련을 시키래요.”

백아의 눈이 기대를 담고 헌원을 향했다. 이 승상 댁에서도 견공을 몇 키우기는 했으나 별채에서 가기엔 거리가 있었다. 별채에서 키우고 싶다는 말이었다.

손에 들린 강아지가 버둥대어 고쳐 잡았다. 유달리 털이 길고 숱이 많은 것이 확실히 근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품종의 개는 아니었다.

“앞발이 두툼한 것을 보니 꽤 덩치가 커질 듯합니다. 큰 집을 마련해 주어야겠어요.”

“정말?”

헌원의 말에 백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새 정이 들었는데 강아지가 헌원을 경계했던 터라 헌원이 싫어할까 눈치를 본 것이었다.

화색이 도는 백아를 보며 헌원은 확인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설령 강아지가 끝까지 헌원을 경계했다 해도 백아가 마음에 들어 한다면 키웠을 테지만, 백아가 자신의 허락을 우선하는 것에 마음이 흡족했다.

헌원은 얌전해진 강아지를 도로 백아에게 건넸다. 백아는 조심스레 강아지를 품에 안으며 방금 헌원이 한 말이 제가 해석한 대로가 맞는지 확인했다.

“정말 키워도 되는 거예요?”

“그러라고 누님께서 보내셨겠지요. 이름은 백아가 지어 주세요.”

환하게 웃는 백아의 미소가 보기 좋았다.

백아는 며칠이나 강아지의 이름을 고심했다.

“랑이로 하겠습니다. 늑대처럼 용맹하게 크라고요.”

좋은 이름을 짓겠다며 온갖 한자를 늘어놓고 헌원에게 물어 가며 고르고 고른 이름이었다. 뜻이 제법 좋았다. 용맹하게 자란다면 백아를 잘 지켜 줄 것이다.

헌원이 백아의 이름을 지을 때도 그러했었다.

헌원은 지난 며칠간 강아지 이름 짓기에 골몰하던 백아를 보며 옛 생각에 미소 지었다.

헌원과 만났을 때, 백아는 이름이 없이 아명으로만 불리고 있었다. 영아의 사망률이 높았던 터라 생존이 확실해지면 이름을 짓는 풍습 때문이었다.

무사히 돌을 넘기고 큰 병치레가 없어 슬슬 아이의 이름을 지어 볼까 하던 차였다. 갑자기 전해진 친우 자식의 병세 소식을 들은 주 자사는 열 일을 제쳐 두고 친우를 위로하러 달려갔다.

그러나 그 후 정신없이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백아의 이름을 짓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 자사가 그것을 떠올린 것은 헌원과의 혼례 문제가 거론되었던, 백아 나이 여섯 즈음이었다. 이듬해에 헌원과 백아 모두 길상이 있으니 이른 감이 있지만 혼례를 치르자는 이 승상의 전갈에 백아의 이름을 묻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승상은 당연히 주 자사가 백아의 이름을 지어 두었으리라 여겨 보낸 서신이었으나 주 자사는 그 서신을 보고야 제가 백아의 이름을 짓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급히 작명책을 펴고 이런저런 이름자를 훑어보았으나 급한 마음에 하려니 영 성에 차질 않았다. 심사숙고하여 지어도 모자랄 이름자를 번갯불에 콩 볶듯 지어 버리자니 백아뿐 아니라 헌원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 자사는 부인인 백아의 모친에게 바가지를 실컷 긁히고 난 다음 이 승상에게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하였다고 실토하는 서신을 보냈다.

“혼례를 미루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주 자사의 서신을 읽으며 하는 이 승상의 말에 헌원은 조금 걱정을 했다. 주 자사께서 제가 성에 차지 않아 그러시는가 하고 말이다.

아들의 시무룩한 표정을 본 이 승상이 헌원의 생각을 짐작하곤 오해를 바로잡았다.

“그것이 아니라 이 친구, 아직 백아의 이름을 짓지 못하였다는구나.”

이름도 없이 혼례를 올릴 수야 없지 않겠느냐 하는 이 승상의 말에 어린 헌원은 제 짐작이 틀렸음에 안심했다. 아직은 속내를 감추는 데 미숙한 헌원인지라 안도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이 승상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양인인 서원의 짝을 구할 때 이 승상은 꽤 고충을 겪었다. 이미 희원이 황후가 된 때였던지라 황제의 처가인 승상 댁에 어울리는 향인 가문을 찾기 어려웠던 탓이다.

향인을 잘 알지 못하는 평인들은 여성 양인이나 남성 음인을 해괴하게 여겼다. 해서 이름 있는 가문에서는 나더라도 속여 키우는 경우가 많아 찾기가 수월치 않았다.

비교적 알려진 여성 음인을 데려올 수도 없었던 것이, 헌원의 일로 이미 많은 이목이 집중된 후였던 탓이었다. 아무리 황제의 처가라지만, 세간에선 해괴하게 여기는 혼례를 두 번이나 치를 순 없었다.

그때 이 승상을 도왔던 주 자사는 그 고충을 옆에서 모두 지켜보았다. 평인인지라 향인의 습성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백아가 헌원 없이 음인으로 발현했다면 주 자사는 이 승상보다 몇 배는 어렵게 백아의 짝을 찾았을 것이다.

헌원이라면 승상 댁의 장자에, 뛰어난 양인에, 황제의 처남인 데다 총애를 업기까지 하였으니 어디에다 내놓아도 모자라지 않을 혼처였다. 그 혼처가 미래의 고생을 치워 주기까지 하였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냔 말이다.

해서 주 자사는 헌원을 매우 흡족해했으나 헌원으로선 주 자사가 언제나 어려울 수밖에 없는 분이었다.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커야 했을 백아를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떼어 놓았다. 주 자사와 한 부인의 인품으로 미루어 보면 백아는 헌원의 옆에 있을 때보다 부모 형제 밑에서 더 크고 많은 사랑을 받았을 터였다.

제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헌원이기에 늘 주 자사 앞에선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서 늘 주 자사가 저를 언짢아하실까 노심초사했다.

이 승상의 대답을 듣고 마음을 놓은 헌원은 백아의 이름이 아직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작은, 아니 커다란 욕심이 솟았다.

“아버님, 청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제가 백아의 이름을 지어도 괜찮겠습니까?”

헌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저를 보며 방실대는 백아를 앞에 두고 던졌던 질문이었다.

백아와 함께 이 승상 댁에 남았던 유모가 헌원이 하는 양을 보곤 말도 못 하는 아이에게 별걸 다 묻는다며 호호 웃었더랬다.

아직 이름을 받지 못했다는 말을 유심히 들었던 헌원은 백아의 이름이 무엇이면 좋을까 홀로 고민했었다.

이것이면 좋을까? 아니 이것은 뜻이 별로, 저것이면 좋을까? 아니 저것은 발음이 별로, 하며 헌원은 고르고 골라 몇 가지 후보를 지어, 지금 보면 형편없지만 당시엔 갖은 공을 들인 반듯한 필체로 적어 놓았었다. 그것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헌원의 낡은 서책 사이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헌원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이 승상은 잠시 말이 없었다. 헌원은 욕심이 과하였나 하여 이 승상의 말씀을 기다렸다.

“허허, 녀석하고는. 허락을 구해 보마.”

주 자사의 대답은 한참이 걸릴 테지만, 이 승상의 허락만으로 헌원은 잔뜩 들떴다.

그길로 달려가 서책을 편 헌원은 몇 년 만에 이름을 적은 종이를 펴 놓고 또 한참을 고민했다. 백아에게 좋은 것을 다 주고 싶은 마음에 한 가지만을 택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주 자사의 허락은 헌원의 예상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헌원은 고심하고 고심하여 백아의 이름을 지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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