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헌원이 가장 슬퍼하고 화를 낼 때는 백아의 몸에 생채기가 났을 때였다. 진원도 단이도 아범도 백아가 다치면 헌원에게 크게 혼이 났다. 백아는 기억나지 않지만, 희원 큰누님도 헌원에게 꾸중을 들었다 했다.
무슨 일이든 백아가 고개를 저으면 넘어가 주는 헌원은 그때만큼은 백아가 매달리며 말려도 듣지 않았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혹여, 백아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호위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천희가 벌을 받을 터인데 백아의 명령으로 떨어져 있던 천희는 무슨 잘못입니까? 또 저는 어찌합니까?”
“저는 입이 없습니다.”
뜬금없이 터져 나온 백아의 말에 헌원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얼굴 대신 보이는 검은 머리칼을 내려다보던 헌원은 이내 뜻을 파악하고 실소를 흘렸다. 백아는 아마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말 대신 입을 없애 버린 백아는 그 말을 실천이라도 할 셈인지 고개를 바닥에 닿을 듯 숙였다. 해서 헌원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백아의 동그란 정수리뿐이었다. 백아는 헌원의 실소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헌원은 손을 뻗어 백아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하면 자신을 보리라 생각해 한 행동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백아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토라진 건가. 문득 드는 불안에 백아를 끌어당겼다. 다행히 백아는 저항 없이 끌려와 헌원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헌원의 품에 제 머리를 묻었다.
백아를 품에 안자 불안은 삽시간에 날아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잠시 잊었다. 제 사람은 어려서부터 순하여 헌원이 하는 말이면 곧이곧대로 들었다. 커서 고집이 생겼다고는 하나 천성은 곱고 순한 사람이다. 토라지기는, 그저 제가 화가 났을까 두려워한 게지.
“백아.”
진중함을 내려놓고 따스해진 헌원의 부름에 헌원의 옷깃을 그러쥔 손만이 대답을 한다. 얼굴을 보고 싶어 떼어 놓으려 하니 팔에 힘을 더하여 헌원에게 매달렸다.
헌원은 백아의 얼굴을 보는 것을 잠시 미루고 등 위로 손을 얹어 살살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토닥이는 헌원의 손길에 백아의 숨이 잠시 멎었다가 등을 쓸어내리는 움직임을 따라 이내 편안해졌다.
“내일 일어나면 단이와 천희에게 사과를 하세요. 백아가 윗사람의 도량을 보이세요. 먼저 미안하다 하면 그들도 오늘의 일 따윈 쉽게 잊을 겁니다.”
“그럴까요? 미워하지 않을까?”
“그럴 겁니다. 단이와 천희는 백아를 위하니까요. 그리고 다음부턴 그들을 멀리 떼어 놓지 마시고요. 제가 걱정되니까요.”
헌원의 말에 고개를 든 백아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헌원은 부드러운 미소로 백아를 안심시켰다. 이제는 마음을 풀어 줘야 하겠지.
“그래도 백아, 그 마음만은 기특합니다. 바르지 못한 길을 가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또한 백아의 허탕 탓에 그들은 오늘 하루라도 배불리 식사를 했을 것이니 백아의 하루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잘하셨어요.”
일을 벌인 목적은 헌원으로서는 서운한 것이었지만 그 말은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백아가 제 눈치를 보는 건 싫었던 연유였다.
그런 속내를 감추려 헌원은 저를 보는 백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대었다. 칭찬을 하였으니 상이라 둘러댈 수 있을 터다.
헌원은 코끝보다 가까워진 백아의 눈을 보았다. 이렇게 가까워져 버리면 오히려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제 행동을 아무런 의구심 없이 받아들이는 백아의 순진한 눈빛만이 헌원의 시선에 가득 담겼다.
혀가 입술 사이를 스치고 진한 물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백아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순순히 벌어진 입술은 조금 전 성을 내었던 걸 잊은 듯했다. 헌원은 조금 아쉬워졌다. 여전히 성을 내고 있다면 조금은 제 뜻대로 난폭해져도 좋을 텐데.
절대로 행하지 못할 상상을 하며 헌원은 백아를 안아 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매끄러운 비단 위에 백아를 뉘이고 단단하게 매여 있는 다섯 겹의 매듭을 파헤쳤다. 옷 위로 스치는 손길임에도 백아가 작은 새인 양 파드득 떨며 헌원의 목에 팔을 둘렀다.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벗겨 내고 싶었으나 백아의 팔이 제게서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헌원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백아의 앞섶을 열었다. 몇 겹의 비단을 파헤쳐 표백한 비단보다 흰 피부를 쓸었다. 매끈한 살갗에 걸리는 것은 작은 돌기 두 개뿐이었다.
헌원은 형태를 잡지 않은 말랑한 돌기를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짓이겼다. 헌원의 손길에 작은 돌기가 꼿꼿이 일어섰다. 그것을 꾹 누르자 백아가 떨며 헌원의 혀를 씹었다. 제풀에 놀라 눈을 뜨는 백아를 헌원은 눈웃음으로 안심시켰다. 백아가 주는 작은 통증은 고통이 아니라 쾌락이었다.
헌원은 백아의 숨이 가빠지고서야 마주한 입술을 떼어 냈다. 숨을 참고 있었던 듯 백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호흡이 거셌다.
“하아, 헌…… 흐읏.”
밭아진 백아의 숨을 귀로 만끽하며 헌원은 백아의 귓불을 입술로 머금고 우물거렸다. 귓가에서 바로 울리도록 질척거리는 소음과 귓불에 닿는 입술의 감촉, 입술 새로 내뱉는 뜨거운 숨결까지 모조리 백아에게 쏟아부으며 헌원은 백아의 드러난 맨살갗을 쓰다듬었다.
민감한 가슴을 스치는 손길에 백아가 몸을 움츠렸다. 헌원은 그 몸을 따스하게 덮었다.
“쉬이-.”
헌원은 백아에게 작게 속삭이고는 입술을 미끄러트려 백아의 목선을 핥아 내렸다. 여린 목을 지나 곧은 쇄골에 입을 맞추고 단단해진 유실을 머금었다.
조금 전의 애무로 민감해진 돌기를 혀로 한 번 핥았을 뿐인데 백아의 몸이 튀어 올랐다. 붉게 달아오른 유실의 끝을 이와 혀로 살짝 비틀자 비음이 터져 나왔다.
“하앗!”
헌원에게 입이 하나라 달래 줄 수 없는 다른 가슴엔 손을 올려 희롱했다. 헌원의 혀가 유실을 짓누르고 유륜을 훑을 때마다 헌원을 잡은 백아의 손이 미끄러졌다. 유달리 예민한 곳이었다. 방 안엔 정돈되지 않은 백아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헌원은 계속해서 백아의 가슴을 애무했다.
한참을 그렇게 백아의 가슴을 유린하던 헌원은 문득 입술을 떼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백아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위로 헌원의 희롱에 붉어진 유실만이 바짝 성을 내며 서 있었다.
그래서 아쉬웠다. 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헌원의 가슴에 자리한 세 개의 붉은 꽃잎이 백아의 가슴엔 존재하지 않았다. 각인은 헌원만이 백아를 갈구하고 있다.
소매치기라도 되고 싶었다. 소매치기라도 되어 백아의 마음을 훔쳐 제 안에 깊이 숨겨 두고 싶었다. 마음을 훔칠 수 없다면 백아에게 소중한 그 어떤 무엇이라도. 그렇다면 백아는 그를 되찾으려 헌원에게 온 신경을 쏟을 터였다. 그렇게라도 잡아 둘 수 있기를 바랐다. 누군지 모를 허상의 상대에게 백아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백아를 보는 헌원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이거, 예뻐요.”
백아의 손끝이 헌원의 꽃잎을 더듬었다. 꽃잎의 둘레를 따라 덧그리는 손길에 헌원은 진저리쳤다. 백아가 놀라 손을 떼고 헌원을 바라보았다. 제게 향하는 헌원의 미소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러합니까?”
“네? 어…….”
“백아께도…… 새겨 드릴까요?”
헌원은 대답을 듣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싫다는 대답은 그 무엇이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백아에게 듣고 싶은 말은 긍정뿐이었다.
헌원은 백아가 각인하면 꽃잎이 자리하게 될 위치에 제 입술을 올렸다. 이로 짓이기고 세차게 빨아들이며 백아의 가슴에 멍 자국을 만들었다. 백아의 입에서 신음이 났다.
쾌감보다는 통감에 가까웠을 행위에 백아의 눈가에 이슬이 달렸다. 그럼에도 백아는 헌원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꾹 참고 헌원을 안은 팔에 힘을 더하며 행위가 끝나길 기다렸을 뿐이다.
입술을 뗀 헌원은 붉은 멍울이 생긴 백아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거리를 두고 보니 조금은 꽃잎 같기도 했다. 이 멍울은 시간이 지나면 정인을 애타게 그리는 색으로 변할 것이다. 헌원은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못된 생각을 했다.
“예쁜가요?”
“아팠습니까?”
동시에 튀어나온 물음에 시선이 부딪쳤다. 헌원은 왜인지 시선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고개를 돌리기는 싫어 헌원의 시선은 백아의 입술 아래 어딘가를 맴돌았다.
“내가 먼저 물었는데.”
대답을 구하는 칭얼거림에 다시 백아와 시선을 마주한 헌원은 궁금증만이 담긴 눈동자를 보았다. 헌원은 천천히, 그리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쁩니다, 백아. 제 눈엔 더없이.”
헌원의 대답에 백아가 미소 지었다.
“그럼 더 해 줘요.”
백아가 침상 위에 누운 채로 가슴만 헌원에게 내밀었다. 순진한 미소 아래 물든 붉은 얼룩이 매혹적이었다. 달아오른 가슴이 천진하게 헌원을 유혹했다. 그 모습에 헌원의 복잡했던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말았다.
헌원의 마음을 훔쳐 간 도둑은 언제나 이토록 사랑스러웠다.
헌원은 가짜 꽃잎이 진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백아의 가슴께에 세 개의 꽃잎을 만들었다.
3
문 너머가 소란해 헌원은 별채로 통하는 중문 앞에서 멈춰 섰다. 가만히 들어 보니 백아의 웃음이었다. 오늘은 무엇이 즐거워 저렇게 웃고 계실까? 헌원은 문고리에 손을 얹기만 한 채로 빙그레 웃었다.
“하하하, 이 녀석, 어어? 안 돼, 단이야, 이 녀석이…….”
“그러게 나뭇가지로 하시라니까요…….”
둘이 말하는 양이 누군가 다른 이가 있는 듯했다. 근래 백아의 행동이 떠올라 불안이 들었다. 정말 사람이라도 주워 온 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헌원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문고리에 얹어 놓았던 손에 힘이 들어가 문이 열렸다.
“백…….”
문이 열리며 보이는 광경에 헌원은 조금 허탈해졌다. 헌원의 염려대로 백아가 무엇을 주워 오기는 하였다. 그러나 헌원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백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닌 강아지였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 털을 가진 강아지는 백아의 손에 들린 물건을 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백아의 비단신이었다. 백아를 보니 역시나, 한 발은 신 없이 족의로 땅을 딛고 있었다. 옆에 선 단이가 울상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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