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유 관원과 헤어져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 헌원은 다시 백아를 생각했다.
이 시간 즈음이면 백아는 헌원을 기다리며 마당을 거닐고 있거나 별채의 침소에서 이야기책을 탐독하고 있으리라. 서재에 마음껏 드나들어도 된다고 슬쩍 언질을 주었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싫은 모양이었다. 영 내켜 하지 않는 기색에 헌원도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단순히 서재가 싫으신 걸까, 아니면 교의가 불편하여 그러시나. 백아를 위해 마련했던 두툼한 깃털 방석에 안감을 다시 하라 일러야겠다. 그래야 언제라도 마음이 생기시면 편히 앉으실 터이니.
백아를 궁금해하며 걸음을 옮기니 축지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대문이 눈앞이었다. 헌원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실없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숨겨진 적성은 도인이었던가. 아니다, 도인은 색욕을 탐하지 못하니 헌원은 절대 도인이 될 수 없다. 백아를 곁에 두고 어찌 음심을 참기만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백아의 곁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니 헌원의 적성에 도인은 맞지 않았다.
백아만 있으면 천자나 천제가 부럽지 않으니 헌원에게 아방궁이자 무릉도원은 이 승상 댁의 별채였다. 거기에서 백아와 함께 극락을 노닐리라. 눈앞의 중문만 지나면 헌원의 극락이 펼쳐질 것이라 헌원은 집 안에서도 걸음을 재촉했다.
“백아, 헌원이 왔습니다.”
그러나 헌원의 기대는 어긋났다. 중문을 지나 침소로 향하는 동안 헌원은 백아의 머리칼도 볼 수 없었다. 단이마저 보이지 않아 헌원은 백아가 있을 만한 곳을 모두 헤집었다. 근래엔 백아가 잘 가지 않는 서재부터 시작하여 별채 구석의 작은 은신처까지 모두 기웃거리며 찾아보았으나 백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직접 찾기를 포기한 헌원은 아범을 불러 백아의 행방을 물었다.
“작은 마님께서 어디 가신 게냐.”
“미시(오후 1~3시)쯤 외출한다 하셨습니다. 아직 들어오지 않으셨습니까?”
응당 있으리라 생각한 백아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집을 나선 시각이 미시라면 헤아려 보지 않아도 돌아올 시간이 한참은 지나 있었다.
책을 빌리러 간 거라면 벌써 돌아왔어야 하는데, 호위인 천희와 단이가 따라갔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가서 찾아보아야 할까, 아니 혹여 길이 엇갈리면, 하며 생각이 머릿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했다.
어디 멀리 간 건 아니겠지만, 오래지 않아 돌아오겠지만. 잠시간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헌원의 속에선 스멀스멀 불안이 번졌다.
기다리는 내내 신경이 쓰여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별채 앞 작은 마당을 빙글빙글 돌다 중문 근처 별채 입구에서 서성이며 열리지 않는 문을 흘깃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은 한 시진(두 시간)은 족히 지난 듯한데.
속만 태우며 조급해하던 헌원은 일 다경(15분)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섰다.
대문을 나선 헌원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느 한 곳으로 백아를 찾아 나서면 다른 길에서 나타난 백아가 헌원을 찾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백아는 다시 헌원을 찾아 나서고, 돌아온 헌원은 다시 백아를 찾아 나서고……. 서로가 서로를 찾아 헤매는 애타는 굴레가 헌원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불안을 키웠다.
아니, 어쩌면 찾아 헤매는 건 헌원 혼자일지도 모른다. 백아는 내내 그리던 소설 같은 사랑을 찾아 떠난 건지도 모른다. 거기서 항상 곁에 있어 익숙하여 설렌 적 없는 저를 대신해 한눈에 반할 만큼 훤한 푸른 눈을 한 미장부를 만나 그에게 사랑 노래를 들을지도 모른다.
순간 투기와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현기증이 일었다.
헌원은 눈을 꾹 감았다.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 가는 상상은 백아가 눈에 보이지 않아 드는 불안이었다.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어 간신히 진정한 헌원은 방향을 가늠했다. 늘 오가던 저자로 갔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하여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 멀리 낯익은 인형이 보였다. 백아였다. 새끼손가락만 한 사람의 형상이었지만 헌원은 한눈에 백아임을 알아보았다.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보폭을 크게 하여 뒤꿈치를 쿵쿵 찧는 걸음걸이와 씩씩대는 어깨는 부아가 났을 때의 모습이었다. 뒤따르는 단이가 만류하지 않고 그저 털레털레 걷는 모양새를 보아 하니 백아가 또 무언가 고집을 부린 모양이었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심통을 부리는 것일 터다.
“헌원!”
얼굴이 보일 법한 거리까지 다가와서야 백아는 헌원을 발견했다. 백아는 쪼르르 달려와 헌원의 품에 안겼다. 헌원은 백아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졌다. 머리카락을 걷어 낸 얼굴은 볼이 잔뜩 부은 것이 짐작이 크게 어긋나진 않은 듯했다.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걱정했습니다.”
마주 안으며 다정스레 맞아 주는 헌원의 인사에 백아는 눈가에 이슬을 달았다. 무슨 일인지는 들어 보아야 하겠으나 어지간히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백아가 달려오는 바람에 뒤처진 단이와 천희가 허겁지겁 거리를 좁혔다. 백아는 가까이 다가온 단이에게 눈을 흘기며 헌원에게 매달렸다.
“헌원.”
“……늦었으니 안에 들어 요기부터 하세요, 백아. 종일 돌아다닌 듯한데 출출하진 않으십니까?”
단이와 천희 모두 지친 기색인 데다 혹여 둘의 잘못이라 해도 집안의 허물을 대로에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헌원은 우선 백아를 추슬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단이와 천희를 물리고 단둘이 되자 백아는 낮에 저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이번에도 그 사랑 찾기가 문제였다. 헌원은 백아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이 행동력만 앞서는 정인께서 이번에 읽은 것이 거친 이를 제 사람으로 만드는 내용이었단다.
작중의 거친 이가 소매치기부터 시작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무뢰배가 되었으므로 백아는 그 소매치기를 잡아 초창기에 누런 싹을 자르고 건실한 이로 바꿔 놓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뜻은 좋으나 행동이 문제였다.
“집 안엔 모두 건실한 사람들뿐이었어요.”
그리하여 눈을 돌린 곳이 저자였단다. 무어라도 하기 전에 싹수가 노란 이를 만나는 일이 우선이었다. 패물을 집어 드는 걸 단이가 기겁하며 말려 백아는 주머니에 은자를 나누어 담았다.
채비를 하고 저자로 나선 백아는 만류하는 단이와 천희를 으름장으로 멀리 물리고 묵직한 돈주머니를 찬 채 저잣거리를 이리저리 거닐었단다. 그러나 검이라곤 목검 휘둘러 본 경험이 다인 백아가 날랜 소매치기들을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돈주머니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던 것이 대다수요, 알아챘어도 이미 늦었거나 힘이나 속도가 달려 모두 놓친 모양이었다. 드잡이질 한 번 해 보지 않은 백아가 거리에서 머리가 굵은 이들을 잡아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헌원만큼 날래던걸.”
지난번에 거지들 배를 불려 준 것과 같이 이번에도 거하게 적선을 하고 돌아오셨다는 말이다.
백아의 이야기만 들어도 앞뒤가 짐작 가능한 상황에 단이와 천희의 지친 표정이 안쓰러워졌다. 듣는 헌원도 이리 한숨이 나오는데 반나절이나 그걸 보며 백아를 따라다녔을 단이와 천희는 오죽했을까.
“그랬는데, 천희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한 사이 백아의 이야기는 그리 부아가 난 연유로 흘러 있었다. 보다 못한 천희가 마지막 주머니를 훔쳐 달아나는 아이를 잡아다 백아 앞에 대령했단다. 어지간히 억울했던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백아는 꽉 막힌 목소리를 내었다.
“그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가 잡으려 했어요, 헌원.”
백아는 제가 잡아 훈계하고 싶었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생각한 바가 제 성대로 되지 않자 그것이 아니라며 되레 천희에게 화를 내고 돌아섰던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듣고 헌원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단이의 태도로 짐작한 것과 같이 이건 백아의 잘못이었다.
백아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것이 설령 목숨이라 할지라도 정인께서 달라시면 기꺼이 드릴 테지만 잘못한 행동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만은 헌원이 지켜 온 철칙이었다. 헌원의 정인은 잘못에 대한 수긍은 쉬이 하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헌원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백아를 불렀다.
“백아. 이번 일에선 백아의 편을 들긴 어렵겠습니다.”
“어째서요? 헌원?”
헌원의 말에 백아의 볼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볼을 부풀리고 입을 앙다문 표정은 헌원이 쉽게 무너지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헌원은 백아를 나무라려는 태도를 견지했다.
“옛이야기들을 보면 죄를 저지른 이들을 아랫사람이 잡아 대령하는 일이 흔합니다. 그를 살펴보면 윗사람은 죄의 경중을 판단하고 형을 내리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관아의 포졸들이 그리 많은 것이고요.”
이어지는 헌원의 타이름을 듣는 백아의 눈꼬리가 점점 아래를 향했다. 뒤로 젖혔던 양어깨가 슬그머니 수그러들었다.
“그들은 백아를 모시는 단이나 천희처럼 폐하의 수족입니다. 도성의 그 많은 죄인들을 폐하께서 직접 잡으러 다니실까요?”
“아니요, 병사들이 잡으러 와요. 저잣거리에서 보았어.”
백아의 대답에 헌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입니다. 천희가 잡아 왔다면 그 자리에서 아이를 훈계하거나 관청에 넘겨 죄를 물으면 될 일입니다. 백아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백아가 듣기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내리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하나 헌원에게 중요한 건 이 다음이라 자신을 다잡고 계속 말을 이었다.
“또한, 호위를 그리 멀리 두고 다니시다니요. 제가 천희를 호위로 붙여 드린 건 백아의 안전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소매치기 중 하나가 나쁜 마음을 먹고 백아에게 해를 입히려 달려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멀리 있던 천희가 백아를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백아는 이제 머리를 푹 숙였다. 제 잘못을 이해한 백아는 헌원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수그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다음 편에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