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허리에 팔을 감아 오는 백아를 마주 안은 헌원은 한 손으로 백아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읽어 주던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큰 높낮이 없이 낭독하는 목소리에 백아는 금세 색색 하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헌원은 제 품에 잠든 정인의 이마를 애정 어린 손길로 매만졌다. 어디서 고뿔을 얻어 왔을까, 제 어여쁜 정인은.
“오늘은 무엇을 하셨느냐?”
그릇을 치우러 들어온 단이에게 백아의 하루를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헌원의 물음을 들은 단이는 바로 답을 올리지 않고 머뭇거렸다. 헌원의 혀 차는 소리를 듣고서야 마지못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후 늦게 비가 오자 백아가 갑자기 곤란한 사람을 돕겠다며 쫓아 나가더란다. 비 맞은 강아지 꼴로 도움을 구하는 이가 하나쯤은 있지 않겠냐면서. 단이의 망설임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어찌나 걸음이 빠르던지 저는 물론 남 호위께서도 간신히 따라잡았습니다요.”
몸이 날랜 백아의 새 호위도 우산을 씌워 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며 단이는 대범하게도 헌원의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말리기가 점점 힘겨워집니다…….”
“네 할 일은 주인을 만류하는 것이 아니라 보필하는 것이다.”
헌원의 꾸짖음에 단이가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헛말입니다, 주인마님.”
“네 고생은 알고 있으니 소홀히 하지만 말거라.”
백아가 워낙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탓에 가장 고생하는 이는 다름 아닌 단이였다. 그래서 백아에게 으름장을 놓는 걸 알면서도 크게 꾸짖지는 않았다. 헌원은 격려차 단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단이는 영리한 아이니 이 정도면 행동을 조심할 터였다.
단이를 내보내고 헌원은 품에 안긴 백아의 발간 얼굴을 가만히 쓸었다.
자꾸 누구를 찾아다니시는 겁니까?
답을 듣지 못할 질문을 던지고 백아를 고쳐 안으니 백아도 뒤척이며 헌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사람 여기 있습니다.
평소보다 따뜻한 백아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르며 헌원은 작게 한숨지었다.
백아의 고뿔이 헌원에게 옮았다.
백아는 하루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온 데를 활보하고 있었으나 되레 강건했던 헌원이 며칠을 열감에 시달렸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라 헌원은 고뿔이 백아에게 도로 옮을까 걱정해 침소를 옮겼다.
덕분에 며칠이나 백아를 품지 못한 몸이 기운마저 내지 않아 고뿔은 헌원의 몸에 꽤나 오래 머물렀다. 헌원이 업무를 보면서도 계속 잔기침을 하자 유 관원이 헌원을 걱정했다.
“늘 기운이 넘치던 자네가 어인 일인가?”
“몸이 허했던 모양입니다.”
“자네 내자가 아니라 자네가 보약을 드셔야겠군그래.”
유 관원의 농담에 헌원은 웃으며 백아를 떠올렸다.
제 보약은 그대입니다.
눈앞에 없는 이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며 헌원은 귀가할 채비를 했다. 오늘은 멀찌감치 서서라도 백아와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래야 이놈의 고뿔이 떨어질 터이니.
“어지간히 하시는 게 어떠한가, 자네.”
백아 생각에 빙그레 웃는 헌원에게 동료인 유 관원이 핀잔을 던졌다.
“또 저 표정. 저 표정 저거 자택에 숨겨 둔 보물단지를 떠올리는 표정이시렷다.”
같이 산 것은 차치하고 혼례를 올린 지도 십 년 가까이 되건만 헌원은 아직도 제 처가 못 견딜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유 관원의 큰아이가 벌써 열이니 햇수로는 헌원과 비슷했으나 부부 사이는 틈이 컸다. 유 관원은 신혼 때보다 한참은 소원해진 제 처와의 사이를 떠올리며 입맛을 쩝 다셨다.
십 년이 넘게 금실이 좋은 부부가 없지는 않았지만 헌원은 그 애틋함이 남달랐다. 유 관원이야 헌원을 형제처럼 여겨 그저 보기에 흐뭇했으나 헌원의 저런 태도는 간혹 속 좁은 이들의 시샘을 샀다. 저리 티를 내기까지 하니 짓궂은 이들의 놀림이 더한 것 아닌가.
“그나저나 자네, 곡식을 푸는 이유가 무엇인가? 승상께서 무슨 하교라도 내리셨는가?”
영문 모를 소리를 던지는 유 관원에게 헌원이 의아한 낯을 했다. 표정을 보니 헌원은 유 관원의 말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모양이라 유 관원이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요 며칠 자네 집에 거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던데. 이 승상 댁 큰 아드님이 음식을 내리신다고 말이야. 어이쿠, 낯을 보아 하니 정말 모르는 일인가 보군.”
유 관원은 자신이 들은 소문을 제대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도 아는 바가 없어 헌원에게 설명한 것은 처음 내어놓은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헌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사의 일이야 정 부인의 소관이라지만 정 부인께선 의논도 없이 헌원의 이름을 걸 분이 아니셨다. 독단적으로 하셨다 해도 언질은 하셨을 터인데 헌원은 금일 오전 문안을 드릴 때까지도 들어 본 바가 없다.
헌원은 의아함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예상외로 일을 벌인 이는 백아였다.
헌원의 몽상가는 비 오는 날 곤란에 처한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을 며칠 전의 하루로 접은 것이 아니었다.
때마침 장마가 져 수시로 비가 오자 백아 또한 수시로 뛰쳐나가 길거리의 부랑자를 데려왔는데, 현실에서 연애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있나. 지나던 거지의 배만 불려 준 꼴이 되었다.
그것이 반복되자 백아에게 한 끼씩 얻어먹은 배곯은 이들이 헌원을 칭송했다. 승상 댁 큰 도련님은 내자 또한 어진 이를 들였다고 말이다.
마침 오늘도 늦은 오후에 비가 한 차례 쏟아진 날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승상 댁 마당이 식객들로 가득했다. 남에게 빌어 끼니를 때우는 이들은 모두 모여들었는지 승상 댁 가솔들이 죄 바쁘게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헌원!”
그 한가운데에서 백아가 헌원을 불렀다. 백아의 외침을 들은 가솔들이 모두 헌원에게 인사를 하고, 그를 본 식객들이 헌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헌원은 다른 이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백아에게 다가섰다.
“백아, 이게…….”
“잠시만요. 지금은 바빠요.”
가솔들의 상차림을 진두지휘하던 백아는 식기까지 직접 나르려 했다. 헌원은 가까스로 백아를 말렸다. 승상 댁 작은 안주인이 가솔들이나 남들 앞에서 보일 행실은 아니었다. 그러지 않아도 말이 많이 나오는 처지이니 책잡힐 일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곯은 배를 가득 채운 식객들이 양손에 내일의 끼니까지 알뜰히 챙겨 들고 승상 댁에서 물러난 후에야 헌원은 백아와 말을 나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백아?”
자초지종을 안 헌원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 곳간이 축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장안 거지들 며칠 끼니를 해결해 준 정도로 가세가 기울 이 승상 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만 헌원을 한숨짓게 한 것은 제 정인이 언제쯤 저를 봐 주려나 하는 안타까움이 원인이었다. 이리 가까이 있는데 어디를 헤매고 계신 것인지.
“제가 잘못한 건가요?”
헌원의 한숨에 백아의 눈꼬리가 처졌다. 백아의 앞에선 인상을 굳히는 일조차 드문 헌원이 좀 전엔 행동을 제지하고 지금은 표정을 굳혔다. 혹여 큰 잘못을 한 것인가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전혀 다른 걱정을 하는 백아의 속내를 이번에는 헤아리지 못했다. 서운했던 헌원은 표정을 풀지 않아 백아의 오해가 깊어졌다. 풀 죽은 백아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헌원은 굳은 표정 그대로 백아의 숙인 고개를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예, 큰 잘못을 하셨습니다.”
“정말, 정말인가요?”
어지간한 잘못에도 백아를 나무라지 않는 헌원이 큰 잘못이라 인정을 하니 백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헌원에게 물었다. 헌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백아. 제가 백아의 덕으로 아버님보다 더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자식 된 도리로 이보다 더 큰 불효가 없을 듯합니다.”
제 맘을 알아주지 않는 백아에게 약간은 야속한 마음을 담아, 백아가 혼란스럽도록 심술을 섞었다.
헌원의 으름장에 백아는 멍하니 헌원을 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헌원뿐 아니라 아버님께까지 미움을 샀다니 백아로선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아의 눈가에 이슬이 고였다.
아이쿠, 이런. 으름장이 과하였나 보다.
헌원은 손을 뻗어 금세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었다. 백아는 눈을 깜빡이며 뺨을 감싼 헌원의 손바닥에 볼을 기댔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 아래를 향하고 있어 헌원은 백아의 턱을 잡아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계속 방울져 흐르는 눈물이 서운함 따위는 녹여 버렸다. 헌원은 백아가 취할 행동을 뻔히 알면서도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 제 좁은 도량을 탓했다.
“백아, 저를 보시겠습니까?”
백아가 다시 시선을 들어 헌원을 보자 헌원은 표정을 풀고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잔뜩 굳어 있던 백아의 표정에 의아함이 섞였다.
“하나 아버님께선 그릇이 큰 분이니 기꺼워하실 겁니다. 고운 마음을 쓸 줄 아는 백아도 기특해하실 것이고요.”
이 일이 이 승상 귀에 들면 이 승상은 껄껄 웃으며 헌원을 놀릴 터였다. 헌원의 곤란을 기꺼워하며 헌원을 곤란하게 한 백아를 기특해하시겠지. 헌원은 틀린 말은 아니라 속으로만 투덜대었다. 지금은 백아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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