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상아색의 피부 위에 도드라진 붉은 입술이 유혹하는 듯했다. 등청만 아니었다면 저 붉은 입술을 양껏 머금었으리라. 한번 머금고 나면 쉬이 물러날 자신이 없는 헌원은 아쉬움을 삼키고 백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백아, 일어나세요. 해가 중천입니다.”
몸을 흔들어 백아를 깨우려던 헌원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감은 눈 아래로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길고 가지런한 검은 속눈썹이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파르르 떨렸다.
“……백아?”
헌원의 부름에 다시 속눈썹이 움찔거리고 입꼬리마저 당겨지는 모양새가 잠에서 깬 듯한데 백아는 영 눈을 뜨려 하지 않았다. 민감한 목덜미를 손등으로 쓸자 어깨를 움츠리기까지 하는데도 눈꺼풀만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자고 있어요, 헌원.”
어떻게 일어나게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백아가 입을 열었다. 눈은 여전히 꼭 감은 채였다.
이제는 깨어 있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지 백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어렸다. 헌원은 백아의 입가에 자리한 작은 보조개를 바라보다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백아가 이러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 머리를 굴려 보아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실마리를 주시겠습니까? 아둔한 이 헌원은 백아가 이러시는 연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습니다.”
헌원의 말에 백아의 입가에 보조개가 사라졌다. 백아의 입술이 역으로 호선을 그린 탓이었다. 헌원은 아쉬운 마음에 보조개가 사라진 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입술을 비죽이던 백아는 입술 근처를 문지르는 헌원의 손가락을 물었다. 이를 세우지 않아 아프지는 않았다. 헌원이 손가락을 빼내자 백아가 입을 열었다.
“작일(어제) 어머님께서 부르셔서 안채로 갔더니 실을 잣고 계셨어요.”
백아의 한마디에 헌원은 백아가 일어나지 않으려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사나흘 전쯤에 읽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산신의 저주로 물레에 찔려 백 년간이나 잠을 자게 된 공주의 이야기였다. 그날은 백아의 태도가 건성이어서 헌원도 인상 깊게 기억하지 않았다. 그랬던 이야기인데 물레를 보고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물레가 있었습니까?”
“으응, 하지만.”
헌원은 길게 숨을 내쉬며 엄지로 백아의 감은 눈을 쓸었다. 백아는 오늘도 왕자님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을 찔릴 일은 없던걸요. 물렛가락도 뭉툭하고……. 어디에 찔린 거지?”
백아의 의문은 어릴 적 헌원도 떠올린 것이었다. 정 부인이나 여염집에서 쓰는 물레는 손가락 마디보다 굵은 나무로 만든 것이라 백아의 말대로 날카로운 구석이 없었다.
헌원은 그 답을 서역의 상인에게서 얻었다. 서역 상인으로부터 구한 서책에 서역 물레의 도안이 있었다.
“서역의 물레는 우리의 물레와 다르게 생겼습니다. 물렛가락이 하늘을 향해 서 있고 그 끝이 날카로워 찔리기 쉬운 외형입니다.”
백아는 바로 연상이 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가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을 해소한 백아는 후련한 표정을 했다.
“바보 같아요.”
“뭐가 말입니까?”
“뾰족하면 자꾸 다칠 텐데. 우리네처럼 쓰지.”
일리 있는 말이라 헌원은 빙긋이 웃으며 맞장구쳤다.
“서역인들은 백아처럼 영민하지 못하여 그런가 봅니다.”
헌원의 아부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에 백아는 만족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영민하단 표현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헌원은 그때까지도 눈을 꼭 감은 채인 백아에게 자신의 질문을 던졌다.
“손을 찔리지 않았다면 왜 눈을 뜨지 않습니까?”
백아는 대답 대신 헌원의 눈앞에 왼손을 폈다. 눈을 감아 가늠이 되지 않았는지 방향이 조금 어긋났지만 백아의 손가락 끝에 생긴 붉은 점 같은 자국은 잘 보였다.
“바늘에 찔렸어요.”
깊게 찔렸는지 붉은 자국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헌원은 애처로운 마음에 손끝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따가웠는지 백아가 움찔하며 손을 움츠렸다.
“아무리 봐도 물레는 뭉툭하기에 뾰족한 건 없나 여쭈었더니 바늘을 꺼내 주시던걸.”
물레에 관심을 보이는 백아를 보고 흡족해하셨을 정 부인이 헌원의 눈에 그려졌다. 전에는 관심은커녕 쳐다보지도 않던 물레를 유심히 살피니 백아가 바느질에 흥미를 보인다고 여기신 모양이었다.
헌원은 단이가 가져온 꾸러미를 떠올렸다. 어머님께서 반짇고리를 보낸 연유가 이것이었나. 바늘까지 찾았다니 오해하실 만도 했다.
“재미는 있었습니까?”
“아아니, 손가락만 찔렸어요.”
시무룩한 백아의 대답에 헌원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백아의 자리가 자리다 보니 정 부인은 백아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많으셨다. 바느질도 그중 하나였는데 사내아이인 백아가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붙잡고 가르치시려는 걸 헌원이 그러지 마시라며 만류했었다.
백아에게도 하기 싫은 건 하지 말라 하였건만 어제는 관심을 보이니 기회를 잡았다 여기셨으리라. 손수 가르침을 주시는 어머님 앞에서 싫다 뛰쳐나오기는 또 겸연쩍은 일이다.
백아와 정 부인의 사이는 돈독했다. 헌원의 형제들이 막내인 진원마저 죄 살갑지는 않은 탓에 살가운 장난도 치고 밉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백아를 정 부인은 막내처럼 귀여워했다.
“일찍 물러나지 그러셨습니까. 저를 핑계로 해도 되었을 텐데요.”
“그래도 어머님이 하시는 걸 보는 건 즐거웠어요. 신기하던걸.”
정 부인도 강요는 하지 않으실 테니 백아가 흥미를 보인다면 두어도 좋을 터다.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재미를 붙이면, 수놓인 손수건 하나 정도 욕심을 내어 볼까. 꿈을 크게 꾸어 손수 지은 옷이라도 받으면 헌원은 그를 황제의 용포처럼 입을 것이다.
“오늘도 오라 하셨는데…….”
“그럼 이만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헌원은 그때까지 잡고 있던 백아의 손에 작게 입김을 불었다. 다치거나 하면 곧잘 하던 행동이었다. 백아는 간지러웠는지 작게 웃었지만 여전히 눈을 뜰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제는 답을 아는 헌원은 고개를 숙여 백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백아는 대답 대신 헌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은 여전히 꼭 감고 있었지만 입술은 기대하는 듯 헌원을 향해 도드라졌다. 헌원은 기꺼이 그 뜻을 받들었다.
촉-
이번엔 백아의 왕자님이 될 수 있었다.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살포시 입술을 눌렀다. 말랑한 입술이 황홀했다. 헌원은 황급히 입술을 떼었다. 길게 했다간 시간 가는 줄 모를 게 분명했다.
고개를 든 헌원은 백아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그러나 백아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헌원의 눈앞에 손가락 하나가 세워졌다.
“한 번.”
“무슨 뜻입니까, 백아?”
“어제 다섯 번을 찔렸어요.”
손끝의 붉은 자국은 세어 보니 백아의 말대로 다섯 개였다. 욕심 많으신 정인께선 다섯 번의 입맞춤을 받아야 할 깊은 잠에 드신 모양이었다. 헌원의 자제심이 백기를 들었다.
헌원은 몸을 숙여 조금 전처럼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물러났다가 다시 백아의 입술에 당도한 헌원은 조금 전과 다르게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걸 세 번으로 치지요.”
위험하게 낮은 목소리였다. 헌원의 입술이 자제하던 욕심을 풀어헤치고 질척하게 감겼다.
귀가한 헌원은 즐거운 걸음으로 백아가 기다리고 있을 침소로 향했다.
오늘도 어머님께서 부르셨다 하였으니 백아가 이야깃거리를 가득 안고 헌원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백아를 품에 안고 이야기를 듣는 일은 밤을 새워도 즐거울 일이었다.
마침 내일은 쉬는 날이기도 하여 헌원의 발걸음은 날듯이 가벼웠다.
“오늘은 잠자리에 이르게 들 거라 하셨습니다.”
별채의 입구를 지키고 선 단이의 아룀이 기대하던 바와 달라 헌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단이를 뒤로하고 침소의 문 앞에 섰다. 일단은 잠이 들었다 하니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데 안쪽에서 급히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헌원은 아침의 일을 떠올리곤 단이가 그렇게 아뢴 이유를 뒤늦게 눈치챘다.
“백아, 주무십니까?”
부러 목소리를 내면서 침소에 들었다. 침상에 엉거주춤하게 누운 백아와 탁자 위에 팽개쳐 둔 반짇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짐작이 맞았다.
백아가 자세를 추스를 시간을 주려 헌원은 탁자를 천천히 정리하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런 배려가 의미 없이 헌원이 침상에 걸터앉자 백아가 입을 열었다.
“재미가 없어요, 헌원.”
눈은 예상대로 꼭 감은 채였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헌원은 급히 눕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옷매무새마저 정리해 주는 헌원의 손길에 백아는 눈을 감은 것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일어나 있을 때와 같아졌다. 부루퉁한 표정을 하고 헌원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눈도 어깨도 허리도 아파.”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머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까요?”
“으음, 그건…….”
그건 또 내키지 않는지 백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헌원이 가만히 말을 잇길 기다리자 백아가 누가 들을세라 조그맣게 말했다.
“어머님이 실망하시잖아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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