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원고담-11화 (11/66)

11화.

헌원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애써 다잡으며 백아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했다. 백아가 쫑긋 귀를 세우고 헌원의 말을 기다렸다. 백아가 잡은 옷자락이 당겼다.

“호위는 어인 일입니까?”

닿을락 말락 스치는 거리에서 새어 나가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연유를 물었다. 호위를 붙이긴 할 생각이었으니 그것으로 구슬리면 될 터다.

“그렇지 않아도 알아보고 있던 차였습니다. 단이 하나로 바깥나들이는 위험한 듯하여 저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요.”

헌원의 말에 이미 도화색인 얼굴에 화색이 돈다. 발간 볼에 손등을 대었더니 불에 덴 듯 뜨겁다.

지나치게 높은 온도에 고뿔이라도 걸린 건가 하여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은 없었다. 그저 흥분인가. 이마를 덮은 손 아래에서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가 나왔다.

“정말이요? 호위가 생깁니까?”

“에헴-.”

백아의 말에 이어 밖에서 단이의 과장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백아가 문 쪽을 흘끔 보더니 다시 몸을 잔뜩 움츠렸다.

어이쿠, 애써 달래었는데. 헌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백아를 다시 어르며 헌원은 한 번 주의를 시키긴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 딴엔 주인을 위한다는 행동이라 매번 눈감아 주고 있지만 백아가 눈치를 볼 정도라니 도를 넘은 것이 아닌가. 어디까지나 단이는 백아의 손발인 것을.

조금은 불편한 심기로 헌원은 품에 안은 백아를 다시 한참 구슬렸다.

“멋있는 분이었음 좋겠어요, 헌원.”

한참의 도닥임 끝에 가까스로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을 하는 백아의 볼은 늘 헌원의 표정을 무너뜨리곤 하는 고운 도화색이었다. 께름칙한 어감에 풀어지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백아와 눈을 맞추려 했다.

“바람을 가르는 빠른 검법과 날랜 몸놀림을 가진 분이요.”

그러나 뺨을 발갛게 물들인 백아의 시선은 헌원이 아닌 먼 곳을 향해 있었다. 헌원의 가슴 언저리에서 무언가 내려앉았다.

단이가 극구 말하지 못하게 말린 것은 이 때문이던가.

백아에게 남성이나 양인 호위는 붙일 수 없다. 발정기가 있는 음인이니 당연한 이야기다. 아직 오지 않았다지만 곧 오게 될 백아의 희락에 저 아닌 다른 이가 그 곁에 있는 상황은 상상만으로 등골이 서늘했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싫어했던 탓에 백아는 앎에서는 늦된 편이었다. 말이 늦게 트이고 배우려 하지도 않으니 행동거지가 모자라 보이거나 예의에 어긋난 구석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부인께서는 그리 근심을 하였지만 백아가 팔푼이이거나 천치인 것은 아니다.

세상 이치에 문외한인 것도 헌원이 제가 품어 보호하면 될 일이라 생각하여 백아가 하고픈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모습의 백아든 헌원은 그저 백아가 제 곁에 있으면 만족했다. 그래서 백아의 늦됨도 헌원에게 그리 문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이야기책에 나온 무사처럼 말입니까?”

“으응.”

그러나 그에 따르는 단점이 없진 않았다. 그중 가장 곤란했던 것은 백아가 음양의 이치에 대해 도통 이해하지 못해 가르치기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향인을 비롯하여 양인, 음인이라는 개념도 바로 서지 않은 백아에게 헌원은 도저히 향인의 교합에 관해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헌원은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 그저 ‘좋은 것’으로 눙쳐 버리고 시작했다. 백아도 좋아하니 된 것이라 저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럴 때엔 참 난감했다.

헌원은 기대에 찬 눈을 한 백아에게 그대가 음인이라 기대하는 남성이나 양인 호위는 붙일 수 없다는 말을 꺼내 놓지 못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헌원은 결국 다른 이유를 대고 말았다.

“장안에서 실력은 으뜸인 이를 붙일 겁니다. 백아에게 가장 좋은 이를 붙이고 싶은 제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다정한 대답을 듣고 세상 근심은 다 쫓아 버릴 듯 밝게 웃는 백아의 미소에 헌원의 가슴이 시렸다.

고심 끝에 고른 이는 실력이 좋은 평인인 여성 호위였다. 음인에게 음험한 수작을 거는 건 양인뿐만이 아니니 평인이라도 사내는 믿을 수 없었다. 양인의 수작이야 향과 동반되는 것이니 백아보다 먼저 음인인 단이가 알아챌 테고, 호위는 그를 물리칠 만한 수준급의 실력이면 되었다.

백아가 그저 무사라 한 것이 다행이었다. 남성이라 명확히 지칭했다면 헌원은 어쩔 수 없이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를 찾아 붙이고 내내 불안해했을 터였다. 사내라고 하는 것들은 고자라도 헌원은 믿을 수 없었다.

검술이야 힘보단 민첩함과 영민한 머리, 수련에 좌우되는 것이니 남가의 수제자 천희는 적절한 인사였다. 일찍이 이가의 후원을 받아 대대로 무사를 배출한 남가는 이 승상의 호위 또한 맡고 있었다.

천희는 힘이 달려 각궁은 다루지 못하지만 편전을 제 팔과 같이하는 버릇이 있으니 제법 먼 거리의 견제도 가능할 터였다.

이 승상이 그의 인적 사항을 보고 백아에겐 과한 호위가 아닌가 하문했지만, 천희와 비등한 실력으로 백 명의 호위를 딸려도 헌원에겐 모자란 인사였다. 가당치도 않다는 헌원의 단호한 표정에 이 승상은 허허 웃으며 아직도 그리 애틋하냐 하며 농을 던졌다.

그에 헌원은,

“제가 백아를 대하는 데엔 아직도란 없습니다.”

라는 대답을 하고 승상의 안전에서 쫓겨났다.

여성 호위를 붙일 거란 말에 백아는 제법 실망한 눈치였다.

“호위는 다 멋있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요. 예쁜 사람 말고.”

주위에서 본 여성이 죄 곱고 아리따운 모습들이라 백아는 여성이라 하니 고운 미모만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저자에서 빌려 읽는 책들도 죄 예쁘다고 묘사를 하니 그리 받아들일 수밖에.

호위로 들일 천희 또한 단아한 미인이었으나 그것을 보고 만만히 여기다간 혼쭐이 날 실력자였다. 그를 단순히 예쁨으로만 평한다면 그 무지와 무식이 한숨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면전에서 감히 가늠했다간 목이 달아날 테지.

“천희는 늠름하고…… 멋있는 분입니다. 꾸준한 단련으로 반듯한 체격을 갖추었고, 웬만한 무사보다 민첩합니다. 그 기세는 범과 같아 커다란 장정들을 압도합니다. 멋지지 아니합니까?”

“흐응.”

헌원의 설명에도 선뜻 연상하지 못하는지 백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예쁘다는 말은, 사내에게 붙이는 말이지요.”

고민하던 백아의 시선이 의아함을 띠고 헌원을 향했다. 헌원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그런 백아의 볼을 손끝으로 간질였다. 백아는 헌원의 손가락에 제 볼을 문질렀다. 언제나 도화색인 백아의 뺨은 더없이 따스했다.

“예쁘다는 수식어를 백아 앞에서 감히 다른 누구에게 붙일 수 있겠습니까?”

“푸흐-!”

뒤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필시 단이렷다. 헌원의 짐작이 맞았는지 백아가 헌원의 뒤쪽으로 시선을 향하다가 급히 다시 헌원을 보았다.

백아는 헌원을 보며 헌원이 좋아하는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헌원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시선을 끌려는 의도였다. 헌원은 백아의 고운 마음을 헤아려 단이의 무례를 넘어가 주었다.

헌원의 진심 섞인 궤변을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백아는 잠시 후에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헌원은 미소를 가득 담고 백아와 눈을 마주했다.

백아는 웃는 낯으로 유심히 헌원을 보더니,

“헌원은 멋있기도 하지만 예쁘기도 하니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요.”

하여 헌원이 내심 이마를 짚게 했다.

하지만 헌원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께서 어여삐 보아 주신다는데 무에 불만이 있으랴.

백아가 이번에 푹 빠진 이야기는 어느 호위무사와 그 주군과 약혼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였다.

헌원은 책을 읽으며 신하 된 자가 충을 버리고 주군의 여인을 탐하는 대목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본디 충을 버린 파렴치한의 말로에 걸맞게 파경에 이르는 이야기였으나 빌려 온 책에서는 달랐다.

원작에서는 파렴치한에 버금가는 짓을 벌였던 호위무사는 우수에 젖은 눈이 매력적인 뛰어난 무인으로 은애하는 정인을 위해 목숨마저도 버리는 순애보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연애담에 걸맞게 각색된 이야기였다.

호위무사를 꿈꾸는 거로 보아 이 이야기에서 백아는 왕에게 큰 지참금을 대신해 팔려 가는 어린 공주인 모양이었다. 하면 백아의 배우자인 헌원의 위치란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늙고 추레한 배불뚝이 왕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추잡하며 교활하기까지 하여 백아의 화를 돋운 인물이었다.

지위가 높아진 걸 감사해야 할까요?

헌원은 서운한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고 속으로만 물었다.

왕자님 나오는 동화들을 유독 좋아한다 했다. 정인인 제 곁에서 사랑 이야기에 눈을 빛내고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어여뻐 백아가 꿈꾸기 쉽도록 각색을 더 하여 읽어 주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소설 같은 사랑을 해 보고 싶어요.”

저자 소설들을 읽으며 연애담으로 눈을 돌린 백아가 꿈꾸는 눈으로 속삭였다.

“동화 속 왕자님을 만나고 싶어. 백마를 타거나, 검을 휘두르거나. 얼마나 멋질까요?”

그런 것쯤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는데. 하지만 백아가 원하는 건 헌원이 아닌 왕자님인 모양이었다. 헌원이 씁쓸해하는 사이 백아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헌원이 기꺼워할 만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다음 편에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