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백아를 보며 헌원은 무도회 참석의 가능성을 가늠했다. 백아가 보고 싶은 건 왕자님의 무도회이니 백아의 말대로 태자 전하보다는 왕부 쪽이 더 맞으리라. 헌원의 기억에 예친왕부나 협서왕부에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적당한 연배의 왕자가 있었다.
무도회라……. 타국의 왕족이 여는 비정기적인 연회임은 차치하더라도 관직에 매인 몸인 헌원이 쉬이 도성을 나설 수는 없었다. 황제의 윤허를 얻는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국경까지가 한계일 터다. 아니면 사절…… 황국에서 서역으로 사절을 보낼 일은 딱히 없다.
그러나 이렇게 기대하는 이를 실망하게 할 수는 없으니 정 안 되면 직접 연회를 베푸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다. 손이 아닌 주인의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겠지만 백아가 그런 걸 따질 이는 아니니 상관은 없으리라.
혹여 싫어한다면 다른 가문에 부탁을 해도 나쁘진 않겠지. 드는 비용이야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다. 준비는 그리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세책방에 가는 건가요?”
생각이 길어졌는지 어느새 세책방 근처였다. 백아는 질문을 던져 놓고도 저자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번화가에 들어서니 오고 가는 사람도 많아져 헌원은 백아와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세책방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다 큰 사내 둘이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걸으니 흘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알아보는 눈치는 아니었다. 소문이야 무성해도 낯을 아는 이는 드물 터였다. 구경하는 시선이 달갑지 않은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헌원은 걸음을 빨리했다.
“예,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도 있고 하여. 싫으시면 다른 곳으로 갈까요?”
“아니요, 좋아. 여긴 길을 잃어도 위험하지 않잖아요.”
“걱정은 됩니다, 백아.”
“알았어요. 조심할게. 헌원도 손 놓지 말아요.”
아직 무도회를 기대 중인가 싶어 확인차 물었으나 대답하는 백아의 말에 서운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되레 기대를 하는지 백아의 보폭이 넓어져 세책방에 들어설 즈음엔 백아가 앞섰다.
“오셨습니까, 아…… 이분은……?”
늘 혼자 들르던 헌원이 누군가를 데리고 나타나니 세책방을 운영하는 장가가 호기심을 보였다. 헌원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자입니다.”
“아아, 그분이십니까?”
젊어서 책쾌를 하던 장가는 눈치가 있어 불편한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헌원은 그 점이 마음에 들어 도성 안의 많은 세책방 중 이곳을 다니게 되었다.
“보실 만한 서책은 안쪽 왼편에 있습니다. 귀공자께서 보실 게 맞지요?”
헌원이 안내하려 했으나 백아는 장가의 손짓을 보고 이미 들어간 후였다. 등의 불빛으로도 반짝이는 눈동자가 세책방의 낯선 풍경에 호기심이 동한 듯했다. 진즉 데려올 걸 그랬나. 그러고 보니 백아와 나들이를 한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헌원은 제 무심함을 반성했다.
백아를 따라가려던 헌원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장가에게 간단하게 언질을 주었다.
“금일은 같이 들렀으나 앞으로는 홀로도 들를 겁니다.”
“알겠습니다. 잘 뫼시지요.”
이 정도만 이야기해 두어도 백아가 서책을 고르는 데에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그쯤 하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백아는 많은 서책 사이에서 골똘히 고민 중이었다. 민무늬의 표지들은 옆으로 밀어 두고 겉장이 알록달록하거나 비단으로 감싼 책들에만 백아의 시선이 닿았다. 헌원은 뒤에 서서 백아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백아는 작게 중얼거리며 결정하지 못했다. 헌원은 백아의 시선이 머문 책 중 지난번 들렀을 때 보아 두었던 몇 권을 골라 주었다.
“고르기 어렵다면 장가에게 여쭤보세요. 적당한 서책을 추천해 줄 겁니다. 마음에 드는 건 서재에 두셔도 되고요. 값은 제가 치를 테니.”
값을 치르고 나오는 길에 헌원은 백아에게 자잘한 설명을 해 주었다. 백아는 빌린 서책을 한 손에 꼭 쥐고 헌원의 말을 경청하며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백아가 골목으로 방향을 꺾었다. 남은 한 손엔 헌원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는 탓에 당황한 헌원이 급하게 뒤를 쫓았다.
백아는 골목이 꺾여 인적이 없는 곳에서 멈추었다.
“백아?”
등을 돌린 채 있던 백아는 뒤따라온 헌원이 부르자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다가와 헌원의 입술을 훔쳤다.
“혼자 오기는 두려웠는데…… 고마워요, 헌원.”
입술을 훔치고 물러난 백아가 더없이 어여쁘게 웃으며 말했다. 헌원은 백아의 행동에 당황하여 잠시 멈추었다가, 조금 늦게 백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속내를 감추지 않아 표현하려 하는 마음이 더욱 와 닿았다. 언제나, 늘 백아는 헌원을 최고의 기쁨으로 물들이는 사람이었다.
헌원은 백아의 양 뺨을 감싸 쥐고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작은 감사 인사’가 아닌 ‘큰 감사 인사’로. 헌원의 마음은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이유를 모르는 백아는 의아한 눈으로 헌원을 보았으나 입맞춤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헌원과 백아는 시간도 잊은 채 길고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툭, 투둑.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 헌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누군가 골목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헌원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백아와 자신의 옷 태를 가다듬었다. 하마터면 여기서 매듭을 풀어 버릴 뻔했다.
마음 같아서야 이대로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밖이라 참아야 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헌원은 가장 넓은 보폭으로, 백아를 들다시피 하여 귀가를 서둘렀다. 귀갓길이 멀었다.
헌원과 함께 세책방에 다녀온 이후 백아의 외출이 잦아진 어느 날이었다. 둘의 공간인 별채로 들어서는 헌원에게 백아가 예상하지 못한 요구를 했다.
“나도 호위무사가 있었으면 해요, 헌원.”
“호위무사요?”
단이마저 떼어 놓고 돌아다니는 일이 잦은 백아가 했다기엔 의외의 청이었다. 헌원의 놀란 표정에 백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헌원은 백아가 걱정하지 않도록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헌원의 권유로 세책방을 오가다 보니 두려움이 많이 희석된 모양이었다. 산 쪽의 담장은 아직 쳐다보지도 않지만 정문은 제법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선다는 단이의 말이었다.
세책방은 많은 객이 오가는 저자의 중심부에 있어 주변에 구경할 것이 많았다. 헌원과 함께 갔을 때엔 익숙하지 않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백아는 외출이 반복되자 제법 마음을 놓은 모양이었다.
단이는 물론이거니와 부엌일을 하는 숙씨 어멈까지도 허릿단에 조잡한 노리개를 달고 다니는 것을 보아 하니 저자의 상인들이 좌판에 늘어놓은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한 물건들이 백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게 틀림없었다. 단이는 헌원이 혹여나 하여 건네주었던 금전 주머니를 제법 빠르게 소진했다고 백아 몰래 언질을 주었다.
백아의 눈엔 귀한 것들만이 들길 바라 최상품의 물건만을 구해다 드린 제 실수일까요? 아니면 그저 그 왕성한 호기심이 거기로 향하신 걸까요?
저자의 물건들은 백아가 달거나 걸친 것들에 비하면 한참은 하품이었다. 그러나 백아는 그런 구분이 아직 어려울 터였다. 그저 승상 댁 별채나 안채에서 느끼기 어려운 소란함과 다양한 색채들에 호기심을 발휘하는 것일 터다.
단이를 끼고 외출하는 백아가 갈 만한 곳은 해 봐야 세책방까지의 저잣거리 대로 정도였다. 그러나 왕복 반 시진(한 시간) 정도의 멀지 않은 거리도 헌원으로서는 걱정이 아니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없는 사이 손끝에 생채기라도 나면 억장이 무너질 것이기에.
해서 이가와 인연이 있는 자 중에서 좋은 실력의 호위를 알아보고 있던 차였다. 한데 백아가 먼저 호위를 청하니 헌원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네에, 호위무사요.”
한데, 낯빛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이유를 모르게 불안했다.
헌원의 말에 대답하며 흘끔흘끔 눈치를 보는 양도 이상했다. 시선이 자꾸 먼 데로 가기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단이가 전력으로 고개를 젓다 헌원과 눈이 마주쳤다.
“히끅, 히끅.”
급하게 숨을 들이켠 단이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헌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켕기는 것이 있는 모양새였다.
오늘따라 헌원이 귀가하여 백아와 마주 앉았는데도 침소에서 나가지 않는다 했다. 괜스레 눈치를 보며 뭉개는 양이 무언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헌원의 시선이 백아를 향하자 단이가 있는 쪽에서 급히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무언가 지시하는 것이리라.
예상대로 단이에게 눈길을 주었던 백아가 움찔하더니 헌원에게 답삭 달라붙었다.
“밖은 위험하니까…….”
백아에게 주의를 시키며 헌원이 수차례 했던 말이지만 지금은 왠지 거슬렸다.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백아는 딴에는 머리를 굴려 헌원이 표정을 살필 수 없도록 헌원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단이는 서탁을 정리하는 척하며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헌원의 허리에 감은 백아의 팔이 움찔거렸다.
눈에 보이는 행동들에 넘어가 줄까 하다가도 백아의 발갛던 뺨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평소라면 보기만 해도 행복해졌을 낯빛인데 마음 한편이 묵직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 줄 수는 없을 듯했다. 헌원은 헛기침으로 단이를 불렀다.
“흠.”
단이가 있으면 백아가 입을 열지 않을 양이라 헌원은 고갯짓으로 단이를 물렸다. 백아 앞에서 크게 혼내지 않는 것을 아는 단이는 바로 듣지 않고 좀 더 달각거렸다. 그러다 결국 차가운 눈빛의 헌원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고개를 꾸벅 숙이고 침소를 나섰다.
문에 걸친 주렴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헌원은 지난번처럼 백아를 제 품에 당겨 감싸 안았다. 헌원의 의도를 짐작했음인지 선뜻 안겨 오는 백아가 사랑스럽고 궁금했다.
큰일이다. 단단하게 반해 있지 않은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다거나 부끄러운 건 아니어서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불길한 감이 드는 와중에도 백아의 몸짓 하나에 행복감이 들고 마는 제가 과하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헌원은 그 근심을 담아 백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나 이리 사랑스러운데 어찌할까. 치미는 음심이나 욕심으로 백아를 괴롭히지 않게 인내하는 것만으로도 헌원은 벅찼다. 그러니 이 정도는 용서하시기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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