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백아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침상에 누운 헌원은 손을 뻗어 금침을 당겼다. 맨살의 백아가 싸늘했는지 뒤척이며 헌원에게 안겼다. 헌원은 백아를 당겨 안고 춥지 않도록 금침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저는 오늘 밤이 길 것 같습니다, 백아.”
약간의 원망을 담아 작게 속삭이고 헌원은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이래야 억지로라도 잠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서운해도 나쁘지는 않다.
백아를 품에 안고 잠드는 밤도 몸을 섞는 것만큼이나 헌원에겐 소중하고 행복했다.
헌원이 세책방을 언급한 이후 며칠이 지나도 백아는 통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대문 앞까지 나와 기다리는 일은 곧잘 하기에 괜찮을까 싶어 권해 본 것이었는데 아직은 이른 듯했다.
“가시는가?”
“예,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야 무얼. 자네가 일을 미룰 사람도 아니고.”
다행히 한가한 기간이라 헌원은 제 할 일을 얼른 마치고 조금 이르게 퇴청했다. 헌원이 일하는 관청에서 승상 댁까지는 거리가 있는 편이라 헌원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 승상 댁은 도성 한가운데가 아닌 황궁 서쪽의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승상 댁이 세를 얻은 건 당금에 이르러서인지라 이미 번성할 대로 번성한 도성의 중앙에 마땅한 택지가 없었던 연유였다.
그 때문에 백아는 어렸을 적 호기롭게 담을 넘었다가 북산과 이어진 울창한 숲을 헤맨 적이 있었다. 도성을 감싼 숲이지만 워낙 울창한 탓에 간혹 범과 같은 들짐승이 출몰하곤 하는 위험한 숲이었다.
백아의 부재를 알아챈 헌원이 성난 낯으로 온 집 안을 뒤집었던 건 아직도 회자되는 일이었다.
워낙에 활달한 백아인지라 처음엔 백아의 실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평소처럼 집 안 어딘가 숨어 있을 거라며 느긋했던 유모는 백아가 담을 넘은 흔적을 발견하곤 사색이 되었다.
“도련님! 아기씨가!”
비명에 가까운 유모의 외침에 급히 달려온 헌원은 유모의 시선을 좇았다. 디딜 만한 크기의 돌이나 땔감이 담장 안쪽에 얼기설기 쌓여 있었다. 그 벽 위의 기왓장에는 바닥의 흙과 나무 부스러기가 얽힌 족적이 보였다. 헌원은 침중한 눈으로 담 너머의 울창한 숲을 바라보았다.
밤의 숲은 장정도 들어가기 꺼릴 정도로 무섭게 돌변하는 곳이라 어두워지기 전에 백아를 찾아내야 했다.
“해가 지기 전에 찾아내야 해요.”
헌원의 말에 뒤늦게 당도한 가솔들이 분주히 흩어졌다. 특히 헌원의 사정을 아는 가솔들은 발에 불이 나도록 숲을 헤매었다. 잘못하면 줄초상을 치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장 선두에서 백아를 찾아다녔던 이는 당연히 헌원이었다. 아직은 어릴 때라 보폭도 넓지 않았던 헌원이 어찌나 날래게 움직이던지 뒤따르던 가솔들은 헌원마저 잃어버리지 않으려 헌원의 뒤를 열심히 쫓아야 했다.
“백아!”
여럿이 숲을 뒤집고 다닌 덕인지, 다행히도 해가 지기 전에 백아를 찾을 수 있었다. 어두운 그늘 아래 유독 하얗게 빛나는 작은 얼굴을 헌원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된 백아는 어지간히 헤매었는지 온통 흙투성이였다. 나무가 우거져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던 백아는 헌원을 마주하자 세상 서럽게 울었더랬다.
“백아, 괜찮습니까?”
“허, 헌원……. 나는 그저, 그저 계곡에 가려고…….”
“예, 백아. 무사하시니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헌원이 여기 있으니 안심하세요.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아픈 곳은요?”
헌원 또한 백아를 품에 안고 나서야 반나절의 가슴 졸임을 다스릴 수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채를 하고 이리저리 생채기가 난 백아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백아를 달래는 말은 헌원 자신을 다스리는 말이기도 했다. 헌원은 저도 손을 떨면서도 백아를 달래고 또 달래었다.
그 모습이 제법 의젓해 보였으나 백아를 데리고 돌아와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을 때 드러난 헌원의 꽃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헌원은 옷시중을 들다 놀라는 어멈을 단속했다. 백아가 불안해할까 염려한 탓이었다.
이후로 단이를 데려와 몸종을 딸렸다. 그러나 백아는 이미 된통 데여 헌원 없이는 담장 밖을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승상 댁 안은 매우 넓어 백아가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큰 무리는 없었다. 앞으로 승상가의 안주인이 될 백아는 승상 댁 안이면 어디든 드나들 수 있었다.
호북 지방의 양식으로 지은 승상 댁의 가옥은 사합원 중앙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정원이 일곱 개가 있어 백아가 집 안에서만 놀아도 쉬이 질리지 않았다.
백아는 특히 서원 누님의 정원을 좋아했는데, 호방한 성격의 서원 누님이 정원의 초목을 정리하고 투호와 과녁을 가져다 두었던 때문이었다. 진원과 내기라도 하면 그날은 노을이 질 때까지 시합을 하기도 했다.
늦는 백아를 헌원이 찾으러 가면 백아는 종종 미인고에 길게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긴 의자의 명칭과 꽤 어울려 헌원은 그 앞에 서서 한참이나 잠든 백아를 감상하곤 했다.
백아를 데려올 때 둘을 위해 따로 지은 별채 또한 백아의 놀이터였다. 완공된 지는 꽤 오래였으나 비어 있어 숨바꼭질을 하기에 매우 좋았다. 이 승상이 정 부인을 위해 조성한 온실 화원도 백아에겐 훌륭한 놀이터였다.
가끔 백아는 방범을 위해 키우는 견공들을 보러 가기도 했다. 백아에겐 꽤 먼 동쪽 사육장에서 키우는 견공들은 제법 사나움에도 음인인 백아에게만은 온순했다. 백아는 그중 덩치가 작거나 어린 새끼의 목줄을 잡고 북쪽의 사냥터를 산책했다. 담장 안의 작은 사냥터엔 작은 동물들만 풀어놓아 위험하진 않았다.
산책을 하다 보면 동물을 발견한 견공이 뛰쳐나가 잡은 토끼나 새 따위가 식사거리가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백아는 잡은 동물을 거리낌 없이 들고 사냥터 근처에 있는 수련장으로 와 헌원의 무예 수련을 감상했다.
백아가 처음 동물을 잡아 왔을 때, 수련을 하던 헌원은 희미한 혈향에 고개를 돌렸다가 한 손에 피 칠갑을 한 백아를 보고 기겁을 했었다. 이제는 단이가 수습하므로 그때처럼 심장이 내려앉는 일은 없었다.
거기에 계절마다 악공을 불러 연주를 하기도 하고 기예단이나 무희를 불러 재주와 춤사위를 보기도 하였다. 올해엔 백아의 성년 때에만 불렀는데, 매년 비슷한 공연을 본 백아가 지루해하여 횟수를 줄인 탓이었다.
하여 백아는 승상 댁 안에서 무료하지 않게 지냈다. 정 심심할 때에는 담장 안에서 가솔들이나 헌원의 아우 진원을 골리며 곧잘 놀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한동안 홀로 외출을 꺼렸던 헌원도 금세 그늘이 가신 백아의 낯에 오래지 않아 안심할 수 있었다.
헌원이 침소에 들어서자 서책을 읽던 백아가 고개를 들었다.
“헌원?”
아침에 단이에게 언질을 준 터라 백아는 장포까지 갖춘 외출용 차림이었다. 서탁 앞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백아의 앞으로 글씨가 큼직큼직한 서책이 보였다.
헌원은 읽어 주었던 이야기 중 백아가 유달리 좋아하는 것들을 틈틈이 필사하여 건네주었다. 저 없는 사이 그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헌원에게 뿌듯함을 안겨 주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아니, 단이가 호들갑을 떨어 조금 전에야 앉았어요.”
평소의 이동은 마차나 가마를 이용했으나 오늘은 준비해 두라 이르지 않았다. 양민들도 드나드는 세책방은 좁은 골목에 있었다. 그 앞에 귀한 가마가 서면 이목이 집중될 게 뻔했다.
헌원이 몸져누웠을 때 장안이 발칵 뒤집혔던 터라 나이깨나 먹은 이들은 헌원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하나 구경거리를 보는 시선은 달갑지 않다. 헌원 자신은 둘째 치고 백아를 그리 보는 시선은 견디기 어려웠다. 책을 빌리기 위해 계속 들락일 곳이니 걸어 움직여 시선을 끌지 않는 게 나았다.
탈것을 찾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백아는 헌원이 손을 내밀자 냉큼 옆에 와서 섰다. 조심스레 손가락을 얽은 헌원은 백아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전 내내 서두른 탓에 해가 아직 중천이었다. 대로까지 걸어서 가도 시간은 넉넉했다.
“우리 어디 가나요, 헌원?”
“좋은 곳에 갑니다.”
“무도회?”
백아의 질문에 헌원이 걸음을 멈추었다. 대번에 무도회를 묻는 것을 보니 기대가 컸던 모양이었다.
“……태자비 간택은 아직입니다. 왕부 쪽에 소식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간택을 진행한다고 해도 이 나라의 풍습이 아니라 무도회가 열릴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기대하는 이를 실망하게 하긴 싫어 말을 돌렸다.
백아는 간택과 무도회가 무슨 상관이 있나 의아해하다가 무도회가 왕자님의 정인을 찾으려 열었던 것이란 걸 기억해 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 전하보단 왕부 쪽이 좋겠어요.”
“왕자님이라서요?”
척하면 알아듣는 헌원에게 만족해 백아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뒤에서 따라오던 단이가 작게 웃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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