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헌원, 나 가지고 싶은 게 생겼어요.”
“예까지 마중 나오신 연유가 그것입니까?”
저 아닌 목적이 서운할 법도 하건만 헌원은 백아의 걸음이 마냥 달가웠다. 백아는 웬만한 물건은 다 가지고 있었다. 드물게 없는 것은 말만 하면 단이가 제 재량으로든 정 부인께 청하든 하여 구해 올 테지만 백아는 그 물건을 꼭 헌원에게 받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저 말을 하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무리 값진 물건이라도 기꺼이 구해 드려야 할 터다.
헌원은 백아의 말을 놓칠세라 무릎을 굽혔다. 눈높이를 맞춘 헌원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귀한 걸음 하셨으니 응당 들어 드려야지요. 말씀하세요. 무얼 원하십니까?”
“유리 신. 나도 유리 신을 신어 보고 싶어요.”
백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헌원은 난감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헌원은 백아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대령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백아가 이번에 원하는 유리 신은 드물게 헌원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정인께서는 제게서 도망이라도 하려 하십니까?
연인 사이에 신을 선물한다는 것은 자신을 떠나라는 의미다. 그 신을 신고 갈 수 있는 곳까지 멀리 달아나라고. 물론 백아가 그것을 알고, 그 의미로 청하는 건 아닐 터였다.
“응? 헌워언.”
대답이 없는 헌원을 백아가 자못 애교스러운 말투로 불렀다. 무엇을 조를 때에나 나오는 말투였다. 기대만이 가득한 천진한 백아의 낯에 헌원은 내려앉았던 마음을 추슬렀다.
반짝이는 눈빛을 한 백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부탁의 원인을 고심하던 헌원은 가까스로 침소에 있을 이야기책을 떠올렸다. 유리 신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고 나서야 헌원은 제 걱정이 기우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더해 그 이야기는, 귀한 아가씨가 구박을 받다 유리 신을 신고 무도회에 가 평생을 함께할 귀한 신분의 정인을 만나는 이야기였다. 유리 신을 선물한 이는 귀한 아가씨를 돕는 조력자일 뿐이었다. 이후로는 언급조차 없는, 혼례식에 초대를 받았는지도 불분명할 정도의 조연. 헌원은 다시 답답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무도회라도.”
“맞아요, 헌원. 나는 유리 신을 신고 무도회에 가고 싶어요.”
헌원이 제 마음을 찰떡같이 헤아려 주니 백아는 신난 표정이었다. 그에 비해 애써 표정을 가다듬는 헌원은 매우 착잡해졌다.
아이고,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그대가 없어 제가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요.
백아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이라 속으로만 자문자답하며 헌원은 슬쩍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전에, 문제가 있습니다, 백아.”
헌원의 말에 백아가 의아한 낯을 했다. 유리 신을 사 주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백아는 낯선 표정을 한 헌원을 보았다. 영 본 적 없는 표정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백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눈이 마주치자 헌원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헌원이 이 백아가 갖고 싶은 것을 사 주기가 싫은가.
헌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백아가 볼을 부풀리려던 찰나 헌원이 백아의 볼을 꾹 눌러 바람을 뺐다. 어푸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백아를 보며 헌원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백아는 양친 모두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구박하는 계모도 없고 허드렛일 시키는 누이들도 없습니다. 제 누이들도 모두 성혼을 하였는데요. 하면 혹여, 어머님께서 백아를 구박하시는가요?”
생각지도 못한 헌원의 말에 백아는 눈이 동그래져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친어머니보다 더 살뜰하게 백아를 챙기는 정 부인이다. 귀한 아들을 살린 생명의 은인이니 그 지극정성을 더 말할 수 있으랴.
백아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하여도 정 부인이 온갖 정성으로 저를 돌보는 것은 알았다. 고뿔에 걸려 열이 나는 백아의 몸을 포근히 감싸 안고 뜬눈으로 밤새 도닥이며 어이할꼬를 읊조리던 정 부인의 목소리가 백아의 기억에 선명했다. 백아의 고뿔이 옮아도 네가 나았으니 되었다 하시는 분이었다.
백아는 정 부인보다 제 친어머니인 한 부인을 더 어려워했다. 헌원의 각인으로 일찍이 친부모와 떨어진 데다 서로 예의를 차린 탓에 기껏해야 일 년에 두어 번 남짓 뵙는 정도였으니 백아는 친부모와 살갑지 못했다.
한 부인은 한 부인대로 어리고 늦된 백아가 승상 댁에 폐가 될까 늘 노심초사였다. 해서 백아와 마주할 땐 늘 엄한 태도를 고수하니 백아가 잘못을 저질러도 늘 끌어안고 다독이는 정 부인보다 친어머니를 어려워하게 된 건 당연지사였다.
백아의 놀란 눈을 보며 헌원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산신이 나타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머님이나 제가 좋은 곳에 백아를 두고 갈 리 없으니까요.”
헌원의 말이 맞았다. 가족들이 모두 무도회에 가 버리고 혼자 남겨진 귀한 아가씨를 불쌍히 여겨 산신이 나타났었다. 하지만 헌원은 좋은 곳은 꼭 백아와 함께 갔다. 함께 갈 수 없으면 별채에 좋은 곳을 만들어 주었다. 나무 위의 집이 그러했고 연못이 그러했다.
백아를 불쌍하게 여길 이는 없다. 백아는 유리 신을 받을 이유가 없다. 백아는 유리 신 따위 필요 없다.
까짓 유리 신, 없어도 나는 무도회에 갈 수 있다. 헌원이 나를 두고 홀로 무도회에 갈 리 없지.
제 생각이 제법 이치에 맞아 백아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백아는 믿는 구석이 있지 않은가.
당연한 일이다. 어머니는 몰라도 헌원은 백아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어디든 데려다줄 거다. 그리고 유리 신이 없어도 헌원은 백아를 찾아낼 거다. 그러니 유리 신이 없어도 염려 없이 무도회에 갈 수 있다.
백아는 무도회란 저 멀리 서역에서나 열리는 연회라 갈 일이 요원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헌원이 저를 무도회에 데려다줄 거라 확신했다. 백아의 마음은 이미 무도회에서 노닐고 있었다.
헌원은 기분이 좋아진 백아를 보며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불안을 전부 내려놓지는 못하여 백아가 다른 질문을 하기 전에 주의를 돌렸다.
“그나저나, 오늘 밤엔 무얼 할까요?”
“그야 당연히 책을…….”
호기롭게 대답하던 백아가 뒷말을 흐렸다. 오늘 헌원은 빈손이었다. 읽을 것이 있어 다른 책을 빌려 오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읽어야 할 분량을 미리 읽어 버렸으니 오늘은 헌원과 할 것이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요?”
백아가 금세 눈망울에 처량함을 달았다. 그 모습이 어여뻐 골릴까 했던 헌원은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읽을 것이 없다고 할 일이 없다 생각하는 건 백아만의 이야기였다. 헌원은 백아와 함께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장안 대로에 꽉 채울 수 있을 만큼 늘어놓을 수 있었다. 특히 밤에는, 백아와 함께 쌓을 만리장성이 구만리가 아니던가.
“예습은 수학의 근본입니다. 백아는 그를 훌륭히 해낸 데다 영민함으로 단번에 이해까지 하셨으니 잘못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도리어 잘한 것이니 상을 드려야지요. 좋은 것을 할까요?”
좋은 것이란 헌원의 말에 백아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의미도 모르는 채 행동만을 배워 버린 제 정인이 천진난만하게 밝히는 것을 보자 헌원의 시커먼 양심이 쿡쿡 찔렸다.
헌원은 애써 자신을 변명했다. 헌원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같은 침소를 썼던 터라 백아가 성년을 치르고 나서도 새삼 색스러운 분위기를 잡기가 매우 껄끄러웠더랬다.
늘 식사를 함께 했고 함께 욕조에 들었다. 서로 알몸을 보이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고 한자리에 눕는 것이 당연했다.
심지어 여름이 되면 백아는 무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어깨에 얹어 놓은 것과 진배없는 윗옷을 훌렁훌렁 벗어 다리속곳만 걸친 반라의 몸으로 헌원의 품을 찾곤 했다. 백아는 날이 아무리 더워도 헌원의 체온 없이는 잠자리에 들려 하지 않았다.
잠결에 품으로 파고드는 백아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의 헌원은 그렇게 많은 밤을 지새웠었다.
보드라운 살갗이 스칠 때마다 불끈 치솟는 혈기를 참아 내느라 스스로 쥐어뜯었던 허벅지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옷을 갈아입는 헌원을 본 백아는 울혈이 가득한 헌원의 다리를 보고 자지러지며 울었다. 이후로 헌원은 백아를 끌어안고 그저 인내만을 해야 했다.
백아가 성년을 치르고 나서도 몇 달이나 참아 내었다. 백아의 개화가 늦은 이유도 있었으나 그보다도 백아가 ‘감사 인사’를 하듯 먼저 다가와 기꺼이 어울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헌원은 결국 제 귓가를 간지럽히는 백아의 숨결을 이기지 못했다.
살갗을 맞대고 자리에 누운 초봄, 헌원은 유일하게 걸친 다리속곳마저 벗겨 내고 백아의 양물에 손을 댔다. 생경한 감각에 두려워하며 울먹이는 백아를 좋은 것을 한 것이라며 달랬다. 백아는 조곤조곤 달래는 헌원을, 헌원이라는 이유로 눈물이 아롱진 얼굴을 하고 받아들였다. 그것이 헌원이 기억하는 백아와의 첫 밤이었다.
그리고 그 ‘좋은 것’은 점차 수위를 더하여 이제 헌원과 백아는 거리낌 없이 살을 섞고 있었지만, 백아는 그저 그것이 ‘좋은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파렴치한이라 욕을 하여도 기꺼이 그 오명을 뒤집어쓸 헌원이었지만 그나마 하나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헌원은 제 양심을 끝까지 내다 버리지는 않았다. 몸을 섞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헌원은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것처럼 색사를 조르는 백아를 구슬렸다.
“‘좋은 것’은 좋은 날에만 해야 합니다, 백아.”
“왜요?”
헌원의 대답에서 거절을 읽은 백아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헌원은 울상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백아의 눈빛에 질 뻔한 자신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이유를 들었다.
“싫은 날이나, 슬픈 날. 힘든 날에 하면 그것은 더는 ‘좋은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싫은 것, 슬픈 것, 힘든 것이 될 겁니다. 금일은 특별한 일이 없는 평범한 날이니 오늘 하는 건 ‘평범한 것’이 되겠지요. 좋은 날에 해야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백아가 ‘좋은 것’을 늘 좋아하길 바랍니다, 백아.”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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