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사정을 알 법했다.
글 읽기를 죽어라 싫어하던 백아에게 책을 읽히려던 시도가 여러 번 실패하고, 책이라면 학을 떼는 백아를 위해 헌원이 택한 방법은 잠자리에서 이야기책을 하나씩 읽어 주는 것이었다.
헌원이 주로 읽는 서책들은 첫 장부터 한자가 가득하여 백아는 겉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질색한 표정을 했다. 내용을 읽기는커녕 겉장만 보아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백아는 헌원의 부름에도 싫은 기색을 하였다.
고심하던 헌원에게 실마리를 준 이는 열 살 된 자녀가 있는 유 관원이었다. 유 관원은 큰아이가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며 아직 한창 신혼이나 다름없는 헌원에게 새끼 자랑을 늘어놓았다. 유 관원은 살림이 넉넉지 않아 원하는 책을 모두 구해다 줄 수 없어 빌려다 주는 것만이 아쉽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헌원은 그에게 세책방의 이야기를 들은 답례로 이제는 외워 버려 다시 볼 일이 없는 낡은 서책들을 필사하여 가져다주었다. 헌원의 해석이 빼곡한 서책들은 유 관원의 큰아이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뛸 듯이 기뻐하는 유 관원을 뒤로하고 헌원은 그길로 저자의 세책방으로 향했다. 헌원은 고심 끝에 알록달록한 그림으로 겉면이 채워진 이야기책을 빌려 왔다. 내용물도 글자보다는 그림이 많은, 헌원이 보기에 서책이라 하기엔 조금 모자라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건 뭐예요? 헌원?”
헌원이 들고 온 물건에 관심을 보이던 백아는 서책인 걸 알자마자 내팽개쳤다. 헌원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백아의 주의를 돌리려 애썼다. 헌원의 노력에도 백아는 딴청을 피웠다.
“보기도 싫으십니까?”
“으응.”
헌원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지 대답은 바로 들렸다. 싫은 기색이 역력함에도 대답은 단호하지 않았다. 헌원의 노력을 가상히 여겼음이라. 헌원에게 등을 보일지언정 마음은 돌리지 않으니 미워할 수 없는 정인이셨다. 헌원은 백아의 뒷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백아의 모든 행동이 헌원에겐 사랑스럽기만 했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헌원의 뇌리에 어릴 적의 모습이 스쳤다. 헌원은 들고 있던 책을 펴 소리 내어 읽어 내렸다. 헌원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백아가 움찔거렸다.
서책에 지금처럼 학을 떼기 전 백아는 헌원의 서재에 곧잘 같이 있곤 했다. 문자를 배우기 전이라 글을 읽지 못하는 백아가 무료할까 염려한 헌원이 서책을 부러 소리 내어 읽으면 백아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귀를 기울였다.
헌원은 백아의 관심이 온통 제 목소리에 향한 그 순간이 즐거워 구애하는 앵무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백아는 헌원의 낭독을 들으며 스르르 잠들었다. 어느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백아는 교의 등받이에 턱을 괴고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헌원은 백아가 편히 잠들도록 긴 교의를 마련하여 방석에 두툼하게 깃털을 깔았다. 그때에 마련한 안락한 교의는 최근엔 앉는 이가 없어 서재 한편으로 밀어 두었다.
“옛날 옛적에, 어느 한 도읍에…….”
백아가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가뜩이나 쉬운 글에 흥미로운 이야기라 백아의 몸은 어느새 반쯤 헌원을 향해 있었다. 헌원은 보지 못한 양 계속해서 그림책을 읽어 내렸다.
“보자…… 백아가 이 그림을 보면 좋을 텐데요. 토끼가 아주 귀엽습니다, 백아.”
헌원은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편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설명했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운 백아는 어느새 헌원의 바로 옆까지 다가와 그림을 곁눈질했다.
“같이 보시겠습니까? 혼자 보기엔 무료합니다, 백아.”
“그…… 래도 돼요?”
“물론입니다.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헌원이 거듭 청하며 한 팔을 벌리자 백아는 냉큼 헌원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헌원의 품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은 백아는 책장을 쥔 헌원의 손에 제 손가락을 문질렀다. 헌원을 재촉하는 손짓이었다. 헌원은 사랑스러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 백아가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후로 헌원은 요령을 터득했다. 저자나 가까운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인 양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백아는 어느새 헌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백아를 이끌어 제 품에 앉힌 채 이야기책을 읽으면 백아는 광대 패를 보는 것처럼 열중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하품을 하면서도 계속 읽으려 했다.
졸린 기색에 백아를 재우려던 헌원은 백아의 고집에 번번이 백기를 들었다. 그럴 때엔 목소리를 낮추는 방법을 썼다. 밤이 깊었다는 이유로 목소리를 낮춘 채 읽다 보면 졸음을 이기지 못한 백아는 어느샌가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잠든 백아를 침상에 뉘이고 백아를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하는 게 근래 헌원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헌원의 즐거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책을 읽다 잠든 날이면 백아는 지난밤 잠이 든 탓에 듣지 못한 부분을 채근하며 등청 준비를 하는 헌원을 졸졸 따라다녔다. 헌원은 저를 따라다니는 백아의 시선을 즐겼다. 채근하는 모습도 어여뻤다.
한참 뜸을 들인 헌원은 못 이긴 척하며 부러 백아가 기억하는 부분을 읽어 주었다. 그러면 백아는 잔뜩 집중해 듣다가 아는 부분이라며 핀잔을 주었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헌원은 모르는 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했다.
그것이 잦아져 늦어 버린 헌원이 급히 등청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단이를 불러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셨던 모양이었다. 지레 겁을 먹은 단이가 백아를 이리 단속한 것을 보면 말이다.
“……단이가 헌원은 바쁘니 채근하지 말라잖아.”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백아의 귓속말에 헌원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다잡았다.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헌원은 마지막 읽어 주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던가 고민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야기했던 내용이 가물가물한 것에 대해 헌원을 탓하지는 말자. 헌원은 칠 세 이전에 다 뗀 이야기들을 백아를 위해 다시 읽어 주던 것이었으니까.
고민이 길어지자 토라지려는 기미를 보이는 백아를 다시금 품에 안고 헌원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아아, 기억이 났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가 백아를 닮아 백설이라는 본래 이름을 버려 두고 백아는, 백아는 하며 읽어 준 왕녀의 이야기였다. 한창 계모의 공격을 받을 때에 잠들었으니 궁금해할 만도 했다. 헌원은 빙그레 웃으며 백아의 귀에 남은 이야기를 속삭여 주었다.
“……그리하여 백아는 왕자님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이 말을 뱉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로 말이다.
“참, 헌원!”
백아의 기분도 풀어 주었으니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백아가 헌원을 불렀다.
귀로 직접 파고드는 제법 큰 목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지만 헌원은 내색하지 않았다. 내색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백아가 헌원의 고개를 돌려 ‘깊은 입맞춤’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시도만 했다.
“백……? 흡!”
전에 없던 대담한 행동임에도 헌원은 이 좋은 기회를 받아먹지 못했다. 내심 놀란 나머지 입을 굳게 닫아 버린 탓이었다. 해서 헌원의 입 속을 파고들려던 백아의 혀는 그저 헌원의 입술만을 훑고 떨어졌다.
그런데도 백아는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아직 ‘깊은 입맞춤’의 정의를 모르는 헌원의 정인은 입술을 맞댄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백아는 놀라 굳은 헌원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세상을 녹일 듯 사르르 웃었다.
“감사의 인사는 깊은 입맞춤으로 달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헌원은 백아의 그 미소를 보고 어린 날의 각인을 다시 되새긴다. 눈앞의 미소를 가진 이를 보고 어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
헌원은 자신의 각인이 일렀던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누구라도 백아의 미소를 보았다면 백아에게 각인했을 것이다. 누군가 헌원보다 먼저 백아에게 각인해 데려갔다면 헌원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리라. 그는 변명과도 닮아 있었으나 헌원은 자각하지 못했다.
백아가 헌원의 입가에 번진 타액을 길고 고운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백아가 입술을 훔칠 때 묻어난 것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정인은 다정하고 농밀한 접촉에 스스럼이 없었다.
섬세한 살갗을 간질이는 손길에 조금 정신이 든 헌원은 직전의 입맞춤이 아쉬워졌다. 천금과도 바꾸지 않을 기회건만 이렇게 흘려보내다니. 이렇게 아둔한 이가 있나.
아쉬운 눈으로 백아를 보던 헌원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눈앞에 있어도 그리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깊은 입맞춤은.”
헌원은 지척에 마주한 해사한 미소를 망설임 없이 삼켜 버렸다. 가늘게 접혔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다시 초승달처럼 휘며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스르르 감겼다. 가지런한 긴 속눈썹 사이로 사라진 눈동자가 아쉬웠다. 대신 마주한 입술이 작게 벌어져 헌원은 그 틈새로 백아를 갈구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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