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원고담-3화 (3/66)

3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낯의 백아는 헌원의 무릎 위에서 헌원의 몸을 장난감인 양 가지고 놀았다. 백아는 갈무리하지 못해 양인의 향이 나는 헌원의 손을 잡고 입으로 덥석 가져갔다.

“어허, 이 녀석.”

고개를 가로젓는 주 자사의 제지에 행동을 멈춘 백아는 헌원의 손을 꼭 쥔 채로 다른 한 팔을 헌원에게로 내밀었다.

안아 달라는 투정에 헌원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백아를 안자 백아는 당연한 듯 헌원에게 안겨 그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그 앙증맞은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비비대는 터라 되레 헌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안아 주시게. 자네 품이 마음에 든 듯하니.”

주 자사의 허락 아닌 허락에 헌원은 볼을 마주 비비며 백아를 고쳐 안았다.

같은 남아인데 어쩜 이리 보드라울까? 아이라곤 뼈대가 굵고 단단한 진원만 안아 보았던 헌원은 마냥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백아가 그 작은 손을 들어 헌원의 뺨을 턱턱 짚어 가며 저 좋을 대로 놀았다. 작고 여린 몸이 바스러지기라도 할까 손끝에만 힘을 주어 받쳐 든 헌원은 내내 애틋한 눈길로 백아를 바라보았다.

이내 놀다 지친 백아는 헌원의 손을 꼭 쥔 채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헌원은 포근한 향이 나는 백아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백아처럼 해사한 얼굴을 했다.

뒤늦게 정 부인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내내 헌원을 간호하다 기절하듯 잠이 든 정 부인은 흐트러진 머리채나 옷매무새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기뻐하며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난 헌원을 부여잡았다.

“어디 보자, 내 새끼.”

목이 쉰 헌원을 대신하여 부군인 이 승상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정 부인은 헌원을 붙잡고 울다 웃다 하였다.

“미련하게 그저 참기만 했다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니, 아니다. 어린것이 각인을 알기나 했을까. 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헌원이 약그릇을 내려놓자 정 부인은 헌원을 이리저리 매만지고 다독이며 새끼 살아난 것을 마음껏 기뻐했다. 자리에 있던 이들이 정 부인의 그런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 됐거나 헌원이 죽을 고비를 넘겼기에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주 자사는 평인 부모 아래 향인이, 그것도 사내 음인이 났다는 것에 떨떠름해했으나 친우와 사돈을 맺는 것은 기꺼워했다.

아직 어린 백아를 모친에게서 떼어 놓는 것이 한 가지 걱정이었으나 백아가 워낙 순하여 낯선 손을 타도 방싯방싯 웃는 터라 그 걱정은 꺼내 놓지도 못하였다.

주 자사가 걱정을 던 것은 사위 될 헌원이 백아를 보는 눈빛이 벌써 정인을 보는 눈빛이라 내심 안심했던 이유도 있다. 제 목숨 걸린 이인데 어지간히 아끼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이 승상은 친우를 볼 낯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사죄를 청하였다. 갓 말문이 트인 친우의 아이에게 혼담을 꺼내 놓자니 어지간히 민망했던 탓이었다.

“여덟짜리도 어리기는 매한가지일세.”

주 자사의 말에 이 승상은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어른들이 저들의 혼사 논의에 골치를 썩이거나 말거나, 헌원은 그저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하였다.

볼 수 없어 앓아눕기까지 했던 꿈에 그리던 얼굴이 눈앞에서 저를 보며 방글방글 웃고 있는데 행복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렷다. 헌원은 품에 안은 정인과 마음껏 시간을 보냈다.

손가락을 들이밀면 살짝 난 이로 앙앙 물어 대는 게 귀여웠고 팔을 벌리면 뒤뚱뒤뚱 걸어와 폭 안기는 게 사랑스러웠다. 호기심 어린 낯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눈이 뿌듯했고 일어설라치면 잡아 오는 손이 벅찼다.

백 가지의 약초를 달여 만든 보약보다 백아와의 시간이 헌원에게 특출한 약효를 보였다. 지근거리에 있는 정인의 힘으로 헌원은 사흘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헌원의 가슴팍에서 죽은 빛을 띠었던 각인의 흔적은 백아를 만나고 사흘 만에 생기를 머금은 색으로 돌아왔다. 처음 생겼던 때처럼 바알간 도홧빛을 한 각인의 흔적은 헌원의 가슴 한쪽에서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예비 신랑 헌원은 백아와 단둘이 남게 되면 은밀히 제 앞섶을 열어 각인의 주인에게 그 흔적을 보여 주며 수줍게 웃었다.

백아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행복에 차 웃는 눈앞의 사람을 따라 방싯방싯 웃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백아가 성년식을 치렀을 즈음, 헌원의 마음고생이 시작된다.

1

시작은 그러했다.

아직은 말단 관원이었던 헌원이 연이어 귀가가 늦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통 이야기책을 읽어 주지 못하여 신경이 쓰이던 차였는데 그날따라 헌원을 배웅하는 백아의 모습이 유독 풀이 죽어 있었다. 헌원은 허리를 숙여 백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저.”

“백아가 제게 숨기는 것이 있다면 이 헌원 너무나 슬플 것 같습니다.”

“숨기는 것은…… 음…….”

순진한 정인은 늘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선뜻 풀어 놓지 못한 채로 옷자락만 잡고 우물쭈물하는 양이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백이면 백, 몸종인 단이에게 아쉬움을 꺼내 놓았다 핀잔을 들은 모양새였다.

대략 상황을 파악한 헌원은 빙긋이 웃으며 백아를 품으로 이끌었다. 백아는 기다린 것처럼 헌원의 품에 폭 안겼다.

헌원은 등청도 제쳐 둔 채 백아가 입을 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감싸 안은 등을 어루만지는 느릿한 손짓에 백아가 숨을 고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헌원의 다독임에도 백아는 통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헌원은 재촉하지 않고 백아를 단단히 감싸 안기만 했다. 마음 약한 정인은 미안함에 입을 여실 것이었다.

“흠, 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깥에서 단이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늘 이르게 나서는 터라 늦은 적은 없지만 평소 나서던 시간을 넘기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헌원은 부산스러워지는 바깥의 소리를 무시했다.

헌원이 집을 나설 시간인데도 저를 안고만 있자 백아가 오히려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아니 가셔도 됩니까?”

“하루쯤 늦는다고 경을 치진 않겠지요. 지금 제겐 백아의 서운함을 달래는 일이 우선입니다.”

그제야 헌원의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헌원은 백아의 어깨에 턱을 괸 채로 남몰래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각오가 서지 않은 듯 백아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고개를 저으며 품에 파고들기를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연이어 입을 도로 다물자 헌원은 백아를 고쳐 안았다. 품으로 깊이 끌어들이는 손짓에 백아는 스스럼없이 깊이 안겨 헌원을 마주 안았다.

“무슨 고민이 이리 깊으실까요? 걱정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백아.”

“……고민은 아닌데요, 헌원.”

단이가 어지간히도 단단히 주의를 시킨 모양이었다. 질겁한 표정으로 으름장 놓는 양이 눈앞에서 본 듯 훤했다. 큰일 하시는 바깥주인께 안사람 된 도리로 폐가 되면 아니 된다고 몇 번을 거듭하여 당부했으리라. 백아는 그 큰 눈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고개를 주억거렸을 테지. 둘의 모습이 목격한 것처럼 눈에 선했다.

백아가 언제까지고 입을 열지 않을 양이라 헌원은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웃음기를 거둔 헌원은 백아의 귓전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리 말씀하시면 단이가 듣지 못할 터이니 제게만 살짝 말씀해 주세요.”

헌원의 속삭임에 백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백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헌원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단이가 들을세라 조심스럽게 내쉬는 백아의 숨이 헌원의 귓가를 간질였다. 목소리만 낮추어도 밖에는 들리지 않으련만 손까지 들어 입가를 가린 백아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헌원에게 속삭였다.

“그날 깜빡 잠이 들어 뒷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예상하지 못한 백아의 속삭임에 헌원은 잠시 아연해했다. 그러나 내려다본 백아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밤에는 헌원이 귀가가 늦어 볼 수 없었잖아요. 아침에 물어보려 했더니 단이가…….”

[다음 편에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