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장안에 소식이 자자해 발걸음을 서둘렀네. 괜찮은가, 자네?”
황명을 받아 지방 감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주 자사는 이 승상에게 안부를 전했다.
“무어, 그렇지. 자네는 신수가 훤해졌구먼.”
속내를 내비치지 않으려는 이 승상이 애써 답했다. 하나 주 자사가 시커멓게 탄 그 속을 어찌 모르랴.
“그래, 헌원은 어떠한가? 자네 집 우환에 아니 와 볼 수 있어야지.”
어깨를 두드리는 주 자사가 이 승상은 못내 고마워 그 손을 꼭 맞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우와 술 한잔 아니 할 수 없어 조촐한 술상을 두고 마주하여 앉았으나 이 승상의 속에서 뱉어진 것은 깊어진 우환을 대변하는 긴 한숨뿐이었다.
“차도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는 이 승상의 안색도 병색이라 할 만큼 눈 밑이 시커멓게 그늘이 졌다.
조심스레 이 승상의 안색을 살핀 주 자사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술병을 들어 빠르게 비워지는 친우의 술잔에 부지런히 술을 채울 뿐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어디 헌원이 그냥 장손이던가. 그 나이부터 문무 양면에 자질이 뛰어나 일찍부터 황제께서 눈여겨보고 있던 재목이 아니던가.
주 자사는 술잔을 채우는 내내 말이 없었다. 술잔이 차오르는 양을 멀거니 보기만 하는 이 승상에게는 위로마저 독이 될까 농조차도 던질 수 없었음이라. 우환을 담은 술잔은 마셔도 마셔도 취기가 돌지 않았다. 이 승상과 주 자사는 술잔만 주거니 받거니 하며 회포 아닌 회포를 풀었다.
잔이 비고 병이 비어 가솔을 부르려던 차였다. 갑작스레 안채가 소란했다.
헌원의 일로 발걸음 소리도 조심하던 집 안에 분주한 소리가 날 일은 자명한지라, 빈 술잔을 물끄러미 보던 이 승상과 그를 대신하여 하인을 부르려던 주 자사 모두 행동을 멈추고 표정을 굳혔다.
“마님, 도련님께서…….”
급한 걸음으로 달려온 아랫것마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탓에 이 승상은 심란한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병세가 길었으니 염려가 먼저 든 것은 당연지사, 주 자사가 친우의 꺼멓게 탄 속을 어찌 모를까. 위로차 방문하였건만 아니길 바랐던 그날이 하필 오늘인가 하며 주 자사는 근심 어린 낯으로 친우를 살폈다.
침중한 표정의 이 승상은 술상에서 물러나 내키지 않는 걸음걸이로 안채로 향했다. 주 자사 역시 어두운 안색으로 친우를 묵묵히 뒤따랐다.
그러나 각오를 하고 헌원의 방 문을 연 두 사람의 눈에 보인 것은 제 손을 입에 넣고 깨물어 대는 주 자사의 넷째를 보는 해사한 헌원의 얼굴이었다.
어찌 된 연유인고 하니, 한창 모든 게 궁금할 나이라 세상 무서운 것 없이 포르르 다니던 백아가 헌원의 앞에서 폴싹 엎어진 것이 각인의 원인이었다.
시점은 수개월 전, 주 자사가 한동안 도성을 비운다며 인사차 들렀던 때, 어여쁜 짓이 한창인 백아를 한 팔에 끼고 승상 댁에 방문했던 주 자사는 이 승상과 담소를 나누며 백아를 잠시 몸종에게 맡겼더랬다.
백아는 낯선 곳에 겁을 먹기는커녕 호기심이 앞서 이 너른 집 안에 신기한 무엇이 있나 궁금해하며 동그란 눈을 반짝였다. 높은 지붕과 너른 마당 저편에서 손님맞이로 분주한 가솔들이 오가며 소란했다. 백아의 호기심이 중문 너머를 향했다.
호시탐탐 주변을 둘러보던 백아는 몸종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 품에서 벗어났다. 백아는 아래도 보지 않고 걷다 넘어지고 옆을 보다 기둥에 부딪쳐 가며 너른 승상 댁 탐험을 했다. 호기심은 많을지언정 성정이 순한 백아는 엎어져도 곧잘 일어나고 부딪힌 곳이 아파도 울지 않아 가솔들의 이목도 끌지 않았다.
그렇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낯선 안채를 제집 안마당인 양 돌아다니던 백아는 학관을 다녀오던 헌원과 마주하게 된다.
옷에는 흙먼지를 잔뜩 묻힌 채였으나 찡그린 기색도 없이 커다란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헌원을 보던 백아가 어찌나 어여뻤는지. 헌원은 제 앞에 나타난 어여쁜 아기씨에게 덜컥 각인을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 만났던 자리가 주 자사를 배웅했던 자리라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지방 발령을 받은 주 자사는 그날 이후 몇 달간이나 장안에 들를 일이 없었다. 일가가 몇 년씩 이동을 해야 하는 현감이나 현령 발령이 아닌 것이 그나마 헌원에겐 천운이라 해야 할 일이었다.
그날 이후 헌원은 내내 백아 생각만 했다.
이름도 모르는 정인을 보고 싶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그리워했다. 글을 읽거나 무예를 수련하다 잠시 쉬는 순간이 오면 열에 열은 눈앞에 백아의 미소 가득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헌원은 그렇게 날로 그리움만 쌓아 올렸다. 세상만사 근심이라곤 없던 헌원의 낯에 가끔 그리운 우수가 깃들었다.
어려서 미련한 헌원은 그리는 얼굴이 읽던 글 위로 떠오를 정도가 되어서야 여쭈어볼 생각을 했다. 아직은 헌원 또한 향인을 모를 때라 사내아이를 은애하는 자신이 낯설 따름이었다. 헌원은 실을 잣던 정 부인께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어머니, 저번에 주 대감께서 데려온 아이는…….”
흘리듯 낸 물음에 정 부인이 손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었다. 주 자사의 한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웃던 아이는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태가 났다. 주 자사의 삼남이었던가, 셋째라지만 장남이라 늘 의젓한 헌원이나 막내지만 제 형을 보고 배워 무뚝뚝한 진원과 달라 내내 눈을 떼지 못했었다.
방글방글 웃으며 폭 안기는 모양이 낯을 가리지도 않고 어지간히 애교가 많았다. 희원이 어렸을 적엔 제법 즐거웠는데 이젠 다 커서 징그럽기만 하고. 그러고 보니 피부가 상아색이 탁해 보일 만큼 희어 아이지만 그것만은 부러워했더랬다.
“주 자사 댁 넷째 말이더냐? 어여쁘다 말은 들었는데 사내아이가 어쩌면 그리…….”
“해사했습니다.”
이어지듯 나온 헌원의 대답에 헌원 자신도 놀란 낯을 했다. 정 부인은 제풀에 놀라 동그래진 눈을 한 헌원을 보며 웃었다. 어린 눈에도 어여뻐 보일 정도니 확실히 시선을 끄는 데가 있는 아이였다. 진원 아래 막내 삼고 싶을 정도로.
“그래, 해사…… 귀엽더구나. 크면 따르는 이가 꽤 많겠어.”
여자아이였다면 혼담을 넣어 봄직도 한데, 서원의 낭군으론 너무 어리고……. 헌원과도 조금 차이야 나지만 저들 좋다면 나쁘지 않고, 진원과는 적당하니 잘 어울릴 것도 같고. 백아를 헌원과 형제들에게 대어 보던 정 부인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유, 나도 참. 사내아이를 데리고 무슨 생각이람.
“주 자사께선 홀로 가셨지요? 그 아이는…….”
“외가인 북경에 가 있다는구나. 주 자사께서 부인과 아이들만 두긴 불안하다 하셨어. 한 부인도 낭군을 잘 만났지.”
그리운 그 아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백아의 근황을 물었던 헌원은 시무룩해졌다.
여덟의 아이에게 장안을 벗어난 다른 도성은 지나치게 먼 이야기였다. 주 자사의 자택은 반대편이긴 해도 장안에 있었다. 몰래 찾아가서라도 만나 보려 다짐까지 하였지만 북경은 불가능했다.
더해 황명을 받은 감찰은 우러를 이야기라 헌원은 말을 보탤 수 없었다. 헌원은 보고 싶은 마음을 그저 속으로 눌러 삼켜 버리고 말았다. 볼 수 없다는 걸 알아도 미소가 아른거렸지만 헌원에겐 참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그 나이의 아이라면 한번 생떼를 부려 볼 법도 하건만, 작은 어깨에 가문을 짊어져 나이에 비해 의젓했던 헌원은 그저 참고 또 참기만 하여 속탈이 난 것이었다.
헌원은 오래 앓은 후유증으로 상한 목을 하고 일련의 이야기를 더듬더듬 꺼내었다. 그러면서도 헌원의 시선은 그늘이 걷힌 이 승상의 낯이 아닌 정인의 무게가 실린 제 팔에 머물러 있었다.
목소리뿐 아니라 헌원의 모습도 눈에 띄게 수척했다. 낯을 가리지 않는 백아는 그런 헌원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 보던 날처럼 헌원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추며 방싯방싯 웃어 주었다.
“……옷의 품이 커지고 땀이 많이 나기는 하였는데 그저 날이 더워 그런 줄 알았습니다.”
헌원은 품 안의 정인을 꼭 잡은 채로 이야기를 이었다. 각인의 힘이 대단한 건지. 헌원은 자리를 막 털고 일어났음에도 생기가 돌았다. 눈에 띄게 밝아진 헌원의 안색을 보며 이 승상은 기쁨 반 허탈 반의 심정으로 허허로이 웃었다.
“불효자식이로고. 그래, 이제 살 만한 게냐?”
“송구합니다, 아버지.”
사죄를 청하면서도 헌원의 시선은 백아를 향했다. 탓인지, 덕인지 알 수 없으나 일단은 기뻐할 일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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