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헌원고담(獻元苦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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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장인이자 세도가인 이 승상 댁 장남 이헌원(李獻元)은 지학(志學:15세)을 갓 넘긴 나이에 일찍이 급제해 관직에 올라 가문의 위신을 드높이고 있었으나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연유는 더욱 세속적인 것이었으니, 이 전도유망한 도련님 여덟 되던 해에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한 살짜리 아이에게 각인하여 상사병으로 앓아누워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었다.
여덟짜리 아이가 사랑병을 앓으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단 말인가. 하여 이 승상 댁에서는 병이 꽤나 깊어질 때까지 헌원이 말라 가는 모습을 여상스럽게 여겼다. 헌원 자신은 연유를 모르니 그저 몸이 허해졌겠거니 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본인부터 그러하니 눈썰미 좋은 헌원의 모친 정 부인마저도 평소와 같이 넘길 따름이라.
“지난번보다 품이 낙낙하구나. 신장은 반 뼘이나 자랐는데…….”
“땀을 많이 흘려 그런가 봐요. 날이 더워요, 어머니.”
헌원에게 손수 지은 새 옷을 입혀 주던 정 부인이 아직 작은 어깨를 어루만졌다.
신장이 자라 그러한가, 남아라 그러한가. 아니면 양인이라 그러한가. 아직 보드라워야 할 여린 어깨가 벌써 단단하여 굵어지려는 태가 났다. 팔다리도 못 가눌 적이 엊그제인데 언제 이렇게 다 자랐누.
“수학이 고되니? 보약이라도 지어 주련?”
“아니에요, 어머니. 저보단 어머님께서 드세요. 여름이 다가오니 미리 몸을 보하세요.”
저보다 모친을 염려하는 헌원의 말에 정 부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이 장한 것을 누가 낳았을까.”
일찍이 무예에 재능을 드러내 황제께서도 눈여겨보고 있는 장남이었다. 심성이 바르고 강건하며 영특하기까지 하니 앞날이 탄탄대로일진대 효심마저 지극하니 그 누가 부러울까. 살아온 세월이 웃음살로 드러난 정 부인의 기품 있는 낯은 헌원으로 인한 것이었다.
만면을 화사하게 밝힌 정 부인은 의젓한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병은 날로 깊어져 사달이 났다.
학문에도 재미를 붙인 헌원이 학관에 출석부를 찍던 어느 날, 평소처럼 이르게 채비를 하고 나서던 헌원은 대문을 채 지나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놀란 가솔들이 급히 달려와 헌원을 침소로 옮기고 돌보았으나 헌원은 일어나지 못한 채 열만 펄펄 끓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변고에 급히 모셔 온 장안의 이름 높은 의원은 오랜 진맥에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혈이 막히고 기력이 쇠한 것은 분명하오나 진맥을 하여도 통 원인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원인이 불명이니 처방도 불가.
그저 몸을 보하고 원기를 돋우는 보약의 약전만이 의원에게서 얻을 수 있는 처방 전부였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를 달여 먹여도 쓰러진 헌원은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늘어만 가는 보약의 처방에도 체열은 펄펄 끓고 안색은 파리해질 뿐이라 가솔들의 낯빛도 날로 어두워졌다. 말이 씨가 될까 입단속을 하였으나 뒤의 일을 짐작함이라.
기대를 걸던 장손을 그리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절박해진 이 승상은 장안뿐 아니라 나라 안의 소문난 명의에게 죄 사람을 보냈다. 문책을 각오하고 파발까지 동원하였으니 그 다급함을 익히 알 수 있음이라.
자식을 염려하는 아비의 애끓는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난 이 승상의 간청문은 고집불통의 의원도 장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유명하다는 의원이란 의원은 모두 승상 댁 문턱을 밟았으며 이름도 생소한 갖은 영약 영초들이 헌원의 목울대를 넘었다.
개중에는 왕진만으로 장원 한 채를 요구하는 의원도 있었고 한 뿌리에 최상급의 벽옥 다섯 개의 값어치를 하는 약초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자식 살리는 일에 금전을 논하겠는가.
그러나 화타에 비견되어 모셔 온 안휘의 명의마저도 고개를 가로저었고 비싼 값을 치른 영약은 헌원의 몸의 열꽃 하나도 지워 내지 못했다.
각고의 노력에도 헌원의 병세는 차도가 없어 근심은 날로 깊어져만 가던 차에 이 승상 댁의 우환은 황제의 귀에 들 정도로 커져 있었다.
그에 처가의 우환을 걱정한 황제는 황명으로 이 승상 댁에 어의를 내리기에 이른다.
“황제의 수족인 파발을 사적으로 이용한 죄 크나, 사안을 고려해 죄를 묻지 않는다. 이가의 헌원은 강건해지는 것으로 황은에 보답하라.”
황은은 길상이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손수 헌원의 몸을 돌보던 헌원의 모친 정 부인은 헌원의 몸을 닦아 내다 흐드러지게 핀 열꽃 사이에서 각인의 흔적을 발견했다.
심장 근처에 세 개의 꽃잎 모양으로 자리한 각인의 흔적은 오랜 기간 각인한 정인을 보지 못해 시커멓게 죽은 빛이었다. 얼핏 보기엔 열꽃에 죽은 살갗으로 보여 정 부인마저도 어의에게 확인을 받은 다음에야 확신을 하였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각인이라니요.”
“병세가 이리 진행될 때까지 각인인 줄도 모르셨단 말입니까?”
“얘기만 듣던 것을 본 적이 있어야지요.”
아랫것들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양인과 음인을 보는 것도 흔치 않은 세상이었다. 그러니 그보다 더 드문 각인의 흔적을 알아보는 이가 오히려 드물었으니 알아보지 못한 것도 당연지사라 할 만했다.
내밀한 위치에 자리하는 흔적의 특징 탓에 정 부인도 직접 보는 것은 난생처음인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다. 각인에 대해서는 당금의 황후인 장녀 희원에게 언질을 들은 것이 전부이니 더할 말이 있으랴.
“쉽지도 않은 길을 어린 것이 벌써.”
정 부인은 애처로운 손길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헌원을 어루만졌다.
향인이 일 호(一毫:천분지 일)라면 각인은 일 사(一絲:만분지 일)라. 금실 좋은 이 승상 내외나 차녀 서원 또한 각인에는 이르지 못하였는데, 각인이 비록 하례를 받을 일이라지만 변고나 다름이 없구나.
흐르는 넋두리에 그를 지켜보던 이 승상이 정 부인을 다독였다.
“원인을 알았으니 한시름 놓았네.”
“예, 대감. 불치병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부부는 마주한 손을 꼭 맞잡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단단히 잡은 손이 서로의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으리라 기꺼워했던 것도 잠시.
이 여덟 된 도련님을 상사병으로 앓아눕게 한 각인 상대가 다음의 난제였다.
상대를 알아야 데려오든 모셔 오든 할 터인데 당최 짐작 가는 후보조차 없는 상황이 난감하긴 원인을 알기 전과 매한가지라.
본인이 몸져누웠으니 감은 눈에 질문을 던져도 답을 들을 수 없고 내로라하는 세도가인 탓에 드나드는 인사가 많은 이 승상 댁은 언제나 객들로 문전성시였다.
더해 동무를 만들라 하며 보낸 학관까지 고려하면 행로의 저잣거리를 오가는 행인들마저 그 후보군에 속하는지라, 상대는 찾으면 찾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 잠시 밝아졌던 부부의 낯빛은 다시 점점 어두워졌다.
그나마 단서는 각인.
양인의 태를 보이는 헌원이 각인을 하였으니 그 상대는 음인이렷다.
그 단서 하나에 희망을 걸고 장안의 모든 음인을 찾았으나 찾아낸 음인들은 모두 헌원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하고 남은 것은 이 승상 댁 장손이 양인이란 뒷말뿐이었다.
결국, 방을 붙여 헌원이 자리를 보전할 때 즈음 승상 댁 객들을 수소문하여 헌원 앞에 대령했으나 그 누구도 헌원의 상대는 아니었다.
한숨은 덜어지지 않고 깊어지기만 하는지라.
원인을 찾아낸 후 소세나마 할 여유를 찾았던 정 부인은 상대를 도통 찾지 못하자 금세 수척해졌다. 정 부인은 입술마저 하얗게 일어나 병색이 완연한 모습을 하고 이 승상의 만류에도 헌원을 손수 돌보았다.
정 부인은 헌원의 몸을 닦으며 힘없이 늘어진 헌원의 손을 붙들고 눈물만을 하염없이 뚝뚝 흘렸다.
죽는구나, 죽는구나. 내 새끼 죽는구나.
날 때부터 어여쁘던 내 새끼 이렇게 가는구나.
가기 전에 어미에게 미소 한 번은 보여 주렴.
내 그를 붙들어 이승에 묶어 놓을 터이니.
곡을 하는 정 부인을 애써 달래고 한숨짓는 이 승상 앞에 반가운 이가 나타났다. 이 승상이 사서삼경을 익힐 때부터 같이 수학한 막역지우 주 자사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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