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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무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스마힐의 다리도 이제는 전처럼 속을 썩이지 않았다.
밤마다 해민이 정성스럽게 주물러 준 효과가 나타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평화로운 시대가 오고 풍년이 계속되고 제국민들의 삶이 윤택해지자 이스마힐은 가끔 신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는,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는 있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크게 가져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이스마힐에게 신은 진노하는 이였고 그 진노를 피하기 위해 늘 예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태평성대라고 할 만한 시기가 길어지자 이스마힐은 이제 신전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 풍족하게 축복을 받고도 그것이 자신의 치세로 인한 업적이라고 생각하고 오만해진다면 다시 신의 분노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스마힐은 그 일에 대해 대소 신료들과 상의를 했고 그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에 대해서 같이 인식을 하고 있었기에 대대로 대제사장과 제사장을 배출해내던 가문에서 사람들을 추리기로 했다.
그리고 율법서에 전해져 내려오는 대로 신전을 회복하기로 했다.
두란트의 전언이 이스마힐에게 전달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만약 자기가 그 일에 적합할 것 같다고 생각되거든 자기에게 대제사장의 성무를 맡겨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서찰에 적혀 있었다.
대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이라도 좋을 것 같다는 말에 이스마힐은 한동안 고뇌에 휩싸였다.
두란트의 저의가 무엇인지 쉽사리 판단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이스마힐의 측근들이 모여들었다.
세월이 흘렀고 각자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얹어졌지만 세월은 결코 그들에게 불친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능숙한 노련미와 중후한 아름다움이 각 사람을 빛나게 하고 있었다.
이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스베인은, 해민이 그곳에 와서 처음 보았던 두란트를 빼다 박은 것처럼 장성했다.
“소신은. 믿어 봐도 될 거라고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다른 뜻을 품고 사람들을 결집시키지 못하도록 그 분의 곁에 믿을만한 사람들을 늘 두시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옵니다.”
라플리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조했다.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이스마힐이 물었다.
“소신의 형제 중에 그 일에 적임인 자가 있사옵니다.”
“그대의 형제라. 그러면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이겠구나.”
“그러하옵니다.”
이스마힐이 말하자 라플리가 대답했다.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의 보증이라면 믿지 못할 것이 무어란 말이냐. 게다가 그대가 천거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걱정할 것이 없겠구나. 나는 그리 처리하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거라.”
황제 폐하가 먼저 그리 결정을 해 놓고 다른 이들에게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해 보라고 하면 누가 감히 반대 의견을 내놓겠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이 있으면 서로 얼굴을 붉혀가면서 자기들의 뜻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 자리였고 그런 일은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모두가 그 생각에 의견을 같이 했다.
해민은 스베인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스베인은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는 아이가 아니었지만 미묘하게 움직이는 입술 모양과 눈꼬리로 그의 작은 기쁨이 드러나곤 했다.
아버지에 대해서 말을 하지는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간의 세월을 청산하고 나온다는 것이 스베인에게는 기쁨이구나 하는 생각에 해민은 스베인이 안 돼 보였다.
스베인이 고개를 들었다가 해민과 눈이 마주치자 황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황비 마마가 괜히 자신의 생각을 오해하고 마음 아파하고 계시겠다는 것을 깨닫고 스베인은 당혹해했다.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을 본 이스마힐이 그 가운데에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은 정말로 자주 일어났다.
해민은 스베인이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게 될까봐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다루듯이 조심했고 스베인은 그런 해민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바르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채 장성했다.
자기에게 사람들이 기대를 하고 믿어준다는 것을 알았기에 스베인은 외가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그 자리를 유지했고 이제는 조금씩 정무도 나눠서 맡았다.
“스베인. 황비가 또 괜한 걱정을 하는 것 같으니 어서 위로를 해 드리거라.”
이스마힐이 말하자 스베인이 웃음을 지었다.
“예, 폐하.”
“스베인. 우리 눈치를 볼 것 없이 앞으로는 두란트를 자주 찾아가도록 하여라. 이제는 네가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네 스승이 말하더구나. 그리고 두란트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예, 폐하...”
그것은 스베인에게 기대되는 일인 것과 동시에 걱정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라플리는 스베인이 어렸을 때 두란트 대공과 황후 마마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많이 생략했다.
스베인이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때까지는 괜한 분노도, 서운한 마음도 갖지 않기를 바란 처사였다.
라플리 역시 스베인과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혈통에 대한 반감이 깊어 괴로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스베인이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때부터 조금씩 사실에 입각한 얘기를 해 주었다.
스베인은 외할아버지가 해 준 얘기가 사실이 아닐 거라는 것은 대충 예상하고 있었지만 라플리가 말해주는 것을 들을 때까지는 상당히 모호하고 헷갈렸었기에 라플리에게서 내용을 들었을 때는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도 혈연이라는 끌림 때문이었는지 아버지가 스스로 눈을 베기 전에 자기를 보고 싶어했었다는 말을 들을 때는 슬펐다.
아버지도 자기에 대해서 조금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기대를 품어보기도 했다.
사람들이 황후전에 가는 것은 여전히 통제되었지만 황후가 밖으로 나오는 것은 조금씩 허락이 되었다.
황궁 전체를 아무 곳이나 다닐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넓은 반경에 이르기까지 이스마힐은 통행에 자유를 주었다.
황후가 스베인을 찾아올 수는 없었지만 가끔 멀리에서 서로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스베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황후에게 예를 올렸고 황후는 조용히 인사를 받아주었다.
자기가 포기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황후는 스베인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고 가슴 절절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만약 자기가 키웠다면 스베인을 그리 잘 키울 수는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속으로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되시옵니까, 저하.”
대전에서 나와 스베인을 모시며 라플리가 물었다.
스베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와 홍조가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