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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인은 이스마힐과 해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두 사람의 영향을 받으며 생각과 행동에 여유가 넘치는 성격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지존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사방에서 위협과 공격이 들어올 수 있기에 이스마힐은 그 부분에 대비를 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스마힐이 워낙 강경하게 명을 내려서 해민도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었지만 라비엔이 사라져버렸다는 말을 듣고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은 카란이었는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곧 소식을 정정했다.
라비엔은 감찰부에서 조사를 받고 그 일에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밝혀져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거였다.
그 말이야말로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해민은 갑자기 사람들이 자기만 놔둔 채 음모를 꾸미고 자기를 속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이스마힐은 이렇게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이 일은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이 직접 맡기로 하였다. 이 일만큼은 자기한테 맡겨 달라고 하더구나. 감찰부도 손을 떼 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리하도록 했다.”
“아르마리안이요?”
그 이름을 듣자 해민은, 장막에서 이스마힐이 습격 당한 것을 본 이후 처음으로 라비엔에게 동정을 느꼈다.
아르마리안이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미 라비엔의 평화로운 시간은 모두 끝난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감찰부에서 놓여났을 때 라비엔은 아버지가 손을 써주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빠져나오기가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찰부에서 순순히 라비엔을 놔주었기 때문이었다.
라비엔이 직접 사주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라비엔은 자기가 정말로 그 말을 믿고 가도 되는 것인지 영 탐탁치가 않았다.
그렇다고 가지 않겠다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곳을 나오는데 사방에서 저를 주시하는 눈길이 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고개를 들어서 보면 모두들 시선을 돌리며 외면했다.
그래도 라비엔은 기운을 잃지 않았다.
인생을 살다보면 기복은 늘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면서, 황태자 저하가 황위에 오를 때까지만 잘 버티면 다시 가문의 부흥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때가 되면 가증스런 황비를 폐위시키고,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어주겠다고 단단히 벼르는 라비엔이었다.
그런 라비엔의 눈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라비엔은 자기가 그 남자를 어디에서 보았던가 하면서 주의를 기울였다.
“아아. 황태자 저하의 교육을 맡으신...”
라비엔이 반가워하며 말을 했지만 인사를 받은 라플리는 인사를 한 사람이 무안하도록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라비엔을 바라볼 뿐이었다.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을 사물처럼 대놓고 구경하듯 바라보는 라플리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가 괴짜라는 말은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었기에 라비엔은 그러련 하고 그 자리를 지나치려 했다.
“용기 내기를 빌겠소.”
라플리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라비엔이 돌아보며 묻자 라플리가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라플리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라비엔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전혀 인간적이지도 않고 유머나 동정이나 호의도 느껴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대하며 혼자 흥분한 것 같기도 했고 그 일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못된 어린 아이 같은 호기심까지 붙어있는 얼굴이었다.
라비엔은 왠지 두려운 생각이 들어 라플리의 앞을 서둘러 떠나려 했다.
“내 형제들이 짓궂기는 하지만 악의는 없을 것이오. 큰 의미로 보면. 어쨌든 그럴 것이오.”
라플리가 그것만큼은 꼭 알고 가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형제...라니...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라비엔이 물었지만 정작 라비엔이 묻는 것에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약이 올랐지만 별 수가 없었다.
라플리가 말한 그의 형제들이 누군지는 늦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라비엔이 황궁에서 나갔을 때 그의 가문의 인장이 그려진 마차 대신 다른 마차가 와서 라비엔의 앞에 와서 섰다.
라비엔은 그 마차가 제 앞에 와서 서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와 상관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생각은 확실히 다른 듯 했다.
안에서 남자들 두 명이 내렸다.
하나같이, 좀처럼 보기 힘든 대단한 미색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단 번에 라비엔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이유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헤르만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연회를 맞아 황비가 연회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에게 팔았다는 소문이 전해지는, 황비가 그린 그림이 그려진 옷들이었다.
그 옷이 한동안 입소문을 타서 황비의 옷을 흉내내서 여러 사람이 그림을 그려 그런 옷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황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황비가 특이한 안료를 사용하여, 정해진 세탁법으로 빨면 그림이 지워지지도 않는다고 하더니 정말로 연회가 끝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림은 선명하고 옷은 깨끗했다.
라비엔은 자기가 지금 한가롭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황비가 연회때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에게 선물했다는 그 옷을 사기 위해 헤르만 제국의 대귀족들이나 대상인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황실에서도 엄청난 금액을 부르며 원할 정도였기에 자연스럽게 거기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라비엔은 마차에서 내린 남자들에게 두 팔을 붙잡혀 마차에 함부로 구겨지듯 태워졌을 때에야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렸다.
이들은 누구인가.
아니.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의 미동들일 거였다.
그런데 그들이 왜 지금 자기에게 그런 짓을 벌이는 것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차는 그대로 빠른 속도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를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왜 자기가 이런 일을 당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라비엔은 알지 못했다.
“누구입니까, 당신들은! 내가 누군지 압니까! 나한테 이렇게 굴고도 당신이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라비엔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럴 때마다 악의에 가득 한 주먹이 그에게 날아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