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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85화 (8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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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산책을 하지 않겠느냐, 황태자.”

    “산책 말씀이시옵니까. 언제나 좋사옵니다. 황비 마마.”

    “황태자. 전에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이 주신 옷을 입으면 어떠하겠느냐.”

    “그리하겠사옵니다. 황비 마마. 잠시만 기다려주옵소서.”

    스베인은 지체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왜 그러는 것인지 궁금할만도 할 텐데 왜 그러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왜 그 옷을 입으라 하시느냐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따르는 스베인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황비 마마. 오래 기다리셨사옵니다."

    잠시 후에 나온 스베인은 지상으로 내려온 태양 같았다.

    그 모습에서 다시 두란트의 모습이 보여서 해민은 가슴이 저미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져서 해민은 당혹스러웠다.

    “가자. 스베인.”

    “예, 황비 마마.”

    스베인은 해민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아왔다.

    아직은 허리에도 닿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해민보다 더 자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되면 스베인의 어깨에 헤르만 제국이 놓여질 거였다.

    이 작은 어깨에 지워질 무거운 짐이 안쓰러웠지만 혼자 감당하게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스마힐이 있으니 스베인은 절대로 외롭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자기와 이스마힐이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차양이 되어줄 거라고, 스베인을 바라보며 해민은 마음 속으로 다시 다짐했다.

    해민은 스베인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어가며 탑을 지나갔다.

    그때마다 스베인은 해맑게 대답했다.

    해민은 스베인이 신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생각을 여러 번 하고 말을 했다.

    황태자의 자리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을 텐데 해민과 얘기를 나눌 때는 제법 어린애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해민으로서는 자기를 그렇게 대해주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자신을 대할 때는 스베인의 얼굴에 어떤 구김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해민은 알고 있었다.

    두란트가 왜 스베인을 보고 싶어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로서 아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면 해민고 함께 있는 스베인을 보는 것이 두란트에게는 가장 좋은 일이었을 거였다.

    스베인과 함께 걸으면서 해민은, 지금쯤 두란트가 스베인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민은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생각이 깊고 영민한 스베인이라면, 황비 마마께서 왜 그리하시는지 알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마디의 힌트만 주더라도 스베인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결국 해민은 스베인에게 두란트 대공의 부탁에 대해서 말하지는 못했다.

    두란트의 숨은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말을 해 주기에는 위험부담이 있었다.

    스베인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는 법도 없이 해민의 곁에서 조용히 걸었다.

    별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스베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평소와 기분이 다른 것 같지도 않았고 표정이 달라보이지도 않았다.

    저녁 무렵, 두 사람은 같이 식사를 했고 스베인은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갔다.

    해민은 자주 고개를 들어서 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그 문이 금방이라도 열리고 누군가 소식을 가지고 들어올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카란이었고 왠지 해민이 상상했던대로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황비 마마... 두란트 대공이...”

    말을 다 들은 것도 아니었는데 해민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

    해민의 눈 앞에 있는 두란트는 아무 말도 없었다.

    황의가 막 떠난 자리였다.

    해민은 두란트의 눈에 둘둘 감겨있는 붕대를 보았다.

    옆에 서 있던 간수에게서 칼을 뺏어들어 순식간에 저지른 일이라고 했다.

    간수들은 죄수에게 칼을 뺏겼다는 것이 밝혀지면 문책을 당할 것 같아 쉬쉬하려 했지만. 숨긴다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자기들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목이 댕겅 잘려서 바닥에 구를 수도 있는 거였다.

    두란트 대공이 스스로를 공격하는 대신 그들을 공격했다면 분명히 그리 되었을 거였다.

    그러나 두란트 대공이 자기들을 공격하고 탈출을 시도할 거라고 생각했던 간수들의 눈 앞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두란트 대공이 공격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고 처음에 목표했던 것이 그것이었던 듯 정확하게 눈을 그었다.

    피가 쏟아지는 두란트 대공의 얼굴을 보며 간수들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오히려 두란트 대공은 침착했다.

    “토비어스가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눈 먼 자를 황제로 세우겠다고 날뛰지는 못할 것이다.”

    두란트 대공이 자기 눈을 베고 담담히 한 말은 그 말이었고 그 후로 두란트 대공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황비 마마께서 오셨슴을 고하려던 간수는 해민에 의해서 제지당했다.

    해민은 조용히 그 안에 들어섰다.

    삐그덕 거리면서, 둔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두란트 대공이 해민에게 스베인을 보게 해 달라고 했던 것은, 다시는 스베인을 보지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해민은 뒤늦게 깨달았다.

    두란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스베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변화가 생겼던 것일까.

    해민은 두란트에게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해민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두란트는 잠깐 문이 열렸다가 닫힌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본 것 같았다.

    “거기에 계속 그렇게 있을 생각이냐, 일레노이.”

    해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 내지 않는군.”

    그리고 다시 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너무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것. 그게 나한테 형벌이었을까. 모든 걸 그렇게 쉽게 가질 수 없었다면 내가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까. 내가 쉽게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들 말이다. 내게 약속됐던 모든 것들. 그리고. 일레노이. 너도 말이다.”

    그 말에도 해민이 답할 말은 없었다.

    그 후에는 두란트도 잠잠해졌다.

    해민이 그곳을 나올 때까지도 두란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문이 닫혔을 때에야 두란트의 입술이 움직였다.

    “스베인 그 녀석은 나를 닮지 않겠더군. 나하고는 다른 삶을 살 것 같아.”

    누워있던 두란트의 입가가 올라가며 무력한 미소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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