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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76화 (7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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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비엔은 황궁에서 퇴출되었다.

    그리 할 이유는 많았다.

    그동안은 눈감아 주었던 실수에 더 이상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만으로도 라비엔을 쫓아낼 사유는 충분해졌다.

    토비어스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황제 폐하의 전방위적인 공격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을 지피고 바람을 일으켜 불길을 황제 폐하께로 향하게 하면 황제 폐하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버릴 줄 알았지, 오히려 더 큰 바람을 일으켜 역공을 펼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전과 같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을 거였다.

    토비어스는 가문의 번성 앞에서 갑자기 풍전등화의 위기가 닥친 것을 두고 고민이 깊어졌다.

    이스마힐의 불신을 산 라비엔은 이스마힐을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 뿐이라는 생각에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

    움베르트는 더 이상 희생제물이 전과 같은 폭발적인 힘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움베르트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레노이가 전보다 더 자주 황비의 몸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움베르트는 배신감을 느꼈다.

    일레노이가 그 몸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해 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일레노이가 알아서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고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인데 일레노이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냥도 전처럼 여의치않았다.

    움베르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았다.

    미친 사냥개가 한 번은 거의 뒤까지 쫓아와서 하마터면 개에게 온몸을 물어뜯기 뻔 했다.

    그 후로는 겁이 나서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피하다가는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끝이 나 버릴 거라는 조급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냥 신전에서 머무는 것이 나았을 거였다.

    그랬다면 대제사장이라 불리며 제사장과 시종들의 수장 노릇은 계속 할 수 있었을 거였다.

    단지 조금 더 큰 욕심을 낸 것 뿐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잘못 됐다는 거였던 건가.

    움베르트는 구덩이 속에 몸을 누인 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두란트 대공 뿐이었다.

    황후 마마는 황후전에 갇힌 이후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 않는 것인지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그거야 어떤 거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대공을 구해야 한다.’

    일단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움베르트는 구덩이에서 나왔다.

    그리고 두란트 대공이 갇혀있는 탑으로 향했다.

    어둠에 숨어서 몸을 움직이던 도중 움베르트는 뜻밖의 사냥감을 발견했다.

    호젓한 곳을 혼자서 걸어가는.

    근래 들어서는 황궁 안에서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움베르트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황궁에서 죽어서 사라진 자들이 많다보니 그 자리를 채운 신입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이렇게 겁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움베르트의 얼굴에 기괴한 웃음이 지어졌다.

    움베르트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움베르트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을 즈음이었다.

    “크르으으으으으응!!”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그것이 무엇인지 보기도 전에 그것은 움베르트의 몸에 달려들었다.

    "흐으으아악!!"

    움베르트는 제 눈 앞의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지는 것을 보았다.

    눈 앞에 보이던 남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움베르트의 눈에 보인 것은 짐승의 검은 발이었다.

    그리고 하얀 엄니와 혀.

    그 뒤로 이어진 검은 동굴은 통증에 정신을 빼앗겨 어떤 정보도 주지 못했다.

    움베르트의 얼굴에 이를 박아넣은 사냥개는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것은 움베르트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라플리는 사냥개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방해하지 않았다.

    라플리는 이런 문제일수록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교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죽음이 아닌가.”

    라플리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아무도 없었다.

    사냥개의 참혹한 공격을 당한 움베르트는 마침내 그 질긴 생명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움베르트의 비명을 들은 병사들이 달려왔을 때 라플리는 그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대제사장 움베르트가 사고를 당하여 죽은 것 같습니다. 끈이 풀린 사냥개가 여우로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지요.”

    라플리의 말에 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황궁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실종사건이 움베르트와 연관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드디어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움베르트의 처참한 몰골에 구토감을 느낀 자들이 여럿이었다.

    “어서 폐하께 이 사실을 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움베르트 대제사장의 문제로 성심이 어지러우셨을 텐데 말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한 이에게는 상이 기다리는 법이지요.”

    라플리가 말하자 병사들이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라플리가 말했던 것처럼 좋은 소식을 먼저 전하기 위한 거였지만 달리다보니 왠지 라플리를 피해 도망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끈을 놓쳤다는 주인이 당황하기는커녕 자신의 사냥개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옆에서 처연히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베르트에게 동정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움베르트를 죽인 그 사냥개가 두란트 대공이 갇혀있는 탑에는 들어갈 수 없을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

    움베르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부터 해민은 자신의 몸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이스마힐도 에르모나도.

    그리고 카란과 제르반, 스베인까지.

    혹시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실까? 하는 것 같은 얼굴로 해민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던 해민은 사람들이 왜 자기를 그렇게 보는 걸까, 하면서 혹시 자기가 알지 못하는 동안 또 자기가 기억을 잃었던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다.

    자기가 기억을 잃은 그 시간동안 자기 몸을 장악한 일레노이가 사람들에게 패악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그런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물었지만 모두들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민은 그들이 자기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은 아무리 시원하게 숨을 쉬려고 해도, 밭은 숨밖에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는데 점점 달라졌다.

    “해민. 기분이 어떠하냐.”

    움베르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해민을 찾아온 이스마힐은, 조바심을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빨리 그것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무엇을 말씀하시옵니까?”

    해민은, 이스마힐이 뭔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자기를 바라보는 것 같기는 한데 정작 이스마힐이 기대하는 것이 뭔지는 알 수 없어서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아니다. 해민. 그냥 천천히 하면 된다.”

    그렇게 알쏭달쏭한 말만 하는 이스마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해민에게도 그 말이 들어갔다.

    에르모나나 호위 무사들은 그 말을 직접 하지 않고 기다렸다.

    혹시라도 아직 일레노이가 황비 마마의 몸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상태라면 황비 마마의 몸 안에 있던 일레노이가 폭주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하면서 그들은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신료들이 자기들끼리 말을 나누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해민은 그제야 이스마힐과 주위 사람들이 쉬쉬 하면서도 기다렸던 소식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일레노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 그저 잠시 웅크리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일레노이를 깨어나게 한 것이 움베르트의 흑마술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해민 역시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어떤 것 같으냐?

    어떤 것 같으냐?

    그렇게 묻는 이스마힐은 마치 임신 소식을 묻는 남편 같았다.

    나중에는 이스마힐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저절로 이스마힐 자신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것 같사옵니다. 폐하. 이제 일레노이가 제 몸을 지배할 것 같지 않사옵니다. 이스마힐. 왜 그런지 물으신다면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겠사오나 일레노이가 나타난 이후로 이렇게 맑은 기분이 들었던 적은 없었사옵니다. 불안한 기분도 완전히 사라졌사옵니다."

    이스마힐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해민은 예전처럼 걱정 없이 이스마힐의 침궁에 들었고 이스마힐의 밤을 같이 정리하고 이스마힐과 함께 아침을 맞았다.

    스베인은 두 사람이 같이 앉아있는 침궁에 와서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올렸다.

    이제 이스마힐과 해민에게 고민이랄 것은, 스베인이 앞으로 황위를 물려받게 될 때까지 외척을 견제하여 헤르만 제국과 제국민들을 위한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 뿐이었다.

    스베인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며 자존감을 찾았고 자기가 존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카란의 추천으로 라플리가 스베인의 교육 일부를 맡게 되었다.

    라플리는 주변국의 정세와 그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서 스베인에게 알려주었다.

    라플리와 스베인은 의외로 잘 통하는 구석이 있었고 스베인은 라플리가 가르쳐주는 지식을 무서운 속도로 습득했다.

    카란이 가르쳐주는 무예도 제법 잘 따라해서, 카란은 황태자 저하의 몸이 자라고 근육이 붙기 시작하면 충분히 자기 몸 하나는 지켜낼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했다.

    카란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스베인이 카란과 함께 무예를 연마하는 연무장에 가서 보면 알 수 있었다.

    날아오는 목검을 받아쳐내는 힘은 모자랐지만 순발력과 집중력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좋았다.

    그런 스베인을 보는 것은 이스마힐과 해민에게 좋은 낙이 되었다.

    황실이 견고해지는 것과 반대로 토비어스 가문은 몰락 일로였다.

    토비어스는 영지민들에 대한 수탈을 자행했고 그 문제로 연일 문제를 일으켰다.

    스베인은 자신의 외척을 두둔하지 않았고 영지민들이 외할아버지의 실책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이스마힐을 설득했다.

    이스마힐은 기꺼이 그 말을 들어주었다.

    스베인은 어린 나이에도, 예사롭지 않은 판단과 배려로 이스마힐을 흐뭇하게 했다.

    토비어스는 궁지에 몰리자 스베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스베인에 대한 토비어스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토비어스는 가문을 부흥시킬 의무가 스베인에게 있고 스베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 역설하며 스베인이 자신의 부모의 원수들에게 의탁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곤 했다.

    스베인의 표정을 보고 해민과 이스마힐은 스베인에게 근심거리가 생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해민은 스베인에게, 걱정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무엇에 관한 것이건 전부 다 말을 해도 좋다고 했지만 스베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을 하고서도 전부를 털어놓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해민은 자주 스베인의 전각에 드나들면서 스베인이 혼자서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이 생기지 않도록 챙겼다.

    스베인을 모시는 사람들도 모두 그런 해민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믿었다.

    그러나 스베인이 함구를 명한 것까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스베인은 외조부가 자기를 만나러 올 거라는 말을 전해들은 후 마음에 평안을 찾지 못했다.

    외조부를 보면 외조부가 늘 하는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둔 사람들에게 의탁해서 일신의 안위를 좇는다는 말.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그 말은 늘 스베인의 머릿속에 남아 스베인에게 죄책감을 들게 만들었다.

    해민과 이스마힐도 스베인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토비어스가 스베인에게 접근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주려고 했지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기에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스베인이 힘을 내 주기를 바라고 있는 판이었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해민이 스베인을 찾아간 그 날.

    토비어스가 그곳에 있었던 것은 토비어스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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