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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70화 (7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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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말이 맞다. 에르모나. 죽을 죄를 지은 것이다.”

    “폐하... 한 번만 용서하여 주옵소서...”

    에르모나는 이스마힐의 서슬퍼런 기세에 질려 당장이라도 바닥에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이스마힐은 화를 가라앉히기가 힘든 얼굴이었고 그때 제르반이 나섰다.

    “하오나 폐하. 황비 마마를 알아보기에 에르모나처럼 적합한 자를 다시 찾기는 어렵사옵니다.”

    이스마힐도 제르반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에르모나를 향해 불을 뿜을 것 같은 시선을 거두었다.

    에르모나는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에르모나. 한 번만 다시 말하겠다. 두 번은 없느니라. 해민은 이런 상황에 혼자 후원 산책을 하면서 바람이나 쐬고 머리나 식히겠다고 말할 사람이 아니다. 자기 한 사람이 사라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걱정을 하고 얼마나 많은 일이 중단될지 아는 사람이 그렇게 경거망동하겠느냐. 자기 일신의 휴식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이스마힐의 목소리가 낮게 에르모나를 찔러 왔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네가 해민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참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은 없다는 내 말을 명심하거라.”

    “예, 폐하.”

    일레노이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려 했다.

    그러나 일단 해민이 아닌 것이 드러난 이상 일레노이는 황비로 대우받지 못했다.

    제르반의 손가락이 일레노이의 팔을 아프게 조여왔다.

    “내가 황비 마마의 몸에 흉터를 남기게 하지 마라.”

    제르반이 말했다.

    일레노이는 감히! 라고 소리치며 제르반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런 위협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일레노이를 황비로 대우해서는 일레노이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이 어려울 거라는 것을 안 이스마힐이 내린 명령이었다.

    일레노이는 중죄인이고 황비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에 맞게 대우하라는 말이 이스마힐의 입에서 떨어지고 난 후 일레노이는 그야말로 굴욕적인 순간을 맞이하곤 했다.

    스베인도 마찬가지였다.

    스베인도 황비가 변한 것을 알면 일레노이의 앞에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일레노이를 무시했다.

    일레노이가 스스로 떠날 때까지 황비를 포박하게 하기도 했다.

    일레노이는 그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해민인 것처럼 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이제는 그것이 쉽질 않았다.

    구분이 어려워지면 그들은 황비 마마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거나 요요를 해 보라고 했다.

    그럴 때 귀찮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해민이었고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은 일레노이라는 것이 스베인이 알려준 황비 마마 구분법이 되기도 했다.

    “폐하...!”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이스마힐을 향해 일레노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자기들도 구분을 할 수 있겠다는 듯이.

    언젠가 카란이 이스마힐에게 그것을 물은 적이 있었다.

    움베르트가 더 많은 희생제물을 만들어내고 움베르트의 흑마술이 정교해지면 일레노이가 황비 마마의 많은 것들을 흉내낼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렇게 된다면 황비 마마처럼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요요를 다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이스마힐은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지만 모두가 결국에는 느끼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요요를 다루는 건 일레노이를 속이는 말이지. 우리는 우리 말에 반응하는 황비를 보면서 황비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너도 그러하지 아니하냐.”

    이스마힐의 말에 카란은 자부심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카란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이스마힐과 스베인이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카란이 그러는 것처럼 황비 마마의 본모습을 확실히 아는 사람들이 늘어가다보면 나중에는 일레노이가 어떤 위협도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비의 팔을 붙잡고 가던 제르반은 황비의 몸에서 갑자기 힘이 쭈욱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고 곧바로 손을 뗐다.

    제르반의 움직임을 보고 모두가 태도를 달리했다.

    황비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폐하.”

    제르반이 말하자 이스마힐이 뒤를 돌아보았다.

    “폐하...”

    황비가 이스마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스마힐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웃음이 번졌다.

    “그대. 돌아왔구나.”

    이스마힐이 해민에게 다가왔다.

    “제가 어찌... 폐하... 제가 또...”

    해민은 급한 걸음으로 종종거리며 이스마힐에게 다가갔다.

    “제가 실수하였사옵니까? 혹시 사람들에게 패악하게 굴었사옵니까?”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있었을 일들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은 해민은 이스마힐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다. 그대는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느니라. 그저 우리는. 우리 실력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흐뭇해 하고 있었느니라.”

    “그것이 무슨 말씀이옵니까, 폐하?”

    자신의 턱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눈을 빛내는 해민을 보며 이스마힐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는 어떤 순간에도 그대를 착각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러고보면 해민. 이것은 우리에게 저주가 아닌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누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속속들이 알겠느냐. 나는 그대의 모든 것을 알아가는 느낌이다. 자신할 수 있다.”

    “폐하...”

    해민은 이스마힐이 정확한 대답은 해 주지 않고 다른 말만 늘어놓는 것 때문에 답답했지만 이스마힐의 말이 이해될 것 같기도 했다.

    “침궁으로 가자. 해민. 그대의 위로가 필요한 밤이다.”

    이스마힐이 어깨를 감싸며 은밀한 목소리로 제 귀에 바람을 흘려넣으면서 말하자 해민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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