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69화 (69/103)

00069  =========================

움베르트 대제사장이 제사장들과, 신전에서 일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도망친 후에 신전은 폐쇄되었다.

신전이 폐쇄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신심 깊은 자들은 신전이 폐쇄되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신전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서는 빠르게 신심이 사라졌다.

신을 믿고 신을 위해 봉사하던 자들이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이 은밀하게 퍼져나가자 그들은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인간이 신에게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일신의 안위.

거기에 부귀 영화가 덤으로 더 주어지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고 내세에 좀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다가 죽는 것.

그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전에서 일어난 일은, 자기들이 그동안 믿고 섬겨왔던 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심이 들게 만들었다.

수문장은 궁에서 연회가 열리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붙잡히지 않은 움베르트 대제사장.

사라지는 사람들.

오늘 밤은 왠지 쉽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경계에 나선 무사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궁 안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에 대해서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위험한 일이 자기들에게 미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러 사람이 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얼마 전에 불에 탄 후 복원되어가고 있는 황비 마마의 별궁의 순찰을 돌 때, 건물의 그림자에서 괴물 같은 한 사람이 튀어나왔을 때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사람은 무기를 들고 있지도 않았다.

두건 아래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은, 피부로 덮이지 않은 치아였다.

그 자가 웃고 있었던 것인지, 치아가 드러나서 그런 것인지 궁금해할 시간도 없이 무사들은 순식간에 당했다.

필요한 장기만을 적출해내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을 끌어다가 구덩이에 던져버리는 움직임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사들의 덩치를 제대로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보통 사람들의 무게보다도 훨씬 더 나가는 무사들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도 그 의문을 왜 간직할 수는 없었다.

의문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자가 누릴 수 있는 호사라는 것을,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야 깨달았다.

해민이 에르모나만을 데리고 산책에 나선 것은 그때였다.

에르모나는 황비 마마가 갑자기 말이 없어진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요즘은 그런 일도 종종 있었기에 깊이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혹시 일레노이 황비 마마가 돌아온 것인가 하는 생각을 짧은 순간에 하기는 했지만 황비 마마는 두란트 대공이 갇혀있는 탑으로 가자고 하지도 않았고 에르모나가 황비 마마를 의심할만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르모나는 자기가 과민하게 구는 거라고만 생각을 한 채 황비 마마를 따라나섰다.

아무리 짧은 거리라고 하더라도 호위 무사가 없이는 가지 말라고 했던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령이 있었지만, 카란과 제르반도 조금은 쉬어야 하지 않겠냐는 황비 마마의 말에 에르모나는 설득이 되었다.

“그리고 곧 돌아올 거니까. 잠깐 머리만 식힐 거야. 긴장되는 하루였잖아.”

황비 마마의 말에 에르모나는 황비 마마를 홀로 수행했다.

후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헤르만 제국의 아름다운 후원은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고 사람들은 언제 다시 찾을 수 있게 될지 모르는 그곳의 풍광을 눈에 담기에 급급했다.

그러던 그들의 눈 앞에 헤르만 제국의 황비 마마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야말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가까이에서 보는 황비 마마는 감탄이 절로 나올만한 미색이었다.

헤르만 제국의 황비 마마가 얼마나 고혹적인 사람인지는 그동안 귀가 닳도록 소문을 들어왔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꿈처럼 느껴졌다.

황비는 그들과 말을 주고받지도 않고 그저 후원을 조용히 산책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숱한 남자들의 가슴에 불을 당기는 꼴이 되었다.

남색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자들조차 황비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음심이 동하여 황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황비는 딱히 목적지를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고 후원을 거닐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 주위에 있던 자들이 황비에게 접근하고 싶어하며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때 한 남자가 다른 사람들을 미치듯 하며 용기를 낸 듯 황비에게 다가왔다.

“제국의 꽃을 뵙습니다.”

황비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에르모나는 그제에야 막연하게, 황비 마마가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에르모나가 그 생각을 하고 있으 때 제르반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에르모나는 제 잘못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제르반은 에르모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지금은 에르모나를 다그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제르반이 막 황비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 황비의 시선이 그 남자에게로 향했다.

처음에는 관심없다는 태도로 그의 얼굴에 잠씨 멈추었던 시선이 곧 그가 입고 있는 옷으로 향했다.

황비의 얼굴에 불쾌감과 분노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네가 왜.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이냐!”

황비의 목소리가 사납게 나왔다.

“소신은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의 천거로 이 자리에 있사옵니다. 이 옷은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께서 소신에게 선물하여 준 옷이옵니다.”

“그것을 왜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이...”

황비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자 제르반이 황비에게 다가갔다.

“돌아가시는 길은 제가 모실 것이옵니다.”

말은 예의발랐지만 말투는 차가웠다.

에르모나는 자기가 왜 그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것인가 하며 자책했다.

황비는 제르반이 아예 자신의 팔을 쥐기까지 하자 제르반을 노려보았다.

그 손을 놓으라고 명을 하고 싶지만 이 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일레노이의 명령에 휘둘리지 말라는 이스마힐의 지엄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안 것인가!’

일레노이는 분했다.

해민이라는 자가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행동했는데.

그렇게 해서 이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소한 장난이나 좀 쳐볼까 했는데.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일레노이는 제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제가 아끼던 옷을 입고 있는 그 남자 때문이었다.

그 남자 때문에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 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소동을 저지른 남자는 천진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제르반이 그를 보고는 짧게 웃음을 지었다.

‘고맙다, 라플리.’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의 천거로 그곳에 들어온 라플리의 활약은 대단했다.

사람들은 그를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의 미동으로 알고 있었지만 라플리의 혈통은 그곳에 모인 어떤 사람들보다도 고귀했다.

대륙의 각 나라가 정쟁에 휩싸이고 정쟁을 통해 눈 먼 희생자들이 나오고 그 와중에 고귀한 혈통의 어린 피붙이들이 죽음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곳에 나타나 그 생명을 가로채는 사람이 있었다.

그 손은 다름아닌 아르마리안의 것이었고 라플리 역시 아르마리안에 의해서 그렇게 극적으로 목숨을 귀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프리모 왕국의 왕손이었지만 지금은 라플리를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존귀한 신분 대신 아르마리안의 미동으로, 탐욕스런 늙은 여자의 밤시중이나 드는 남자로 생각하며 그를 얕잡아보고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아르마리안에게 라플리에 대한 얘기를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이스마힐과 해민을 제외하고는 카란과 제르반이 전부였다.

라플리와 몇 명의 사람들이 황궁에 들어와 활약을 하고 있는 가운데 그들만큼은 그들의 신분을 제대로 알고 지켜주어야 했던 것이다.

라플리가 왕손이라는 것을 알고 카란과 제르반이 그를 제대로 대우하고자 하였지만 라플리는, 끊어진 왕가라는 것처럼 부질없는 것은 없다며 자기를 친구로 맞아주기를 간청했다.

아르마리안의 미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라플리는 지나다니는 곳마다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다.

아무에게나 친절을 베풀고 호의를 아끼지 않는 라플리의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모여들었다.

덕분에 라플리는 남들이 열기 쉽지 않은 입을 쉽게 열 수 있었고 빠른 시간 동안 남들이 닿기 힘든 비밀스런 정보들을 모을 수 있었다.

사신단의 비밀스런 움직임을 가장 잘 파악해서 정보를 가장 먼저 주는 사람도 라플리였다.

갓 걸음마나 떼고 아장아장 다닐 때 고국을 떠나온 거라서 그의 고국 사람들 중에도 라플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라플리는 다른 아르마리안의 남자들과 함께 황궁을 구석구석 누비며 이스마힐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이스마힐은 그들을 믿고 더 많은 시간을 해민에게 할애할 수 있었다.

제르반이 일레노이를 데리고 걸음을 얼마 옮기지 않았을 때 긴 꼬리를 달고 오는 황제 폐하와 마주쳤다.

일레노이는 이스마힐을 발견하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제가 하던 행동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자기가 일레노이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일레노이는 한껏 눈꼬리를 휘어가며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폐하...”

그러나 이스마힐은 일레노이를 싸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스마힐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에르모나를 바라보았다.

“폐하...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에르모나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 사이에서 일레노이는 완전히 소외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