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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옷 위에 그려진 그림은 경이로웠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게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은 그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단정하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보석들도 아름다웠다.
대륙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보석이었지만 그만한 상질의 것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거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실의 재정이 어렵다고 하더니 어떻게 저런 것을 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의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황제와 황비가 연회장에 들어온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순식간에 주변인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들의 모습이 압도적이라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황제는 시종일관 황비의 손을 잡고 있었고 그 손을 잠시도 놓지 않았다.
황후의 탄신연에, 황후가 미령하여 연회에 참석도 하지 못하는 마당에 황비와 지나친 친밀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소리는 금방 묻혀 버렸다.
“연회에 참석해준 여러분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오. 그리고 이 자리에 있어, 헤르만 제국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된 여러분에게 축하를 하는 바요. 나를 이어 황위에 오르게 될 스베인 스카르탄에게 예를 갖추어 맞이하도록 하시오.”
이스마힐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예비 황태자를 기다렸다.
어린 스베인은 잔뜩 긴장을 한 모습이었지만 나름대로 위엄을 지키며 걸어 들어왔다.
스베인에게 딱 맞춰진 옷은 황제와 황비가 입은 옷과 통일성이 있었다.
스베인은 겁이 날 때마다 황비 마마와 황제 폐하를 바라보았다.
저를 격려하는 표정의 두 사람을 보면서 스베인은 벙싯벙싯 웃기도 하면서 걸음을 당당하게 옮겼다.
이스마힐은 그런 스베인을 보다가 해민을 바라보았다.
해민은 끝까지 그곳에 오지 않으려고 했었다.
혹시라도 도중에 일레노이가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이스마힐이 강권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위축되지 말라고도 하였고 이제부터는 해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해민은 불안했지만 제 손을 힘주어 잡고 있는 이스마힐을 믿었다.
가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이스마힐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주었다.
해민은 이스마힐이 다른 누구에게도 그런 웃음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스마힐은 달라졌다.
황후와 두란트, 움베르트와 토비어스의 악행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스마힐의 마음은 조금씩 강팍해진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인간이 선하다고 믿을 수 없게 된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그러면서도 해민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카란과 제르반도 안타까워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안타까워한 것은 황제 폐하가 세상의 민낯을 끝내 보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스마힐은 전보다 의심이 많아졌지만 그것은 합리적이고 불가피한 변화였다.
자기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도 그것은 필요한 항목이었을 터였다.
해민은 이스마힐의 의지가 가득한 눈을 바라보았다.
이스마힐은 해민이 옆에서 고개를 들어 자기를 바라보려고만 해도 벌써 고개를 돌려 해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주의와 관심을 해민에게 돌리기 위해 남겨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저를 마주 바라봐주는 이스마힐을 보면 해민은 다시 한 번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일레노이가 저를 누르고 나오려고 해도 저항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움베르트가 무슨 짓을 했는지 해민도 이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자기도 뭔가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움베르트의 흑마술에 자기가 번번이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움베르트가 더 많은 희생제물을 만들고 더 강력한 흑마술을 한다고 해도 이스마힐을 지키고 그의 곁에 머물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가 거기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굴복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베인은 황제와 황비에게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해민은 스베인을 자랑스러워하며 바라보았다.
해민을 올려다본 스베인의 눈에도 웃음이 지어졌다.
“모두들 즐기시오.”
이스마힐이 말하자 음악이 다시 경쾌해졌고 사신단들이 준비해온 축하 선물을 가져왔다.
해민과 이스마힐은 상석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그들이 가져온 선물을 받았다.
이스마힐은 그때마다 선물을 열어보고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황후 마마의 탄신일을 경하드린다는 말이나 빨리 쾌유하시기를 바란다는 말 등을 했다.
이스마힐은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대했다.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지루하다고 여길 틈이 없었다.
스베인과 이스마힐은 수시로 해민을 살폈다.
그때마다 해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연회는 무사히 끝났다.
사신단은 아직 남아서 즐길 생각인 듯 했지만 이스마힐은 자기가 그곳에 더 남아있을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고관 대작들을 불러 뒷 일을 부탁하고 해민과 스베인을 대동하고서 그곳을 떠났다.
그 뒤에 카란과 제르반이 바짝 뒤따랐다.
걸음을 옮기던 이스마힐이 두 사람을 손짓으로 불렀다.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이스마힐에게 바짝 다가갔다.
“술에 취한 채 황궁 안을 여기저기 다니다가는 움베르트의 사냥감이 될 수도 있음이다. 움베르트는 아직 황궁을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황궁 안에서 희생 제물을 구하고 있는 것 같으니 신경을 쓰도록 하여라.”
“예, 폐하.”
그러면서도 카란과 제르반은, 자기들 둘 중 한 사람은 황제 폐하와 황비 마마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뜻을 아는 듯, 해민이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카란은 제 곁에 있게 해 주시면 안 되겠사옵니까.”
해민이 말하자 카란과 제르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는 빈틈없이 할 것이니 그리 하도록 하시지요, 폐하.”
그 말에 이스마힐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조심해야 할 것이다. 움베르트는 우리가 아는 움베르트가 아닐 것이다. 흑마술을 시행하면서 자기 자신도 점점 더 강해졌을 것이다.”
이스마힐이 말하자 카란과 제르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그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
수문장은 매일 그 수를 헤아렸다.
궁을 나가는 자.
들어오는 자.
수문장은 대제사장 움베르트가 나가는 것을 보았냐는 질문을 이미 수차례나 받았다.
그러나 그는 보지 못했다.
대제사장 움베르트가 궁을 나가려고 하면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는 명령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 순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움베르트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요근래, 궁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는 자가 늘고 있었다.
사흘이면 한 명 꼴이었다.
수문장은 궁에서 나오지 않은 자들이 근무하는 곳에 사람을 보내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궁 안에 사람들을 풀어 샅샅이 찾는데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