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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노이."
"예. 폐하."
"그대가 사라지기를 원한다. 이것은 황명이니라. 다시는. 나타나지 말거라. 사라지거라. 영원히 말이다."
"폐... 하..."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사라지라 했다.
나타나지 말라 한다.
그가.
이스마힐이.
일레노이는 제 가슴으로 휑하니 찬 바람이 불어 제 몸이 부서져 날려버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눈을 뜬 곳은 해민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 것 같았다.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눈을 떴던 곳.
그곳이 여기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탑 안의 감옥인가?
그러나 감옥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안락했다.
해민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문이 열렸다.
“일어나셨사옵니까.”
에르모나였다.
“에르모나. 여기가... 어디냐.”
“이제 마마께서는 여기에 거하시게 될 거라 하셨사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옵소서. 마마. 곧 폐하께서 오실 것이옵니다. 마마께서 일어나시거든 곧바로 기별을 넣으라 하셨사옵니다.”
에르모나는 잠시도 지체치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이스마힐이 돌아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헤르만 제국의 지존이 헐떡이며 달려왔다.
달리는 그의 모습이 볼품없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지 해민은 그가 달려올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혀주고 싶어서 마주 달려나갔다.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해민이 나가는 것으 막지는 않았다.
“해민. 그대로구나.”
이스마힐이 다가오며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폐하...”
이스마힐이 의미하는 바를 해민은 알 수 있었다.
쓰러진 시간 동안 일레노이가 제 몸을 정복하였을 거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는 편이 가장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대가 황궁을 떠나는 것보다는 말이다. 어찌 생각하느냐.”
이스마힐이 말했다.
“폐하...”
“스베인에게서 얘기를 들었다. 스베인을 곤란하게 하지 말아다오. 해민. 스베인에게는 내가 약조하였다. 스베인이 말했다는 것을 그대에게 비밀로 하기로 말이다.”
“하오나.”
“그래. 약조를 어겼지. 그러니 그대가 비밀로 해 주어야 한다.”
“폐하...”
“그리한다고 말해다오. 나는 그대를 황궁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그대가 없는 시간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카란과 제르반이 번갈아가며 너를 지킬 것이다. 일레노이가 돌아온다고 해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해민. 나를 믿거라.”
“폐하... 폐하를 믿사옵니다. 허나. 폐하께서는 어찌 소인을 믿으실 수 있사옵니까. 저는 아무 것도 보여드릴 것이 없사옵니다. 소인을 믿으실 수 있는 어떤 것도 말이옵니다.”
“그대는 해민인 것으로 족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대가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내가 그대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스마힐은 해민을 바라보았다.
해민의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이스마힐의 표정에는 격정적인 그리움이 사무쳐 묻어났다.
“그대를 잃을 수는 없다. 잊으라고 하지 말거라. 그것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스마힐은 해민을 끌어안았다.
“소인도 그리 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그대는 걱정할 것 없다. 움베르트를 잡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자를.”
“폐하.”
해민은 서둘러 이스마힐의 가슴을 밀어내며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대제사장을 죽이는 것 역시 금지된 일이라 들었사옵니다. 그 일 역시 신의 저주를 부르는...”
그렇게 말하는 해민은 일레노이일 수가 없었다.
이스마힐은 해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마힐이 해민의 손을 쥐었다.
황비 마마께서 변하시기 전에는 황비 마마의 손이 따뜻하옵니다. 그리고 요요를 소중하게 여기시옵니다.
그것이 스베인이 알려준 비책이었다.
황비 마마를 알아보는 비책.
그것을 알려줄 때 스베인의 표정은 참으로 진지했다.
그 두 가지를 가지고 황비 마마를 구분하실 수 있을 테니 황제 폐하께서 황비 마마를 붙잡아 주시라 간곡하게 청하던 스베인이었다.
“해민, 나는 그 방법을 모른다. 어찌하면 그대가 그대의 몸을 지배할 수 있는지. 어찌하면 일레노이가 튀어나오지 못하게 할지 말이다. 이제는 카란이 그대와 늘 함께 할 것이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사옵니다. 폐하.”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일레노이가 너를 해칠 수도 있다. 일레노이가 그대의 몸을 지배하는 동안 그대를 죽게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폐하...”
일레노이가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마힐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레노이라면 그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꿈을 꿀 때 해민의 꿈 속에서 나타나는 일레노이는 무슨 일을 저지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을 것처럼 보였다.
“폐하. 저도 강해질 것이옵니다.”
해민의 말에 이스마힐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베인이 한 말이 맞다. 스베인도 이제 그대를 알아본다. 나도 그렇고 카란이나 제르반도, 에르모나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 같아. 그대의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 그대를 아끼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대가 의식을 잃은 동안 일레노이에게 잠식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가 그대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니 해민.”
이스마힐이 해민의 뺨을 감쌌다.
“그대의 잘못이 아닌 일로 속상해하지 말거라. 미안해하지도 말고. 그대는 그저, 우리 곁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만을 바란다.”
“폐하...”
해민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대만의 문제로 두지 않을 것이니라. 알겠느냐. 그대도 나를 믿어다오. 그래야만 한다. 해민.”
“그럴 것입니다. 그럴 것이옵니다.”
해민은 이스마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끝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는 동안 이스마힐은 해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해민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물로 젖은 해민의 눈이 빛났다.
이스마힐은 해민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를 갖겠다. 해민.”
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생각이 들 틈이 없었다.
이스마힐을 원한다는 생각.
그로 인해서 가득 채워지고 싶다는 생각.
그의 소유가 되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해민을 비집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들의 몸이 하나가 되어 걸음이 옮겨지는 동안 해민의 옷이 벗겨졌다.
이스마힐은 해민의 몸을 따뜻하게 안았고 해민의 몸에 입을 맞추었다.
해민은 뜨겁게 달아오른 몸으로 그를 갈구했다.
해민이 이스마힐을 안은 팔을 풀더니 먼저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급하게 누워 이스마힐을 기다렸다.
이스마힐은 해민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도 돌리지 않은 채 그대로 해민에게 다가갔다.
해민은 자신의 다리로 이스마힐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은 이스마힐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도 강렬했다.
이스마힐도 그것을 아는 것처럼, 주저하지 않았다.
“해민.”
이스마힐이 해민의 입술을 지분거리다가 그대로 목을 빨았다.
처음에는 부드러웠지만 나중에는 이스마힐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이스마힐의 단단해진 페니스가 해민의 사이에서 들어올 곳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해민의 애널에 닿았다.
해민은 이스마힐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이스마힐은 해민의 안으로 들어와 해민을 꼭 끌어 안았다.
해민도 이스마힐을 안았다.
사정이나 절정감을 위한 정사가 아니었다.
해민은 이스마힐로 채워지고 싶었고 이스마힐 역시 자기가 해민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그대에 대해서 들었다. 해민.”
이스마힐이 말했다.
“누구에게서... 어떤 말씀을... 말이옵니까?”
해민이 물었다.
“일레노이에게서 들었다.”
해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이스마힐은 해민이 긴장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스마힐은 해민을 향해 웃어보였다.
“그대의 신의 그림자라 하였다. 신의 빛에 의해 생겨나는 신의 그림자. 나와 두란트는 두 개의 신이 빛이었고 너와 일레노이는 한 몸에 존재하는 두 그림자라 하였다. 그대는 그 몸 속에서 눈을 뜨지 못했으니 나를 만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나를 알기는 했겠지. 그리고 그대라면. 안타까워했겠지.”
이스마힐의 해민의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천천히 그의 허리가 움직였다.
해민은 작게 헐떡거렸지만 지금은 이스마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더 관심이 기울었다.
“그대가 바꾼 것이라 하였다. 우리의 운명을. 나의 운명을. 일레노이를 따라 죽어버리는 나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대가 돌아온 것이라 하였다. 그대가 한 말.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던 거야. 해민. 너도 모른 채로 너는 네가 처음에 원했던 그 자리로 돌아온 거다.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서.”
이스마힐이 말했다.
해민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마힐의 말을 듣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모든 것이 하나하나 짜맞춘 일인 것처럼 아귀가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오랜 세월을 돌아. 그대가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대를 알지도 못하였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나를 잊지 않고 나를 다시 찾아내 준 것이다.”
이스마힐의 말에 해민은 왠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왜 떨어지는 눈물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대를 사랑한다. 해민. 다른 어떤 소원도 남지 않을만큼. 그대만을 바란다.”
이스마힐이 속삭였다.
그리고 그의 허리가 강하게 해민에게로 밀착되었다.
“흐으으읏...!”
제 몸을 관통하고 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충격에 해민은 눈을 감았다.
그에 의해 부서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를 사랑했다.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고백을 제 것으로 삼고 싶었다.
해민이 이스마힐을 밀어냈다.
이스마힐을 홍조가 한껏 오른 얼굴로 해민을 바라보았다.
해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스마힐을 밀었고 이스마힐은 해민이 미는대로 밀렸다.
해민이 허리를 세우고 앉았는데도 해민은 계속해서 이스마힐을 밀었다.
이스마힐은 결국 손을 뒤로 짚고 해민을 바라보았다.
“누우소서, 폐하.”
해민의 은근한 목소리에 이스마힐은 그제야 근심을 거두고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