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
두란트로서는 참기 힘든 굴욕이었을 거였다.
해민은 그대로 돌아섰다.
“마... 마마...”
두란트가 일어나지는 못하고 무릎으로 급히 걷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그대와 나 사이에 해야 할 말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 입을 다물거라. 입을 다물 의지가 부족하다면 내 기꺼이 도울 것이니 도움이 필요하거든 말을 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일레노이가 제 의지와 상관없이 기어이 그곳까지 와 버린 곳에 분노해서 해민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두란트는 제 앞에서 일레노이가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더 이상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해민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해민이 간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에게 엄중히 명하노라. 다시는 내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라. 절대로 말이다. 나를 이곳으로 들어오게 한 자들은 엄히 다스릴 것이다. 다시는 이곳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거리에 나가 구걸조차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황비 마마.”
간수들은 해민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해민도 그들이 자신을 막기 힘들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반드시 그리해야 할 것이니라. 필요하다면 내가 지금 내가 한 말을 서면으로 써 줄 것이니라. 내가 친히 너희에게 이 말을 하였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문서이니라.”
그리고 해민은 둘러서 있던 자들에게 종이를 가져오도록 했다.
다시 살펴보았지만 해민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에르모나도, 제르반도, 카란도 없었다.
해민은 점점 두려움이 밀려들려고 하는 것을 참고, 곁에 있던 간수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 별궁으로 가서 에르모나와 카란을 데리고 오너라. 카란을 발견하지 못하면 제르반이라도 좋으니라. 그들이 별궁에 없으면 대전으로 가서 찾아오너라. 속히 해야 할 것이니라.”
“예, 황비 마마.”
간수는 다른 때와 다른, 황비 마마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그대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에 하얗게 질린 얼굴의 에르모나가 카란과 함께 달려왔다.
두 사람은 해민에게 어찌 이곳에 계시냐는 말을 묻지 않았다.
그들 역시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려고 했지만 해민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카란은 놓치지 않았다.
“소신이 모시겠사옵니다. 황비 마마. 이제 돌아가시지요.”
카란이 해민의 곁으로 와서 나직히 그렇게 말을 했을 때에야 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솟구치려 하는 것을 끝내 참을 수가 없었다.
복도가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에르모나. 조금 물러서서 오너라.”
“예, 마마.”
에르모나가 잠시 걸음을 멈춘 동안 카란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황비 마마가 저에게만 은밀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카란.”
해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황비 마마. 소신은 온전히 폐하와 마마의 것이옵니다. 어떤 것이든 하명하셔도 되옵니다.”
카란이 말했다.
해민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폐하를 모실 수 없게 될 것 같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마마...!”
카란의 말이 목구멍에 막혀 있다가 툭 튀어나오듯이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곳에 왜 왔는지 나는 전혀 모르겠다. 기억에 전혀 없는 일이다. 내 몸을 내가 통제하지 못하고, 요즘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마마...”
“카란. 폐하의 곁을 떠나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폐하를 상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리된다면. 나는...”
해민은 참람해서 그 말을 차마 잇지도 못했다.
카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기가 생각하던 것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비 마마는, 다른 영혼에게 잠식당한 것 같아 보였다.
그 생각이 하도 황당해서 다른 이에게 말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황비 마마에게서 순간순간 이전의 황비 마마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의 황비 마마가 카란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적대감이 가득했고 카란을 떼어놓을 궁리를 하고 카란에게 함부로 굴었다.
그때의 황비 마마는 늘 조급하고 마음에는 여유가 없었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포악하게 굴었다.
몇몇 사람들은 황비 마마가 연회 때문에 날카로워진 거라고 생각했지만 카란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황비 마마의 지근 거리에서 황비 마마를 모셨던 카란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황비 마마가 어떤 마음으로 황제 폐하를 사모했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따뜻했는지, 헤르만 제국과 제국민을 얼마나 사랑했고 제국을 향해 얼마나 큰 뜻을 키워나가고 있었는지 카란은 알고 있었다.
연회로 마음이 분주해진다고 해서 보일만한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황비 마마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카란은 그렇게 믿었다.
카란은,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모시던 황비 마마인 것을 알았고 황비 마마가 지금 얼마나 참담한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마마. 제가 모시겠사옵니다. 마마께서 가시는 곳으로 따라갈 것이옵니다.”
카란이 말하자 해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러지 말거라. 그대는 폐하의 곁에 있어야 한다. 그대와 제르반이 폐하의 곁에 있다면 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있을 것이니라.”
“마마...”
“카란. 나는... 폐하를 만나게 돼서 내가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다. 그 분을 모른 채로 살았다면 지금의 내 마음이 이렇게... 아니다. 듣지 못한 것으로 하여라. 그대의 마음을 어지럽혀서 미안하구나. 오늘로 잊거라. 카란. 생각은 깨끗하게 하고 폐하를 지켜주어라. 나를 위해서 그리 해 주어라. 카란. 마지막 부탁이며 명령이 될 것이다.”
“그리할 것이옵니다. 마마.”
“폐하께는 내가 아뢸 것이니라. 그 전에는 폐하께 말씀 올리지 말거라. 카란.”
“그리하겠나이다. 황비 마마.”
“고맙다. 카란. 제르반에게는 따로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으니. 내가 떠난 후에 그대가 제르반에게 말을 해 다오.”
“황비 마마.”
목이 멘 소리로 카란이 말했다.
“황비 마마께서는 제가 알아왔던 그 어떤 분보다도 고귀한 분이시옵니다. 저 역시 그렇사옵니다. 황비 마마. 황비 마마를 알게 되고 모실 수 있게 되어 행복한 줄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제가 어떤 분과 헤어지게 되고 어떤 분을 잃게 될지 생각하니, 황비 마마를 모르는 것이 더 나았겠다고 생각되옵니다.”
해민은 카란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거기에서 말을 멈추었다.
별궁으로 돌아간 해민은 이스마힐이 입을 옷에 그림을 그리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하니 욕심이 생겼다.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으로 남겨주고 싶었다.
해민은 아르마리안에게 주기로 약속한 그림을 먼저 그렸다.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떴을 때 방안이 온통 어지럽혀있고 옷에 먹물이 함부로 튄 것을 보고 해민은 조용히 에르모나를 찾았다.
그리고 자기가 말한 시간이 될 때까지는 문을 밖에서 잠그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건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말했다.
“폐하께서 찾아오시면 어찌해야 할지요, 마마.”
에르모나가 물었다.
“돌아가 계시면 내가 바로 찾아뵈올 것이라 말씀드리거라. 그때까지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느니라.”
그리고 해민은, 엘리노이가 다시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림을 그렸다.
아르마리안에게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그림을 그리고 해민은 드디어 이스마힐의 옷과 마주했다.
이스마힐이 봤던 그림 위로 붓이 움직였다.
신의 빛.
헤르만 제국의 지존이며 자신의 영웅.
이스마힐을 떠올리며 해민은 헤르만 제국의 영광과도 같은 기운을 그려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