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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보이지 않던 초조한 기운이 눈에 가득 깃들었다.
폐하... 폐하는 어디에 계시는가. 두란트. 그 분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 분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몸의 주인은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두란트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몸이 무거운 사슬로 꽁꽁 묶인 듯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의 주인은 혼미해지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또 이렇게 사라져버릴 수는 없다고 부르짖으려 했다.
다시 또 뺏길 수는 없다고, 다시 그렇게 되지는 않겠다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목구멍이 조여지고 목소리는 오히려 안으로 파고 들었다.
어떤 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눈이 감겼다.
감은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으으으으으... 폐... 하...”
해민의 연약한 음성이 들렸다.
해민은 곁에서 이스마힐의 손이 닿기를 바라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닿지 않았다.
‘폐...하...’
악몽은 집요했다.
어둠 속에서 살기 띤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자의 정체를 해민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자기 자신인가 하였다.
자신의 모습이 눈 앞에 보인다면 자신은 영혼이 되어 육체를 떠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란한 얼굴로 제 앞에 마주선 자를 바라보다가 해민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일레...노이...’
차가운 눈동자가 해민의 몸을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았다.
해민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두려움을 느꼈다.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일레노이가 말했다.
해민은 멍하니 그의 말을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있을 곳이 아니란 말이다!”
일레노이가 다시 한 번 사납게 외쳤다.
맹수의 포효와 같은 그 소리에 주눅이 들었지만 해민은 작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여기는.
여기는 이스마힐의 곁이니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해민은 일레노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더 이상 그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일레노이에게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폭설이 내리는 설원의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선 것처럼 살을 찢을 것 같은 추위가 느껴졌다.
생생한 고통이 느껴지며 몸이 잘려나가는 두려움에 시달렸지만 해민은 눈을 감은 채 단 하나의 얼굴만을 떠올렸다.
‘이스마힐. 내가. 지켜주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나를 기다릴 테니까... 폐하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 이제는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그때에 해민은 흔들리지 않을 믿음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떴을 때 해민에게는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자신의 별궁.
자신의 침실이었다.
하아아아아아...
더운 입김이 보였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이스마힐?’
해민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도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침대 옆이 푹 가라앉아 있었다.
그곳을 만져보던 해민의 눈에 익숙한 것이 들어왔다.
해민의 요요였다.
그게 나중에 도움이 되는 날이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카란과 함께 기대를 하면서 늘 연습을 하는, 해민의 무기.
거기에 흙이 묻어 있었다.
‘어디에서 떨어졌지?’
해민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꿈도 다 꾸었다고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은데, 하면서 해민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묶었다.
‘그림. 그렇지. 그림을 그려야 되지. 아르마리안이 그것도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했지. 이스마힐이 입을 옷. 그리고 내가 입을 옷.’
해민은 차근차근 자기가 할 일을 생각했다.
황후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연회이지만 황후 대신 자기가 이스마힐의 곁에서 사신들을 맞을 거였다.
그리고 황태자에 책봉될 스베인도 그들의 곁에서 같이 그들에게 얼굴을 알릴 터였다.
중요한 날, 중요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 황후 대신 황비가 서 있는다는 것만으로도 해민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것을 해민은 알고 있었다.
아르마리안의 말이 옳을 것이다.
얕잡아보일 필요는 없었다.
해민은 옷을 펴고 그 위에서 자리를 잡았다.
한 장의 깨끗한 화폭 같은 옷 위로 붓이 힘차게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이스마힐은 제르반과 함께 있었다.
제르반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싫었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사태를 대비해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황비가 혼자 있다. 할 말이 있거든 어서 하거라.”
이스마힐이 재촉하자 제르반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 황비 마마는...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다. 지금은 황비 마마가 변했고 폐하께 성심을 다 하고 계시는 것 같사옵니다만. 소신은 걱정이 되옵니다.”
“무엇이 말이냐.”
“약을... 그것은 아주 위험한 것이고... 그리고 황비 마마께서는 전에도 폐하께...”
망설이며 말하는 제르반을 바라보다가 이스마힐이 돌아섰다.
“폐하...”
“더이상 말할 것 없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알겠다. 그러니 더 말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느니.”
“폐하...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너는 그것을 말하여야 했다. 나도 들어야 하는 것이고 들었다. 그러니 되었다.”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폐하.”
제르반이 물었다.
“제르반.”
이스마힐의 목소리가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기를 갈랐다.
“너에게, 그리고 헤르만 제국의 제국민들에게 미안한 말이나. 나는 황비를 믿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미안하다.”
“어찌 미안하다 말씀하시옵니까. 폐하께서 누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씀이옵니까.”
제르반은 이스마힐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내 대답은 그것이다. 제르반. 나는 해민을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해도 되겠느냐."
"그리하옵소서. 폐하. 제가 곁을 지킬 것이옵니다. 폐하와 황비 마마를, 소신의 목숨을 다 하여 지켜드릴 것이옵니다."
“고맙구나. 제르반.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제르반은 이스마힐을 잡지 못했다.
“제르반.”
걸음을 옮기던 이스마힐이 우뚝 멈춰서서 그를 불렀다.
“예, 폐하.”
“움베르트를 찾아가보거라. 움베르트가 사특한 짓을 하지 않았는지 제사장들에게 상세히 묻거라. 아무래도 황비가 걱정이 된다.”
“예, 폐하.”
제르반은 저에게 다시 명이 내려진 것이 기뻤다.
지체하지 않고 제르반이 몸을 움직였고, 소리도 없이 그의 모습이 곧 사라졌다.
이스마힐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해민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스마힐은 해민이 놀라지 않도록 해민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하얀 옷 위에 산천이 펼쳐졌다.
이스마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지만 평화로워보였다.
그곳에서라면 어떤 근심도 없을 것 같았다.
해민이 잠시 손을 멈추고 붓을 놓았을 때 이스마힐이 해민의 앞으로 다가갔다.
“오셨사옵니까.”
해민이 이스마힐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자는 동안 옆에 계셨사옵니까. 폐하.”
“그랬다. 해민.”
“그런데 어디에 가셨었사옵니까?”
“잠시 나를 찾아서 나갔다 왔느니라. 나를 찾았느냐.”
“예. 온기가 남아있어 폐하께서 곧 돌아오실 거라 생각했사옵니다.”
“해민.”
“예.”
“고맙다.”
“무엇이... 말씀이옵니까.”
“그대가 그대인 것. 그것이 고맙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폐하.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사옵니까.”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는 해민을 바라보며 이스마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해민을 가득 끌어안다.
“부탁이다. 해민. 사라지지 마라.”
“제가 어디로 가겠사옵니까, 폐하. 무슨 일인데 그러시옵니까, 예?”
바르작거리며 고개를 들려고 하는 해민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스마힐은 제 가슴에 일어나는 불안의 원인을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게 말이다.
그대가 어디로 간다고 내가 이렇게 불안한 것이냐.
============================ 작품 후기 ============================
비보호: 추천은 힘이 됩니다~~^^
호짱: 그렇게 써놓고? 양심은 있냐?
비보호: (움찔)
(지 작품 패러디하고 노는 중~~)
아참. 저 평점 4점대 좀 되찾게 해 주세요~~ 3점대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