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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52화 (5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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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저물 무렵, 라비엔이 그들을 찾아왔다.

    스베인을 데려다 주어야 할 거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스마힐은 라비엔에게 이미 정해진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고 했다. 토비어스 공과 할 말이 있다. 그러나 네가 먼저 알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구나. 스베인은 황궁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오나. 폐하...”

    라비엔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이스마힐이 말을 이었다.

    “내가 낳은 아이는 아니나 스베인은 내 아들이니라. 곧 모든 절차를 갖출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과정을 모두 마치기 전까지는 후견인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하옵니다. 폐하.”

    라비엔은 이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후견인이 제대로 보호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느냐. 라비엔. 그런 것들이 드러났을 때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라비엔은 말을 하지 못했다.

    혹시 스베인이 저 조그만 입을 경솔하게 놀린 것은 아닌가 해서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지금껏 키워오셨던 아버님께서 많이 서운해하실 것이옵니다. 이리 하시는 법은 없사옵니다. 황태자로 책봉하신 것도 아니지 않사옵니까.”

    “내가 왜 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냐. 진정으로 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스마힐이 말했다.

    황제의 사소한 일을 돕는 시종이라고 해서 라비엔을 얕잡아 본 것은 아니었다.

    신분이 고귀한 자들이 황제의 잡무를 맡아 해 주는 일은 흔했고 이스마힐도 라비엔이 토비어스의 아들이라는 것과 황후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의 가까이에 있으면서 라비엔이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이스마힐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비엔의 눈빛에, 채 감춰지지 않고 묻어나는 정념.

    그런 것까지도 이스마힐은 알고 있었다.

    라비엔은 고개를 숙였다.

    사사로이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났다가는 언제 호위무사들에게 끌려가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황실은 평화로워보였지만 황제의 측근들은 기민하게 움직였고 악의 싹을 주저없이 도려냈다.

    그런 와중에도 오판은 없었다.

    무고한 피해자가 생겨나는 일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신기한 일이라고 라비엔은 생각했다.

    함께 황제 폐하의 시중을 들던 자 중에 두란트의 측근들이 사라졌다.

    가담 정도에 경중의 차이는 있었으나 황제 폐하에 대한 충심이 없는 것은 분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후 돌아오지 않았고 그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라비엔은 지금 자기가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토비어스 공에게는 내가 사람을 보낼 것이니라. 스베인은 내가 돌볼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잘 이를 것이다. 그러니 너도 너무 걱정을 하지는 말거라.”

    라비엔은 스베인을 바라보았다.

    입단속을 시키고 싶었으나 그 눈빛을 이스마힐에게 걸렸다.

    “황태자가 될 아이이니라. 앞으로는 눈빛을 조심하거라. 라비엔. 스베인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 것 또한 명한다. 이 나라의 지존이 될 자에 대한 너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면 응당 그에 따른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거라.”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래. 나에게 조아리듯 스베인에게도 그리 하거라. 네가 외척이 되어 알량한 권력을 잡고 휘두를 수 있게 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머릿속에서 도려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비엔. 토비어스 공에게 더 이상의 고난을 안겨주는 것은 너도 싫을 것이 아니냐. 딸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판국에 아들마저 그리 된다면 토비어스 공은 얼마나 슬프겠느냐.”

    그것은 도발이었다.

    정상적인 신하들이라면 황제 폐하의 말에 대해서 그리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라비엔과 토비어스는 달랐다.

    라비엔은 소식을 들고 분주히 움직였고 토비어스는 사람들을 모아들였다.

    스베인이 황태자로 책봉된다는 소식은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지만 라비엔을 대하는 태도로 보았을 때 외척을 확실하게 배제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토비어스는 지금 실기하면 영원히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없을 거라는 것을 느꼈다.

    일단 그렇게 되자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게 되었다.

    ***

    “사신단이 도착하였다 하옵니다.”

    제르반의 말을 듣는 이스마힐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때는 이스마힐도 토비어스의 간계에 대해서 알 수밖에 없었다.

    황성의 주위로 사신단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사신단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온 것이냐고.

    그거야말로 자기 얼굴에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꼴이 되는 거라는 것을 이스마힐은 알았다.

    생각을 할수록 어이가 없고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나 방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광대처럼 사신단과 외척들의 눈 앞에서 웃어주기나 해야 할 판이었다.

    황궁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연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미 도착한 사신단도 있었다.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헤르만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의 사신단은 먼저 도착을 해서 이스마힐을 알현했다.

    그리고 외교적인 수사를 남발하며 두 나라의 관계를 앞으로도 더욱 공고히 하기를 바란다는 말들을 했다.

    연회에 초대해주시고 성대한 연회를 준비해주시는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황후 마마가 큰 병에 시달렸다는 말에 걱정이 많았었는데 쾌차하셨다는 말을 들어 안심했다는 말도 이어졌다.

    황후 마마의 축하연에서 황후 마마의 강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면 자기들도 크게 기쁘겠다는 말은 토비어스의 조언을 받아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이스마힐은 그때에야 토비어스가 벌인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황제의 인가도 없이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집에 찾아온 손님들 앞에서 집안 싸움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스마힐도 알고 있었다.

    계략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황실의 재정이 한층 더 어려워질 판이었다.

    연회에 쓰이는 비용이 막대한데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잔뜩 기대를 하고 온 사신단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이스마힐은 연회가 다가올수록 신경이 곤두섰다.

    날카로워진 제 모습을 해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이스마힐은 해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해민이라면 자신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 해민이 아니고는 도무지 도움을 구할 사람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해민도 카란을 통해서 요사이 돌아가는 일이 어떤지 알고 있었지만 이스마힐이 먼저 찾아오거나 도움을 구하지 않는 일에 자기가 나서기도 무엇해서 여러 모로 방도를 찾으려 애만 쓰고 있었다.

    이스마힐이 해민을 찾은 것은 늦은 밤이었다.

    이스마힐은 안으로 들려 하지 않고 후원이나 같이 거닐지 않겠냐며 해민을 불렀다.

    해민은 지체하지 않고 이스마힐에게 나갔다.

    이스마힐은 며칠동안 고민이 깊었던 듯 형색이 말이 아니었다.

    해민은 이스마힐의 마음 고생이 완료형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다.

    “폐하.”

    황권에 정면으로 도전을 한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그 오만방자한 행동을 처단할 수가 없었다.

    사신단의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억지로 약속을 해야 하는 이스마힐이 딱해보였다.

    “그들의 요구는 무엇이라 하옵니까. 사신단이 그리 크게 꾸려졌다면 단순히 축하연을 보려고만 온 것은 아닐 텐데 말이옵니다.”

    해민이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어느 나라에서는 사신단과 함께 대규모의 상단도 같이 들어와 있었다.

    이스마힐은 자기가 파악하고 있는 것들을 말해 주었다.

    “그러면 그 자들과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준비를 시키시지요. 폐하께서 원치 않는 판이 만들어졌지만 기왕 판이 만들어졌으면 그 판을 이용하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헤르만 제국에게 유리한 약조들을 얻어내시옵소서. 각국의 상황에 능한 자들을 찾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구나...”

    이스마힐은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은 생각에 먼 곳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폐하.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후작 부인이라면 각 자리에 누가 적당한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이야기는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이스마힐을 보기 전까지는 후작 부인에 대해서는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허나. 후작 부인이 나를 도우려 하겠느냐.”

    그리 묻던 이스마힐의 시선이 해민에게로 옮겨지더니 그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림이더냐.”

    그러자 해민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말을 한 것은 아니오나. 소인이 후작 부인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만나서 얘기를 하는 김에 그동안 소인이 그림 그렸던 옷들을 더 팔 수도 있을 것 같사옵니다.”

    “해민. 괜한 자신감을 가졌다가 상처 입지나 말라고 말을 하고 싶으나.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이라면 그대의 옷을 살 것이다. 참으로 묘안이로구나.”

    이스마힐의 얼굴에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며, 수행하던 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리 될 거였으면 진작 황비 마마를 찾아오자고 자기들이 먼저 청할 것을 잘못하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토비어스 공에게서도 찬조금을 받아내시지요.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이라면 기꺼이 찬조도 하고 싶을 것이옵니다. 가문이 흔들릴 정도로 말이옵니다.”

    해민이 씽긋 웃으며 말을 하자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는데.

    정말 그렇게까지 하고도 별 탈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비어스 공은 폐하께서 아무리 많은 돈을 요구해도 그것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돈은 토비어스 공을 따르던 자들이 만들어줄 것이옵니다. 신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단단한 재력을 기반으로 서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옵니다. 학문의 깊이와 인품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 자는 근래에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그들에게, 폐하를 기만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것은 사신단이 돌아가고 난 후, 차후에 하실 일이옵니다.”

    해민의 말에 이스마힐은 놀란 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대의 말을 새기겠다.”

    “발 빠른 말을 보내어 내일 후작 부인을 입궁하게 하여 주시지요.”

    “그렇구나. 그것이 급하겠구나.”

    이스마힐이 고개를 돌리자 시종장이 허리를 숙이고 곧바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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