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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45화 (4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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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인은 그 시간이 너무나 지루했지만 외할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같이 숨소리를 죽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탑에 갇혀서 죽을 거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너무 자주 들어왔고 실제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실에 몇 시간씩 갇혀 있었던 적도 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힘겨루기를 할 때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

    황후 마마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외할아버지였지만 외할아버지는 절대로 누구한테도 그 사실을 말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외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그때는 황제 폐하께 그 일을 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베인은 자기가 왜 그래야하는지 알지 못했고 외할아버지가 누구를 두려워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단지, 황후 마마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이고 자기는 나중에 헤르만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베인은 그 조그만 머릿속에 간직했다.

    황후 마마가 어머니인데 왜 황제 폐하가 아버지가 아닌지는 늘 궁금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왜 황후 마마가 아닌 다른 사람을 어머니라고 불러야하는지도 궁금했다.

    그럴 때마다 외할아버지는 그 조그만 머리로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알려주는 것이나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말했다.

    황후 마마가 저택에 찾아왔을 때 스베인은, 시험 삼아 황후 마마를 어머니라고 불러보았다.

    처음에는 입모양으로만 어머니라고 해보다가 나중에는 소리를 내어보았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몇 시간동안 스베인은 지하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빛이 들 틈도 없는 그곳에서.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와 쥐의 소리를 들으면서, 쥐와 벌레가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기만 바라면서 숨을 죽였다.

    울고 싶었지만 울음 소리를 듣고 쥐가 와서 자기를 뜯어먹을까봐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했다.

    살에 닿는 찬 공기도 무서웠지만 견뎠다.

    지하실에 갇혀있다가 나왔을 때 외할아버지는 스베인에게 말했다.

    다시 한 번 그런 멍청한 소리를 했다가는 다음에는 영영 꺼내주지 않을 거라고.

    스베인은 그 말을 뼛속 깊이 새겼다.

    황후 마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확실하게 알게 된 느낌이었다.

    스베인은 혹시라도 자신의 숨소리가 외할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해서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대로 자기가 그곳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토비어스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침묵이 사람들의 목을 조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한동안 그것을 즐겼다.

    익숙한 권력이었다.

    권력.

    그것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하는 것이 좋을지 말들을 해 보거라.”

    토비어스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토비어스의 가까이에 앉아있던 남자에게로 향했다.

    차갑게 빛나는 이마 아래에 긴 속눈썹이 짙게 내려져 있는 것이, 마치 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졸고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거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라비엔.

    토비어스의 자랑인 아들이자 황후의 남동생인 그는 스베인이 황위에 오르면 황후를 대신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휘두르게 될 인물로 점쳐지고 있었다.

    남색을 하는 이스마힐의 눈에 들 수 있을까 하여 토비어스가 일찍부터 이스마힐의 시종으로 들여보냈지만 이스마힐은 라비엔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라비엔이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이스마힐을 연모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모두가 라비엔을 토비어스의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끝없는 욕심이 아들을 망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라비엔의 나이는 고작 열 아홉이었다.

    그런데도 라비엔은 궁에 갇힌 채 늘 이스마힐의 주변에 머물면서 그를 수행했다.

    그런 삶이 행복할 리가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생각이 깊은 라비엔이 그럭저럭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을 했지, 라비엔이 쾌재를 부르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나긴 밤.

    이스마힐이 일레노이의 냉대를 받고 잠못 이루다가 혼자서 토정을 하려고 할 때 이스마힐의 페니스를 흔들어주는 사람이 라비엔이었다.

    이스마힐이 그를 찾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일로 이스마힐이 사람을 찾으면 언제나 라비엔이 그 자리로 나갔다.

    라비엔에게 허락된 것은 이스마힐의 페니스를 잡고 흔드는 것이 전부였고 옥체의 다른 곳을 만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흥분 상태에서 황제 폐하가 관대해 질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스마힐의 복부를 쓰다듬어 본 적이 있었지만 냉랭한 말로 치우라는 황명이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를 사정시킬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라비엔은 기쁨으로 여겼다.

    그것은 그가 혼자서만 알고 누리는 기쁨이었다.

    그런 라비엔은 가문의 지략가로 통했고 가문에 위기가 닥칠 때는 모두가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라비엔은 늘 앞을 내다보았고 라비엔이 내놓은 계책은 시기에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토비어스가 주관하고 있는 회의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토비어스나 스베인보다 자연스럽게 라비엔에게로 향했다.

    “황후 마마를 뵙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황후 마마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황의도 황명을 엄히 받은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 황후 마마의 병세가 위중하고 전염될 가능성이 커서 황후전에 출입을 금한다고만 할 뿐, 실제로 황후 마마께 무슨 변고가 생긴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토비어스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가 다 아는 말이었다.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라비엔은 잠자코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혈기 왕성하시고 제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황제 폐하께 어떤 결정을 내리시건 간에 그 일은 모두의 지지를 받아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근간에 사특한 일레노이를 가까이 하고 계시다가 별궁이 불에 탄 이후에는 전각까지 옮겨주시고 늘 가까이 두고 계신다. 만에 하나 이 일이.”

    토비어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스베인의 작은 귀가 움직인 것 같았다.

    스베인은 귀를 쫑긋 세우고 어느새 외할아버지가 하는 얘기에 빠져들었다.

    어머니가 위독하신 건가?

    어머니가 갇히신 건가?

    스베인은 외할아버지의 입에서 다음 말이 빨리 나오지 않자 외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황후 마마의 폐위로 번질 때를. 우리는 대비해야 한다.”

    토비어스가 말하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짙어졌다.

    “별궁이 불 탄 일 때문이옵니까. 하오나 그것을 황후 마마께서 시키신 거라는 게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폐위라니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아무 증거 없이 그리 하실 수는 없사옵니다.”

    “사람이 불을 지른 것이 아니라 우연히 불이 붙은 것일 수도 있지 않사옵니까.”

    “먼저 범인을 잡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옵니까.”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쓸만한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토비어스는 라비엔을 바라보았다.

    라비엔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깎아 만든 조각상 같은 아들의 얼굴은 언제나 토비어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고 토비어스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외모보다 더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라비엔의 지혜였다.

    토비어스는 이번에도 라비엔이, 이 위기를 빠져나가게 해 줄 계책을 갖고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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