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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가 불에 타다니요..."
"보는 것과 같소."
“불이 난 원인은 찾았다고 하옵니까.”
“열심히들 찾고 있으니 곧 알아낼 것이오.”
이스마힐의 말을 듣고 황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하나하나의 동작이 모두 계산된 연기라는 생각이 들자 이스마힐의 표정은 점점 싸늘하게 굳어졌다.
“황비는 무사하옵니까.”
황후가 물었다.
“그럴 것이오.”
“폐하. 황비는 적을 많이 가지고 있사옵니다. 폐하를 사모하는 대소신료들이 황비를 좋지 않게 생각하옵니다. 황비가 그동안 폐하께 얼마나 패악하게 굴었사옵니까.”
“나도 알고 있소.”
“폐하. 폐하께서는 성군의 자질을 갖고 계시고 그동안 성군의 길을 걸어오셨사옵니다. 폐하께서 저지른 사소한 단 하나의 실수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황비를 가까이 하신 일일 것이옵니다. 황비가 어찌 처형을 면했사옵니까. 예언서와 대제사장이 받은 계시 때문이 아니었사옵니까. 그런데 이제 그 예언서가 불에 타버렸다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것이옵니다. 대소신료들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 생각하시오."
"그러하옵니다. 폐하. 예언서 때문에 그 목숨을 부지한 황비에 대한 동정을 거두셔야 할 때가 아닐까 하옵니다. 폐하께서 계속 황비를 두둔한다면 마침내는 헤르만 제국의 제국민들과 대소신료들의 마음이 폐하께서도 떠날 것이옵니다.”
황후가 말했다.
이스마힐은 웃음을 지었다.
조금은 그런 마음도 있었다.
자신의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는 마음.
제르반이 가져온 소식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해민이 잘못 알았던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황후의 입에서 예언서니, 황비의 목숨이니 하는 말들이 조금도 틀리지 않고 나오는 것을 듣고 있으려니 슬픔이 느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신기한 것은, '폐하의 잘못이 아니니 성심을 굳건히 하시'라는 해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거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황후가 아니라 해민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거쳐야 할 절차였다.
“내가 황비의 일을 어찌 처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나는 이미 황비를 용서하기로 하였소. 대소신료들 앞에서 그리 표명하였소. 대소신료들 앞에서 표명한 사실을, 내가 다시 내 입으로 번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사안이 중차대한 일이라면 그렇게라도 하셔야 하옵니다.”
“사안이 중차대하오?”
“당연한 것이 아니옵니까. 폐하. 예언서가 불에 탄 것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시옵니까.”
황후는 어린 아이를 어르려는 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언서가 불에 탄 것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느냐. 재미있는 질문이군. 황후는 뭐라고 생각하시오.”
“폐하. 어이하여 그러시옵니까. 영민하신 폐하께오서 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그리 말씀을 하시옵니까.”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알려주오. 황후.”
“폐하. 이제는 용단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황비를 폐하시고 탑에 가두셔야 하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정을 베풀지 마시고 처형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황후의 얼굴은 참으로 낯설어보였다.
이스마힐은 그 얼굴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황후는, 황제가 뭔가를 알고 있는가 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지금에 와서 흔들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을 말해 드리리다. 황후.”
이스마힐이 말했다.
황후는 이스마힐의 어조가 바뀐 것에 놀랐다.
자신의 앞에서는 그런 어조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어조는 이스마힐이 신료들을 꾸짖을 때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예언서가 불에 탄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어떤 불충한 놈이 내 황비의 별궁에 불을 질렀다는 의미요. 알겠는가. 내가 아꼈다는 이유로 내 황비를 죽이려고 별궁에 불을 놓았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이 책이 이 꼴이 되었지. 그곳에 황비가 있었다면 황비도 이리 되었을 것이다. 예언서가 불에 탄 것이 무슨 의미냐 물었느냐. 황비를 대신해서 예언서가 죽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황비의 목숨을 노린 불충한 자가 황비 대신 예언서를 죽였다는 것이다. 예언서를 죽이고 불에 태운 것은 그 자이니 마땅히 그대는 그 자의 죄를 논하여야 했다. 아니 그러한가. 황후.”
황후의 동공이 크게 퍼졌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지금 이스마힐이 말하는 것은 황후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라 죄인을 추국장에서 다루는 것 같은 말투였다.
“폐... 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그것은 당연히 선행되어야 할 문제이오며 소첩이 그리 말하지 않은 것은,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황후. 그대에게 조금이라도 충심이 있다면.”
이스마힐의 말에 황후가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살 길이 열리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 입을 다물거라. 그대의 안위보다 성심의 안녕을 원한다면 그대는 입을 닫아야 할 것이다.”
“폐, 폐하.... 성심의 안녕을 원하옵니다. 폐하. 어찌 소첩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시옵니까.”
황후는 다급하게 말했다.
제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듯 황제에게 다가오려 하는 것을 보고 이스마힐은 차갑게 손을 들어 거절했다.
“정녕 내가 그대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였는가. 내가 그것을 꿰뚫어보아서 놀란 것은 아닌가.”
“폐하. 그리 말씀하지 마옵소서. 소첩은 지금까지 폐하와 헤르만 제국을 위해서만 살아왔사옵니다. 폐하께 이리 대우받을 이유가 없사옵니다. 폐하!”
“이제는 나를 겁박하려 하는 것인가. 황후. 그대의 아버지와 오라비들이, 그리고 그대의 친척들이 그대를 지켜줄 거라 생각하여 그러는 것인가.”
“폐하. 소첩은 폐하의 처이옵니다. 제가 왜 그런 일을 하겠사옵니까.”
황후는 이제 눈에 눈물을 담아가며 말했다.
그런 황후를 바라보며 이스마힐의 머리는 더욱 차가워졌고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눈물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이스마힐은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해민이 제 앞에서 흘리던 눈물을 보았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곱고 소중했는지, 자기만 의지하는 아이가 자기에게 달려와 안기는 것처럼 감격스럽더니 황후의 눈물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추하게 여겨져 이스마힐은 고개를 돌렸다.
“카란. 황후 마마께서 아직 이해가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니 어제 잡아들인 자가 실토한 것을 알려드리고 황후전으로 모시거라. 황후전의 경계를 강화하고 아무도 들고 나가지 못하게 하라.”
이스마힐이 말하자 황후의 눈이 공포와 경악으로 커다랗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