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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35화 (3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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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사옵니다. 황비 마마. 황비 마마의 새 처소가 될 전각은 대전과 아주 가깝사옵니다. 그러니 언제든 폐하를 찾아뵈어도 될 것이고 그러면 저는 동시에 두 분을 같이 지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제르반이 말하자 해민이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런 뜻이었냐고 물으려는 표정이었다.

    “언젠가는 그리 될 것이다. 그리 머지 않은 시간에 말이다. 그러나 그 전에는 내가 말하였던 대로 잠시 그대가 황궁을 떠나 있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그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그 시간을 길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가 없이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그때를 위해 제르반에게 익숙해지거라. 제르반도 그대에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해민은 이스마힐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마힐은 제르반을 내보냈다.

    “그럼 이제. 짐을 혼자 있게 해 주거라.”

    이스마힐이 말하자 해민이 기운차게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이제는 그의 앞에서 책을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아예 책을 배에 대고 그 위에 넓은 끈을 대고서 이스마힐의 앞에 서서 끈을 묶어 달라고 대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스마힐은 재미있다는 듯이 기꺼이 끈을 묶어 주었다.

    “그럼 황비. 좋은 하루를 보내거라.”

    “예, 폐하. 폐하도 부디 성심을 굳건히 하옵소서.”

    “그래. 그러마.”

    해민이 떠나고 나자 이스마힐의 표정은 금세 굳어졌다.

    그리고 시종장을 위시해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불러들였다.

    이제부터는, 가면을 쓴 위선자들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만날 준비를 해야 했다.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고, 특히 황후에 대해서 생각하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스마힐은 해민에게 넘겨준 제르반을 금방 다시 빌려야 했다.

    제르반은 밤 사이에 추가로 알아낸 소식을 이스마힐에게 전했다.

    황후가 양자로 들이려고 했던 스베인이 황후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이 아니라 황후가 두란트에게서 낳은 아들이라는 말을 전하면서 제르반은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소식을 전하면서 제르반은 이스마힐이 저에게 화를 쏟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스마힐은 오히려 머리가 차게 식으며 가슴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르반.”

    “예, 폐하.”

    제르반은 황제 폐하의 성심이 얼마나 상하였을지 감당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이스마힐의 말을 기다렸다.

    “황비의 말대로 하는 것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런데도 나는 그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전부.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 같았다.”

    “폐하.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그런데 이제. 그 말을 듣고 나니 말이다. 내 마음이 후련해지는구나. 마지막 미련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황비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겠다. 이제는 황비의 말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폐하...”

    “그럴 것 없다. 제르반. 고개를 들거라. 그리고 일어서거라. 지금부터는 아주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제르반 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소리 없이, 이스마힐이 하는 말을 들었다.

    거대한 변화가 시작될 참이었다.

    ***

    새로운 처소에 당도한 해민은 에르모나에게 목욕물을 받아달라 말하고 책을 꺼냈다.

    책을 펼쳐든 해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없...어? 사라졌어? 글자가 모두? 왜...?’

    해민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책이 타서?”

    해민은 자기가 큰 소리를 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허둥댔다.

    몇 번을 다시 넘겨봐도 마찬가지였다.

    책이 타서 글자가 사라진 거라면 이스마힐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 글씨들이 보이지 않았어야 했을 텐데 그때에는 글씨가 있었다는 생각에 해민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에르모나. 별궁으로 가 봐야겠다.”

    “별궁에 말씀이옵니까? 아직 잔해가 다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거길 왜 가시려고 하시옵니까. 위험할 수도 있사옵니다, 황비 마마.”

    에르모나가 말하자 제르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잔불이 남아 있사옵니다.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사옵니다. 이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사오나 아무래도 오래 전부터 준비를 했던 것 같사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별궁을 전소시키려면 보통의 재료만 가지고는 되지 않사옵니다. 불을 키우고, 한 번 붙은 불이 잘 꺼지지 않도록 하는 재료가 쓰였다는 판단 아래, 그것이 유통되는 경로를 조사하고 있사옵니다. 마마.”

    제르반이 말했다.

    백린 같은 것일까?

    이 시대에도 그런 것이 만들어지나?

    우선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자기가 하려는 것은 백린이 이 시대에 만들어지는지, 어떤 경로로 유통되었는지 하는 것들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별궁에 책이 남아있는지, 거기에는 글자가 남아있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해민은 제르반을 바라보았다.

    “책을 볼 수 있겠소? 탔더라도 상관 없소.”

    “그것은 폐하께 가져다 드렸사옵니다.”

    “그럼 폐하를 뵈어야겠소. 중요한 일이오.”

    “하오나 지금은. 황후 마마가...”

    “그럼 가서 기다리고 있겠소. 그리하는 것은 괜찮지 않겠소?”

    해민은 에르모나와 제르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자기 사정이 급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혹시 두 사람이 안 된다고 하면 마음을 접을 생각으로 한 말이었는데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황제 폐하의 뒤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게 된 마당에 황후의 사정을 봐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제가 모시겠사옵니다. 황비 마마.”

    제르반이 말하자 해민은 대전으로 향할 채비를 했다.

    ***

    이스마힐의 책상에는 숯덩이처럼 변한 책이 놓여있었다.

    두꺼운 가죽 표지가 녹아내렸고 그것을 도려내자 까맣게 재로 변한 종이가 안에서 부서져내렸다.

    잘못하다가는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스마힐은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 아는 사람은 해민일 것 같았고, 해민이라면 이 상태에서도 뭔가 의미있는 것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스마힐은 간밤에 일어난 일과 해민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제르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대전에서 예정되어 있던 일들은 모두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황후의 섭정을 곤고히 하기 위해서 자기가 만들어주려고 했던 울타리였다.

    이제 그것이 더 이상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베인과 황후에 대해서 생각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처음 이스마힐이 예상했던만큼 마음에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다.

    황제의 자리가 얼마나 외로운 자리인지 이스마힐은 어려서부터 선황을 보며 뼈저리게 느껴왔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며 헤르만 제국을 위해서 자기가 참아내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버텨왔었다.

    이번에도 자기가 버티고 견뎌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버티겠다고 이를 악물고 눈을 꾹 감고 참으려고 했는데 실상은 충격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민이 했던 말이 그의 마음 속에 잔잔하게 퍼졌다.

    다치지 말라고 그의 몸에 미리 갑주를 입혀준 것처럼, 황후와 두란트가 통정을 해서 스베인을 낳았다는 사실도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랬나보지.

    외로웠나보지.

    두 사람은 잘 맞았나보지.

    그냥 그 정도에서 생각을 멈출 수가 있었다.

    감히 나를 두고, 나를 속이고!! 그런 생각조차 이제는 거의 들지 않았다.

    그들로 인해서 자신의 마음의 평안을 손상시킬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종장이 밖에서 고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황후를 부르라 한 사람은 자신이었기에 이스마힐은 그 말에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들라 이르라.”

    이스마힐은 책상 앞에 앉아서 황후를 기다렸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흉물스런 책이 놓여 있었다.

    황후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는 더할 수 없이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었고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최상의 것으로 차려입고 시간을 들여 오래 꾸민 표시가 났다.

    이스마힐은 그런 모습의 황후를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나에게서 얻어가려는 것이 있는 게로군.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스마힐은 황후를 바라보다가 자리를 권했다.

    황후는 이스마힐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던 황후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책으로 향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폐하.”

    황후가 물었다.

    “보다시피. 불에 탄 책이오.”

    “황비의 별궁이 탔다고 하더니. 폐하. 이것이 혹시 그... 대제사장이 찾았다는 그 예언서이옵니까.”

    황후가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예언서라.

    이스마힐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황후가 어떻게 나오는지나 지켜보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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