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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들 중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두란트와 움베르트에게 매수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움베르트 대제사장이 왔었사옵니다.”
“대제사장이. 책에 대해 묻더냐.”
“아니옵니다. 대제사장은 혼자가 아니었사옵니다.”
해민의 목으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그럼. 누구와 함께 왔더냐.”
“두란트... 대공이었사옵니다.”
해민은 어느새 이스마힐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이스마힐이 놀란 눈으로 해민을 바라보았다.
“탑에... 갇혀있는 두란트가 어찌...”
이스마힐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해민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제르반. 두란트를 보고 오너라. 그리고 간수들을 바꾸어라. 오늘 두란트를 지키던 자들을 잡아들이고 문초하여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이 책임을 다 하였는지 제대로 고할 때까지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 폐하.”
이스마힐이 어둠에 대고 말하자, 그곳에 서 있는지도 알 수 없었던 그림자 하나가 바람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계속 말하거라.”
이스마힐이 말했다.
해민은 좀 더 목소를 낮췄다.
“폐하의 주위에는 폐하께서 믿으셔서는 안 될 자들이 많이 있사옵니다. 폐하의 곁을 항상 지키는 호위무사중 한 사람이 두란트 대공을 위해 일하고 있었사옵니다. 폐하께서 제 처소로 납시기 전에 그 자가 먼저 달려와 두란트 대공과 움베르트 대제사장을 피하게 하였나이다.”
“누구냐.”
해민은 이스마힐에게, 그 자가 누군지를 알려주었다.
그는 해민과 이스마힐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도 모른 채 황비 마마가 자기에게 어떤 상을 내릴지 한가로운 꿈을 꾸고 있었을 터였다.
이스마힐이 부르기도 전에 인영 하나가 다가왔다.
이스마힐과 해민이 나누는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던 듯했다.
해민은 그 자가 혹시라도 믿을 수 없는 자이거나 두란트에게 매수된 자라면 이스마힐이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해민의 걱정을 알아차린 듯 이스마힐이 해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모두 그대를 싫어하지.”
이스마힐이 웃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마힐이 웃고 있다는 것이 다른 어떤 말보다도 위로와 안심이 되었다.
그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 많았겠구나. 해민.”
“제가 하는 말을 다 믿으시옵니까.”
“그대가 하는 말이라고 그냥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하는 말보다 그대가 하는 말을 더 믿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 내 연약함 때문일 것이다.”
“폐하. 결코. 폐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사사로이 제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면 왜 망설였느냐.”
이스마힐이 물었다.
“폐하께서 저를 믿지 않으신다면... 그때는 그것이 상처가 될 것 같았사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사옵니다.”
울컥하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해민은 차오르는 눈물을 수습해보려고 했다.
이 타이밍에 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건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스마힐은 그런 해민을 탓하는 대신 해민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산책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돌아가자.”
해민은 이스마힐의 품에 안겨 걸었다.
뒤따르던 자들의 걸음 소리는 조금 복잡했다.
평소의 질서가 흐트러졌다.
당연히 자기들도 황제 폐하를 수행해야 할 거라고 생각하던 자의 걸음이 가로막혔다.
해민은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이스마힐이 믿고 있는 사람.
그들은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마힐은 해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해민을 바라보았다.
“근심하지 말거라. 해민.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저들은 그대를 싫어한다고. 그것만 봐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내 호위무사들 중 그대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낸 사람들은 믿지 않아도 된다. 그대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해민. 그대가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면... 왜 전에는 그들을 도려내지 않으셨사옵니까?”
“내가 사라질 생각이었으니 그랬다. 내가 사라지고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면 오히려 그들이 그 새로운 사람을 더 잘 보좌할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나도 슬슬 그들을 도려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이 자리에 견고하게 서 있어야 그대를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
이스마힐이 해민을 힘주어 끌어안고 해민의 이마에 입술을 맞춰주었다.
“아...”
해민이 이스마힐의 가슴을 밀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폐하께 드릴 옷을 두고 왔사옵니다.”
“다 그렸느냐.”
“예, 폐하.”
“무엇이 문제이겠느냐. 별궁으로 갔다가 가면 되지 않겠느냐.”
이스마힐은 어둠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그들을 따르는 걸음소리가 확연히 잦아들었다.
따르는 이들의 수가 적어진 것 같았다.
“너무 적은 숫자인 것이 아니옵니까.”
움베르트와 두란트의 잠입을 한 번 경험하고 난 직후라 해민은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탑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면 궁에 얼마나 많은 조력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믿어도 된다. 해민. 저들의 충심뿐만 아니라 저들의 실력도 그러하다.”
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그 소리가 들리더니 해민과 이스마힐의 옆으로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지나갔고 뒤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폐하.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제르반이었다.
탑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다시 그곳으로 온 것 같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스마힐의 곁을 직접 지키려고 그런 것 같았다.
이스마힐은 제르반에게 다른 것을 묻지 않고 해민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가자. 해민.”
두 사람이 침궁으로 향했을 때 별궁 쪽에서 큰 불길이 너울거렸다.
해민이 돌아보려 했지만 이스마힐이 고개를 저었다.
“볼 것 없다.”
“폐하...”
“그대가 다치지 않았으니 되었다.”
해민의 손을 잡은 이스마힐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해민은 떨려오는 손을 숨기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이스마힐은 더욱 해민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나는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스마힐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무엇이... 말씀이옵니까, 폐하?”
해민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둠 속에서 괴물이 움직였고 그 괴물이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이제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그대가 그 괴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했을 때는 괴물을 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이제는 겁나지 않는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옵니까?”
“괴물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대를 믿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스마힐의 호위들은 그들의 지근거리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따라왔다.
침궁에 이를 때까지 경계가 강화되었다.
“에르모나는 안전하다. 해민.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별궁에서 도망치던 자도 잡혔다.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니 근심하지 말거라.”
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고 아쉽구나. 그대가 그렸을 그림 말이다.”
그러나 해민은 이스마힐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책이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이 됐다.
책을 뜯어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