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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민은 그 사이에 두란트와의 거리를 다시 벌렸다.
“일레노이. 나를 보거라. 이제는 나를 보지도 않겠다는 것이냐.”
두란트가 해민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해민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며 두란트에게서 벗어났다.
움베르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일단 여기까지만 데리고 오면 뒷일은 황비가 협조를 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황비가 더 이상 두란트 대공에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자 초조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움베르트의 걱정은 더욱 커졌다.
두란트 대공이 황비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황비가 어떤 마음인지만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황제 폐하의 신임을 되찾은 황비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앞으로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움베르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전하.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움베르트가 두란트에게 말하자 두란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일레노이. 이 더러운 남창놈. 개하고 붙어먹을 더러운 자식! 너를 이 자리에 앉혀준 게 누군데 네 놈이 이제 와서 나를 배신하겠다는 것이냐!”
당혹감과 수치심 중에 수치심이 좀 더 강해졌고 일단 그렇게 되자 두란트는 폭주해버렸다.
그때의 두란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움베르트가 그 분위기를 깨달았다는 것이 두란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차라리 그 자리에 자기와 일레노이만 있었다면, 그래서 일레노이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자기 뿐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폭주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러나 움베르트가 그 자리에 있다가, 일레노이의 마음이 떠났다고 판정하는 듯이 말하며 돌아가자고 재촉하자 두란트는 폭주했다.
다시 또 그 냄새나는 퀴퀴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움베르트의 도움으로 간수들에게 뇌물을 주고 나와 일레노이를 만날 수만 있으면 일레노이와 상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레노이가 자기를 빼내줄 방법을 말해줄 줄 알았고, 그 소망을 가지고 돌아가 있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레노이가 완전히 변해버린 채 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자, 그리고 그것이 변하지 않을 사실이라고 선포하듯이 움베르트가 자신을 재촉하자 두란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두란트가 해민의 멱살을 잡아 흔들다가 분을 못 이겨 뺨을 때렸을 때, 움베르트는 깜짝 놀라며 허둥댔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설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 아무리 대공 전하라고 하셔도 황비 마마께 손찌검을 하실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에르모나였다.
아직 그 자리에 있는 줄도 몰랐던 에르모나가 큰 소리로 말하자 두란트는 화풀이를 할 상대를 찾은 것처럼 에르모나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지껄인 것이냐. 믿기지 않아서 묻는 것이다. 감히 네년이 지금 나한테 뭐라고 말을 한 것이냐. 그 입으로 다시는 그따위 말을 지껄이지 못하게 찢어버릴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눈이 뒤집힌 채 두란트가 에르모나에게 다가가자 해민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에르모나에게 손을 댔다가는 대공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오! 황제 폐하의 황비가 머무는 곳에 와서 대공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 일이 그냥 덮일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거요!”
"무어라! 네 놈이 감히 나한테. 나한테 지금, 그렇게 말을 한다는 것이냐! 이 더러운 남창놈이! 무엇이냐. 이제는 제국의 황비라 이것이냐. 그렇고 도도한 얼굴을 하고 별궁에 앉아 있으니 과거의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 같으냐. 수캐를 등에 업고 수캐의 마누라 노릇을 하고 엉덩이를 대 주던 놈이. 내 명이라면 무엇이든 하던 놈이. 수 십 명 병사의 노리개도 기꺼이 되던 놈이. 그래. 네 시녀는 그런 것을 모르겠지. 아니 그러하냐. 너는 알고 있었느냐, 이 건방진 년. 네가 그리 대단하게 여기는 네 상전은 그런 놈이었단 말이다. 수캐들의 마누라였고 내 병사들의 노리개였다. 알겠느냐!"
해민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에르모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경한 짓을 저지른 것처럼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두란트는 이제야말로 자기가 원하는대로 그림이 그려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흡족하게 웃었다.
"공도 참 딱하오. 그런 말이 아니면 공의 말로 아무도 설득할 수 없다니 말이오. 이제는 폐하께서 왜 그리 결정을 하셨는지 알 것도 같소. 폐하처럼 성정이 좋으신 분이 어찌 하나뿐인 동생을 탑에 가두실 수밖에 없었는지 알겠다는 말이오. 혹시라도 권력에 눈이 어두운 자들이 공에게 들러붙어 제국을 위태하게 할까봐서 폐하께서 그리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제국과 제국민들을 개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할 수가 없으셔서 그랬던 것이라는 말이다!"
해민이 사납게 소리치자 기가 질린 두란트의 눈에 핏발이 서더니 금방이라도 해민을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필시 큰 일을 치를 거라는 것을 직감한 움베르트가 두란트를 필사적으로 말리려 했다.
해민은 서 있던 곳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움베르트가 붙잡는다고 하더라도 두란트의 힘으로 움베르트를 떨구어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거였다.
그러나 두란트는 움베르트가 말리자 씩씩대면서 거친 숨을 뱉어냈다.
이 자는 일레노이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두란트는 일레노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분노에 차서 저를 노려보는 일레노이의 형형한 시선에 두란트는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제가 그래버렸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치욕적인 행동인지를 알았기에 두란트는 다시 일레노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대기로 뭉쳐진 손아귀가 두란트의 턱을 쥐고 억센 힘으로 억지로 돌려놓는 것 같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을 때 한 사내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온 자는 침궁 앞에서 해민이 본 적 있던 호위무사였다.
“황후 마마를 돌려보내시고 황제 폐하께서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시옵니다. 두 분께서는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두란트를 보며 그가 말했다.
그 말에 두란트는 움베르트와 해민을 노려보았다.
“가셔야 하옵니다!”
움베르트는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황제 폐하의 눈에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은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두란트도 그때에는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는지, 누가 말하기도 전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먼저 어둠속으로 달려나갔다.
움베르트도 두란트를 쫓아나갔다.
소식을 전한 호위무사는 당당해보였다.
해민이 자기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자가 일레노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 그를 탓할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제가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알았다면 바로 내빼는 것이 옳았을 것이나 아둔한 자가 탐욕을 부렸다.
나가지 않고 서 있는 그 자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고 해민은 실소를 지었다.
"너에게 좋은 것을 줄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황비 마마."
입이 귀에 걸리려는 것을 억누르고 이스마힐의 호위무사가 허리를 숙였다.
네 목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내가 베푸는 은혜임을 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이스마힐의 호위무사였다.
지존은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수많은 측근의 보필을 받아야만 했다.
지존의 곁을 지키는 미물 같은 자들이 앙심을 품어서 존귀한 자의 몸을 상하게 하고 해치는 일이,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한 해민은 당장이라도 엄한 말로 꾸짖고 싶은 것을 참았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물러가 있거라."
이스마힐의 호위무사는 아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희망을 갖고 돌아갔다.
곳곳에 뻗은 잔뿌리들이 썩었다고 해민은 생각했다.
이스마힐은 견고하게 서 있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저기에 이스마힐을 흔들어댈 수 있는 위해한 세력들이 포진해 있었다.
해민은 제 이마를 짚었다.
두란트는 아마 탑으로 돌아갔을 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책이 말을 해 주었을 것이다.
해민이 떨리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 에르모나가 서둘러 분을 가져와서, 아직 정신도 못 차린 해민의 얼굴에 발라주었다.
“폐하께 심려를 끼치시면 안 되옵니다. 마마. 그 일을 아시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진노하셔서 두란트 대공 전하를 죽이라 명령하실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오실지 모르니 준비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에르모나의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의 저주.
그것이 이스마힐에게 미치게 둘 수는 없었다.
분을 발라, 얼굴에 난 손자국을 지우려 하고 있을 때 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께서 드신다는 말에 해민은 에르모나를 바라보았다.
에르모나는 몇 번 더 급하게 분을 발라주고 그 정도면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