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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28화 (2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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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양자로 들이려 했던 분은 어떤 분이옵니까?”

신분으로는 황태자가 될 사람이라, 나이가 어리다고는 해도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어 조심스럽게 묻자 이스마힐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스베인을 가르치는 일을 그대가 해 주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별궁에만 있을 필요도 없고 스베인이 그대에게서 그대의 좋은 성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더니 이스마힐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해민. 내가 지금 제대로 생각하는 것이 맞느냐. 그대의 성품이 좋다고 생각하다니. 그런데. 맞는 것 같다. 일레노이는 그렇지 않았어도 그대는. 해민 그대는.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스마힐이 말했다.

이스마힐이 어떤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일레노이와 해민을 구분지어서 말해줄 때마다 해민은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과거와 절연해가다보면 온전히 자신의 모습으로 이스마힐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베인의 얘기는 나중에 해 주겠다. 해민. 내가 정말로 주의하고 조심해야 할 사람은 그대인 것 같구나. 그대와 함께 얘기를 나누다보면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두 잊어버리게 되니 말이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일어선 이스마힐이 해민의 배웅을 받으며 나갔다.

이스마힐이 스베인에 대한 얘기를 해 주지 않아도 책을 찾아보면 스베인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스베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해서 활약하는 것은 이스마힐의 사후일 것이니 그 부분에서 찾아보면 스베인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솔직히 스베인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이제 어린 아이일 스베인과 자신의 접점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경쓸 사람과 신경쓸 일들이 많았다.

해민은 돌아와서 이스마힐의 옷을 집어들었다.

누군가의 옷을 들고 자기가 그런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해민은 어느새 이스마힐의 옷에 얼굴을 대고 그 냄새를 맡고 있었다.

안온한 느낌이 해민을 휘감았다.

저절로 얼굴에 웃음이 번졌고, 행복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마힐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준 것이 고마웠고 자신의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이 좋았다.

일레노이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기자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침궁에 갈 시간이 될 때까지, 해민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이스마힐의 옷에 그림을 그렸다.

에르모나는 황제 폐하의 옷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싶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을 가지고 수시로 방에 들어와 꾸준히 해민을 방해했다.

그러나 해민이 무엇을 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그림은 폐하께서 가장 먼저 보시게 될 것이다.”

해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철벽 수비를 펼쳤다.

결국 에르모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해민은 의기양양하게 그림을 그리고 침궁으로 갈 준비를 했다.

저녁도 건너뛰었지만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이스마힐과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면 자기도 작업을 멈췄을 것인데 이스마힐 역시 식사를 거르고 대신들과 회의를 한다는 것을 알고 해민도 끼니를 걸렀다.

해민이 침궁으로 향했을 때 해민은 그 앞에서 황후를 수행한 자들과 마주쳤다.

황후의 시녀장이 해민을 보더니 오늘밤은 황후 마마께서 침궁에 드셨으니 돌아가시라는 말을 도도한 자세로 전했다.

해민은 그 앞에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해민이 별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에르모나는 황제 폐하의 침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고 해민을 위로해 주고 싶어 전전긍긍한 모습이었다.

주인에게 주지 못한 옷이 해민의 팔에 걸려 있었다.

해민은 그럴 것 없다면서 오히려 에르모나를 안심시켰다.

“시간이 났으니 그림이나 더 그려야겠다.”

즐거운 척 한껏 목소리를 높이며 말하는 황비 마마를 보는 에르모나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나 자기가 대놓고 황비 마마를 위로하려고 들었다간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 그저 조용히 옆을 지켜줄 뿐이었다.

“황후전에서 사람이 들었사옵니다.”

밖을 지키던 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에르모나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해민을 바라보았다.

“들게 하라.”

해민 역시 황후전에서 이 시간에 누가 온다는 것인가 하며 에르모나에게 말했다.

침궁에 들기는 했지만 어차피 합방을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 황후는 황후전으로 돌아가고 해민에게 황제 폐하의 수청을 들게 하라는 명이라도 전하려고 사람을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짧은 시간동안 들었다.

에르모나는 서둘러 나갔고 거의 동시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을 때 에르모나는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곧 입이 막혔다.

“소란 떨 것 없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두란트였다.

해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란트를 바라보았다.

두란트의 곁에는 움베르트 대제사장이 있었다.

“대공께서 황비 마마를 보고 싶어 하셔서 제가 이리 자리를 주선하였사옵니다.”

움베르트 대제사장은 자기가 해민을 위해서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듯이 말했다.

만약 해민이 아닌 일레노이였다면 움베르트는 그야말로 천사와 같은 환영을 받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 앞에 서 있던 사람은 일레노이가 아닌 해민이었고, 해민은 두 사람의 등장이 절대로 반갑지 않았다.

해민이 달리 말을 할 필요도 없이 해민의 표정으로 해민의 감정이 다 드러났다.

“사람들의 눈을 어찌 속이고 탑 밖으로까지 나왔다는 말입니까. 이리 돌아다니시다가 다른 사람의 눈에 발각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때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해민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눌렀다.

황후가 오늘밤에 침궁에 든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네 표정이 그러한 것이냐. 전에 나를 보고 간 후에 다시 오지 않아도 네가 이스마힐을 꼬여내느라고 바빠서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는데 내가 갇혔다고 네가 네 살 길만 도모하는 것이었더냐. 이스마힐과 배를 붙이더니 이제 네가 정말로 이스마힐의 황비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두란트는 해민을 보자마자 분노를 쏟아냈다.

표독스럽게 쏟아낸 한 마디의 말은 그 다음의 말을 더욱 거칠게 불러냈고 말을 할수록 더욱 분노가 솟구쳤다.

그래도 애잔한 눈빛은 보여줄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보자마자 핀잔을 들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말은 바로 하여라. 내가 발각될까봐 두려운 것이냐. 나에게 엮여서 네가 귀찮아질까봐 그것이 싫은 것이냐."

두란트가 쏘아붙였다.

해민은 자기가 두란트를 달래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자 그 모습이 두란트를 더욱 격분시켰다.

두란트는 금방이라도 해민에게 달려들어 해민을 거칠게 다룰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있었다.

두란트 자신도 자기가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일레노이를 다루는 것은 언제나 쉽고 간단했다.

자기 기분에 따라 상하게 하고 괴롭히고 학대해도 일레노이는 늘 두란트에게로 돌아왔고 두란트만을 바라보았다.

해바라기가 해를 따르는 것처럼 일레노이에게는 두란트가 온 우주인 듯했다.

일레노이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두란트가 애를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늘에 태양과 달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레노이는 늘 두란트의 곁에 있었다.

그의 몸이 떨어져 있을 때에도 두란트는 일레노이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일레노이가 이스마힐과 동침하기 위해 이스마힐의 침궁에 들어가도 두란트는 일레노이를 걱정하지 않았다.

이스마힐을 질투하지도 않았다.

일레노이는 두란트에게 그저 수많은 성노리개 중 하나일 뿐이었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존재도 아니었다.

다른 게 있다면 다른 노리개들보다 유용하다는 거였다.

이스마힐의 총애를 받는 노리개였기 때문이었다.

일레노이가 이스마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스마힐을 경멸한다는 것을 두란트는 알고 있었다.

일레노이의 눈을 보면, 언제나 두란트를 열망하는 것이 보였다.

일레노이가 저를 사랑하는 동안 두란트는 일레노이에게 갈급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 변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란트가 아는 일레노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죽음이 두렵다고 자신을 배반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자기가 일레노이에 대해서 잘못 알았던 것인가 했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일레노이는 두란트가 가학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일레노이의 목숨을 거의 끊어버리려고 했을 때에도 일레노이는 두란트에게서 도망친 적이 없었다.

두렵다면 떠나라고 말해도 일레노이는 항상 두란트의 곁에 머물렀다.

자신은 온전히 두란트의 소유이기에 자신을 죽이고 살리는 것도 두란트가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었다.

만약 목숨이 아까웠던 거라면, 두란트가 일레노이의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일레노이를 괴롭히고 학대했을 때 벌써 두란트를 떠났어야 했을 거였다.

그런데 달라졌다.

무언가가 달라졌다.

가장 생소한 것은 일레노이의 눈이었다.

일레노이의 눈에는 더 이상 두란트에 대한 기대감도 열망도 없었다.

일레노이는 아득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두란트를 피해 시선을 돌리는 때가 많았고 이제는 두란트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마주치면 그때의 눈빛은.

차라리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았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불신. 경멸. 저주. 증오.

그런 것들이 일레노이의 눈에서 읽혔다.

두란트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지.

전 같았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주먹이 날아갔을만한 상황이었는데도 두란트는 일레노이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란트는 자기가 그를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일레노이에게 들킬까봐서 전전긍긍했다.

해민은 두란트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움베르트는, 자기가 두란트를 여기까지 데려오기만 하면 그 공로를 치하받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제야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았다.

“일레노이. 정녕 왜 이러는 것이냐. 밖에 있다고 나를 잊은 것이냐. 정녕 그렇다는 것이냐.”

두란트는 초조한 빛을 보였다.

두란트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레노이에게 조금 더 다가가는 것이 다였다.

그러면서도 일레노이가 저를 노려보자 그 안광에 질려버린 듯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다가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일레노이가 말했다.

말투는 더할 수 없이 싸늘하고 냉정했다.

가까이 다가오면 어쩌겠다는 경고도 없었지만 그 말이 두란트의 두 발을 그 자리에 묶어버리는 것 같았다.

“일레노이...!”

두란트는 저도 모르게 자기가 일레노이의 말에 순응했다는 사실에 당혹감과 치욕을 느꼈다.

두란트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움베르트는 그 상황을 주시하면서 둘 간의 힘의 균형이 확연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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