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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23화 (2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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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다고 말하며 웃음을 짓던 이스마힐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스마힐을 계속 웃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해민이었다.

    혹시 그 사이에 바뀐 것이 있을까 하면서 책을 다시 살펴 보았지만 책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게 맞는 것 같아. 이스마힐이 그렇게 되는 건 신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마음의 병이야. 그래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는 거야. 그걸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또 옷장을 뒤졌지만, 그런다고 갑자기 마음에 드는 옷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마침 에르모나가 옷을 가져왔다.

    에르모나는 자기가 만든 옷을 해민이 마음에 들어할지 몰라 긴장한 것 같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장식과 심플한 디자인임에도 해민의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에르모나. 정말로 훌륭하다."

    "괜찮겠사옵니까, 마마? 옷감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어서 송구하옵니다."

    "무슨 말이냐. 내가 망치지나 않을지 걱정이구나."

    그러면서 해민은  잔뜩 긴장된 태도로 먹과 붓을 준비했다.

    옷에 직접 그려본 적은 없었지만 빨면 지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옷에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렸다.

    “침궁에 가실 때 입고 가실 것이옵니까?”

    에르모나가 해민의 그림을 보며 물었다.

    “그래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구나.”

    “마마. 정말로 곱사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이옵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이옵니다.”

    “붓꽃이라 한다.”

    그러다가 해민은 이 지역에 붓꽃이 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니 헤르만 제국이라는 곳이 위치한 장소도, 역사속에서 존재한 시기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애초에 제국력으로만 년도가 표기되어 있었고 헤르만과 이웃해 있는 국가의 이름도 종종 나왔지만 그 국가들도 해민에게는 낯설었다.

    나중에 통일이 되면서 해민에게 익숙한 국가가 생겨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해민이 알지 못하는 나라들이었다.

    에르모나는 해민이 그리는 붓꽃이 마음에 드는지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붓꽃의 꽃망울을 보라색으로 칠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해민은 농담을 조절해가며 그림을 그렸다.

    “마마. 정말로 곱사옵니다. 빨면 다 지겠지만 말이옵니다.”

    “매번 다른 그림이 그려진 것을 입을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하냐. 한 번 입고 질릴 일도 없을 것이니.”

    “그래도 그리 귀한 것을 어찌 그리한단 말이옵니까.”

    “마음에 드느냐. 에르모나.”

    “이를 말이옵니까, 마마. 전에는 왜 그런 것을 그리지 않으셨사옵니까?”

    해민은 그냥 웃음을 짓고 에르모나를 바라보았다.

    “안 입는 옷이 있으면 그려주마. 마음에 들면 가지거라. 에르모나. 대신, 버려도 될 옷을 주어야 한다.”

    “절대로 안 되옵니다. 가장 좋은 옷으로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옵소서, 마마.”

    에르모나는 급히 서두르며 나갔고 돌아왔을 때는 에르모나가 가장 아끼는 게 분명한 옷이 들려 있었다.

    수줍어하면서 옷을 내미는 에르모나에게서 옷을 받아들고 해민은 자기가 그 옷을 망치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을 하다가 그림을 그렸다.

    에르모나는 그 모습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고 해민도 이내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마마. 죽을 때까지 이 옷은 입지도 않고 빨지도 않고 간직할 것이옵니다. 정말 너무나 마음에 드옵니다.”

    “그러면 내가 그림을 그려준 것이 의미가 없질 않으냐. 마음껏 입고 다니거라. 좋은 옷을 사주고 거기에 또 그림을 그려주겠다.”

    “마마. 이제 돈도 없지 않사옵니까. 그러니까 조금은 남겨두셨어야 하는 거였사옵니다. 어찌 그것을 페하께 다 드리시옵니까. 폐하도 그러시지. 그걸 어찌, 조금도 안 남겨주시고 다 받으신단 말이옵니까?”

    안 보이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그 분은 내 남편이 아니냐. 황제 폐하가 내 남편인데 나한테 돈이 없다고 그것이 뭐가 문제겠느냐.”

    그 말을 하고 나자 해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남편이라니.

    어쩔 수 없이 순응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해민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스마힐의 황비라면 싫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밤이 되어 침궁으로 향했을 때,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자들은 명을 받았는지 해민을 잡지 않고 그대로 안에 고하였다.

    들라 하라는 이스마힐의 말을 들으며 해민은 안으로 들어갔다.

    이스마힐은 피곤해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기대감이 서린 얼굴은 밝아보였다.

    “폐하.”

    해민이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건네자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았다.

    “아직 자리에 들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대를 기다렸다.”

    “그럼 좀 더 일찍 올 것을 잘못한 것일지요.”

    “아니다. 딱 맞추어서 온 것이다.”

    이스마힐은 해민이 입은 옷을 오랫동안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 옷은 누가 지은 것이냐. 곱구나, 일레노이.”

    “마음에 드시옵니까.”

    “그런 옷은 처음 본다. 일레노이.”

    “무료하여 그려보았사옵니다.”

    “그대가 직접 그린 것이라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가까이에서 보고 싶구나.”

    해민은 이스마힐에게 다가갔다.

    이스마힐은 해민의 옷에 그려진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신기하구나. 일레노이. 그대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것을 내 미처 알지 못하였다.”

    “마음에 드신다면. 다른 옷에도 그림을 그려보겠사옵니다.”

    그러자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았다.

    해민은 혹시 자기가 실수를 한 것인가 해서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 혹시 제가 실수를 하였사옵니까.”

    그러자 이스마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마음에 들어한다고 그대가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이. 나는. 믿기질 않아서 그런다.”

    “폐하... 송구합니다. 그간의 제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해민이 고개를 숙이고 말하자 이스마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다. 일레노이. 마음에 두지 말거라.”

    해민도 자꾸만 사과를 하는 것이 이스마힐에게도 유쾌한 기억을 떠올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여 입을 다물었다.

    “어떤 하루이었사옵니까, 폐하. 힘이 들지는 않으셨사옵니까.”

    해민이 이스마힐에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 너는 어떠하냐. 황의가 준 약은 발랐느냐.”

    “예, 폐하.”

    마땅히 오고갈만한 말들이 오고갔다.

    살펴주셔서 고맙다고 말하자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자고 가겠느냐.”

    고단한 듯, 이스마힐이 말했다.

    “소인은 그러고 싶사오나,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이스마힐이 희미하게 웃는 것을 본 해민은 용기를 얻었다.

    “폐하의 옆에 누워도 되옵니까.”

    “나는 이런 것들이 전부 믿기지 않는구나.”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옵니다.”

    “그래. 알고 있다.”

    해민은 이스마힐에게 다가가 이스마힐의 옷을 벗겨 주었다.

    그냥 잠을 잘 거라고만 한다면 옷을 그리 차근차근 다 벗길 필요는 없을 거였다.

    무슨 꿍꿍이인가 하는 것처럼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았다.

    “그냥... 폐하의 옥체에서 나는 체향을 맡으면서 잠들고 싶어서 그런 것이옵니다.”

    이제 와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스마힐의 얼굴에는 또다시 웃음이 지어졌다.

    “아플 것이다. 황의에게서 들었다. 그러니 애쓰지 말거라.”

    “아무 것도 안 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 해민은 침대로 가서 이불을 들어 올렸다.

    이스마힐이 먼저 올라갔다.

    생각 같아서는 일레노이를 먼저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고 싶었지만 얇은 옷 속에 가려진 상처들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해민의 말처럼 그도 해민의 체향을 맡으며 잠들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민이 이스마힐의 곁에 눕자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해민을 보다가 이스마힐이 웃음을 지었다.

    “자거라. 너도 고단하였을 텐데.”

    “폐하께서 주무시는 것을 보고 자도 되겠사옵니까.”

    “그러거라.”

    이스마힐은 눈을 감았다.

    해민은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나를 왜 믿는 걸까.

    그리고.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걸까.

    움베르트를 조심하셔야 한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뭐라고 할까.

    바라보는 동안 이스마힐의 입가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안 주무시옵니까?”

    “너는 왜 안 자느냐.”

    “잠이 오질 않사옵니다.”

    “고단할 텐데 어서 자거라.”

    “예, 폐하.”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잠들지 못했다.

    이스마힐은, 자기가 욕심을 부리면 일레노이가 아플 거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해민은, 이스마힐이 정무를 돌보느라 지쳤을 거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향한 욕망을 억눌렀다.

    먼저 잠든 사람은 이스마힐이었다.

    해민은 이스마힐을 향해 몸을 돌린 채 이스마힐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저도 잠이 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이스마힐은 둔중한 압박감에 눈을 떴다.

    희미한 불빛에도, 제 위에 올라온 사람이 일레노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일...레노이...”

    마른 입에서 목소리가 흩어졌다.

    처음에는 일레노이가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만 꿈속에서부터 느껴지던 좋은 기분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졌다.

    어느 틈에 벗은 것인지 일레노이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채로 제 페니스를 이스마힐의 배에 대고 문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마힐을 깨우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아...”

    이스마힐은 통제불능의 아이를 바라보듯이 일레노이를 바라보았다.

    “일레노이...”

    이스마힐은 이제 마음 놓고 그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일레노이가 자신의 것임을 확신하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폐하...”

    해민이 어깨를 움츠리며 이스마힐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해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이스마힐의 어깨로 쏟아졌다.

    이스마힐은 해민의 입술이 어깨와 목에 닿는 것을 느꼈다.

    해민의 손이 이스마힐의 등에 닿았다.

    이스마힐은 해민이 자신을 끌어안아 가슴끼리 밀착시키는 것을 느끼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너를 만지다가 네가 아플까봐 걱정이 된다.”

    “그리하옵소서. 폐하.”

    해민이 조용히 웃었다.

    잠들 때보다 조금 더 어두웠다.

    이스마힐이 잠들 무렵에는 켜져 있었던 불 몇 개가 그때는 꺼져 있었다.

    이스마힐은 일레노이가 일부러 그런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되자 일레노이의 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간혹 멍자국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늘이 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인을 하려고 해 봐야 확인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조절된 빛이었다.

    이스마힐은 고혹스럽게 움직이는 일레노이를 바라보았다.

    저를 위해서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해민이 이스마힐의 허리 위에 걸터 앉은 채 상체를 쭉 뻗었다.

    이스마힐은 홀린 듯이 그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의 나신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일레노이의 몸이 원래 이랬던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는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오래, 뚫어지게 일레노이의 몸을 볼 수 있었던 기회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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