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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20화 (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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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을 한다고 답이 나올 것이 아니었고, 설마 정말로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해민은 피식 웃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이제 움베르트에 대해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는 확실해졌다는 거였다.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그것이 신의 섭리라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란트와 움베르트가 계획한 일에 어쩌다가 자기가 끼어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움베르트에게 진실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해민은 마음을 정했다.

    움베르트에게 신의 뜻을 대언할 능력이 더 이상 없다는 것도 확실해졌다.

    마음이 더러워진 종에게 신이 계시를 내리지 않는 것은 당연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민은 책을 찾았다.

    그러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에르모나를 불러들였다.

    “내가 없는 동안 누구도 이 안에 사사로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라. 누구도 안 된다.”

    해민이 말하자 에르모나가 해민을 바라보았다.

    “하오나 만약,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사람이나 황후 마마의 명을 받은 사람이 요구하면 어찌해야 하옵니까?”

    에르모나의 말에 해민은 잠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에르모나가 그 명령에 저항할 수는 없을 거였다.

    해민은 웃음을 지으며, 네가 황명을 거역하고 목이 잘리지 않으려면 버텨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며 에르모나를 내보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걱정할 일이 아니니 너도 너무 심려하지 말거라.”

    에르모나는 정말로 자기의 도움이 없어도 되는 것인지 걱정하다가 해민이 두 번 세 번 나가달라고 당부한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

    해민은 옷을 갈아입다가 자신의 손목에 생긴 멍자국을 보았다.

    저승사자에게 붙잡힌 것처럼 붉고 진한 멍자국이었다.

    어깨와 허리에도 그런 멍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책을 숨길 장소를 찾는 게 더 중요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변하지 않았다.

    책의 낱장을 뜯어내도 그 효과가 그대로 지속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이스마힐이 살아있는 동안의 기록만 뜯어낼 수 있다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스마힐이 살아있는 동안의 기록은 사실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 앞 부분의 기록과 뒤의 기록은 방대했지만 그거야 해민이 신경쓸 것은 아니었다.

    바뀌지 않을 앞부분의 역사는 이제 해민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고 이스마힐의 사후에 일어날 일들은 관심 밖이었다.

    그렇다면 해민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몇 십 장에 불과했다.

    그 책이 신의 섭리로 만들어진 성물이라면 낱장을 뜯어낸다고 해서 갑자기 책의 효력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위험부담이 큰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일이 제대로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가장 앞 부분을 시험삼아 뜯어보았지만 책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뒷부분의 내용이 변할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자신의 믿음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민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뜯어냈다.

    종이가 크고 글씨가 조밀해서 30페이지가 채 되지 않았다.

    종이가 얇아서 부피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만에 하나, 책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최소한의 대비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민은 그것을 간수할 곳을 생각하다가 옷장을 뒤졌다.

    그리고 언제든 겉옷 안에 차고 다닐 수 있을만한 복대 같은 것을 만들었다.

    해민이 그런 것들을 하느라고 분주했을 때 문이 열렸다.

    “황제 폐하 드시옵니까.”

    라는 에르모나의 목소리는 한참이나 늦었다.

    에르모나는 황제 폐하께서 들어가신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지만 에르모나가 고하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이스마힐이 들어가는 바람에 에르모나의 그 말은 마지막 경고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해민은 그의 앞으로 나아가 허리를 숙이려다가 이스마힐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스마힐의 뒤에는 함께 두란트를 보고 왔던 무관이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해민은 이스마힐이 왜 그를 데리고 그곳에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황비. 내, 그대에게 물을 것이 있다.”

    “하문하옵소서. 폐하.”

    “내, 이 자에게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

    이스마힐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 선 무관의 뻔뻔한 얼굴을 보았을 때 무관이 이스마힐에게 어떤 말을 고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레노이가, 자기가 원하는대로 해 주지 않은 것에 트집을 잡아 황제의 앞에서 잡들이를 해 보려는 수작인 것 같았다.

    황제의 신망을 잃은 황비는 그야말로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라고 생각하고, 이제 하다못해 무관까지 그런 짓을 하려드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가 찼지만 해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간 일레노이가 해 온 일이 있었으니 황제는 무관이 하는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민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스마힐의 말을 기다렸다.

    “두란트를 보러 간 자리에서 그대가 두란트와 정사를 벌였다고 이 자가 말하였다.”

    이스마힐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기는 어려웠다.

    해민은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자기가 의심 받고 있다는 것보다, 이스마힐이 다시 상처 입었을 거라는 것 때문에 더 가슴이 아팠다.

    “저는.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폐하를 배신하지 않았나이다. 제 몸을 살펴보시면 아실 것이옵니다. 탑에서 정사를 벌인 일이 없다는 것을 말이옵니다. 살펴보시옵소서. 폐하. 그간의 죄는 용서받을 방법이 없겠사오나 앞으로는, 결코 폐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것은 믿으셔도 되옵니다. 폐하.”

    이스마힐은 해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민이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은 것 같았다.

    “내가 네 말을 어찌 믿을 수가 있느냐.”

    “폐하. 두란트 대공과 아무 일도 없이 돌아왔다는 것을 믿게 해 달라 하시면 믿게 해 드릴 수 있사옵니다. 하오나 앞으로 제가 폐하께 신심을 다 바칠 거라는 것을 믿게 해 드리는 것 까지는 해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저는 폐하께 진실을 고할 수 있을 뿐이옵니다. 폐하의 주위에는 폐하의 지혜를 가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사옵니다. 아무리 그들을 피하려고 조심하신다고 하더라도 폐하는 모두를 피하실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자가 되지는 않겠사옵니다. 믿음을 드리지 못하는 것 역시 저의 잘못이오니 폐하께서 저를 믿지 못하신다 하셔도 저는 폐하를 원망하지 않사옵니다.”

    이스마힐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레노이를 믿고 싶었다.

    일레노이를 믿는 것은 언제나 너무 쉬웠다.

    마음으로 간절히 그것을 원했고 일레노이가 자기를 배신했다는 상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거였다.

    그러나 그것은 매번 큰 배신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레노이의 말은 믿지 않고 무관의 말만 믿어야 할 이유도 없는 거였다.

    이스마힐은 무관을 바라보았다.

    “황비는 네가 한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을 하는구나. 어찌된 일이냐.”

    “그것을, 소인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폐하. 소인은 소인이 본 것을 고하였을 뿐이옵니다.”

    무관은 이제 와서 말을 번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 했다.

    황비가 제 알몸을 황제에게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의 증명이 될 수 있겠는가.

    황비가 두란트 공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면 두란트 공이 받은 모양이라고, 그렇게라도 우겨야한다고 무관은 생각하고 있었다.

    “일레노이. 내가 진실을 볼 수 있도록 그대가 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말하거라.”

    해민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했다.

    문이 닫히고 두란트가 자기를 겁박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했고 그 바람에 옷이 찢겼다는 말도 했다.

    붙잡힌 손목에 멍이 든 것도 말했지만 무관이 소리를 질렀다.

    “두 분이 통정한다는 사실은 이미 궁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파다하게 퍼져있사옵니다. 대공께서 황비 마마를 거칠게 다룬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황비 마마께서 궁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대공께서 황비 마마를 가축처럼 조련하셨다고도 들었사옵니다. 궁에 들어오신 후에는 황제 폐하의 눈을 속이느라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을 것이오나 이제는 대공이 그런 저런 것들을 따질 생각을 하지 못해서 전의 습관을 다시 드러낸 것이옵니다. 그러니 몸에 생긴 멍자국은 황비 마마의 말이 사실이라는 증명이 아니라 두 분이 거칠게 통정했다는 증명이 되는 것이옵니다.”

    무관이 말했다.

    해민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무관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사악할 수가 있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저에게는 제 목숨이 소중하겠지, 하고 곧 쉽게 이해해버렸다.

    이해했다는 것이 그 자를 용서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저 자의 집을 수색해 보옵소서. 무관으로서 마땅히 누리고 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윤택한 생활을 할 것이옵니다. 소인에게도 심부름값을 요구했다가 그것을 받지 못하자 저렇게 나오는 것이니 말이옵니다.”

    해민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이스마힐이 누구의 편을 들어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저를 위한 최소한의 변호를 하기는 해야했다.

    “밖에 있는 자들은 안으로 들어오너라.”

    이스마힐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말이 들리자마자 밖에서 한 무리의 호위들이 들어섰다.

    “이놈을 포박하고 감금하여라. 그리고 한 마디도 거짓 없이 고할 때까지 심문을 하여라.”

    호위들은 주저함도 없이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무관은 황비 마마가 거짓을 고하는 것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황비 마마가 황제 폐하 모르게 두란트 대공과 얼마나 더러운 짓을 했는지 아시느냐며 온갖 말들을 늘어놓았다.

    이스마힐의 얼굴은 굳어갔고 해민은 점점 할 말이 없어졌다.

    하고 많은 사람중에 왜 하필 일레노이의 몸으로 살게 된 것인지.

    진짜 이 운명을 무를 수는 없는 것인지.

    그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닥치거라!”

    황제의 호위무사가 말했지만 무관을 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다못한 호위가 무관의 얼굴을 후려쳤고 무관의 몸에 수차례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눈먼 매질이 이어지는 동안 이스마힐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그들은 무관이 잠잠해지자 곧바로 끌고 나갔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에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해민은 이마에서 송골송골 맺혀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며 휘청이다가 속으로 실소를 터뜨리기까지 했다.

    이 몸.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마도 저 자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일 것이옵니다.”

    말을 하고서야 해민은 자기가 말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은, 자기가 일레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인데 그렇게 말을 하면 정신 상태까지 의심받을 것 같았다.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모르는 척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짐도 모르지 않는다.”

    이스마힐이 말했다.

    “앉거라. 얼굴이 창백하다.”

    이스마힐의 말에 해민은 고개를 숙이기만 할 뿐 함부로 앉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앉을 것이니 어서 앉거라.”

    그 말을 듣고서야 해민은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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