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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19화 (1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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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세상에 둘도 없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겠군. 일레노이에게는 잘 어울리는 이미지인가?

    해민이 혼자서 웃음을 터뜨리자 이번에는 두란트가 긴장했다.

    “이스마힐이라면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

    두란트는 그 침묵을 견디는 것이 버거워졌는지 억지로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의 신심은 배반당하지 않았습니다. 신심이 배반당한다는 것은 신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것인데 헤르만 제국의 신은 결코 자신이 세운 황제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민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더 당당해져 있었다.

    두란트는 말을 하지 못하고 해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일레노이는 그에게 점점 더 낯설어졌다.

    이 이질감이 무엇인지 두란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내가 시킨 것이고 움베르트가 만든 책이다. 이스마힐이 정말로 거기에 속아서 너를 풀어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책이 신성한 성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안다는 말이다.”

    “공의 간계대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의 오해입니다.”

    해민은 더 이상 구차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두란트가 그 말을 믿건 믿지 않건 이제 자기와는 관계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두란트는 당장이라도 해민을 죽이려 들 것처럼 덤비려 했지만 해민이 언제든지 문을 열고 나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란트의 몸이 조금 움직이자마자 해민은 문 손잡이를 잡고 문을 어느 정도 열고 있었다.

    두란트는 억지로 화를 눌러야하는 자신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알았다. 건드리지 않을 테니 나가지 말아라!!”

    그러고는 벽에 주먹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으스러질 듯 부딪치고 피가 튀면서 하얀 뼈가 드러났다.

    두란트가 어떤 성정의 사람인지, 그리고 이스마힐의 다리를 절게 만든 장본인이었던 두 사람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해민에게는 두란트의 그런 모습도 충분히 상상이 가능했다.

    두란트는 분통이 터져서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그것조차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해민을 일레노이로 믿고 있는 지금 두란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을 거라고 해민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두란트에게는 이 상황이 꽤나 당혹스러울 거였다.

    두란트와 움베르트가 같이 벌였다는 일은 해민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움베르트가 반역을 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미 훨씬 전부터 이런 일들을 벌여오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레노이. 내가 말해주겠다. 내가 설명해주겠다는 말이다.”

    두란트가 말했다.

    “무엇에 대해서 말이옵니까.”

    “무엇에 대해서든지.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이냐.”

    “알고 싶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도 없습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내가 너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뭐가 있다는 말이냐.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말하여 왔다. 네가 내 진실을 알더라도 네가 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공이 알고 있는 일레노이는 없습니다.”

    해민이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지만 두란트는 아마도 그 말의 뜻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해민도 두란트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두란트는 손등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일레노이를 바라보았다.

    “일레노이.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이제 나에게 누가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다른 사람들이 다 돌아서더라도 너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폐하께 공을 죽이지 마시라 간언드렸습니다.”

    해민이 말하자 두란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무어라 하더냐. 이스마힐이 아직 너에게 화가 나 있을 터인데. 이스마힐을 설득하였느냐. 어찌 설득하였느냐.”

    두란트의 얼굴에 조급증이 드러났다.

    우아하고 신비로워보이던 그의 얼굴은 이제 그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탐욕과 비겁함이 병색처럼 번져 있었다.

    “나는 네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버릴 수가 없었겠지. 네가 나를 어찌 잊겠느냐. 그래. 잘 하였다. 이스마힐은 네 말을 들을 것이다. 한 두 번 말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면 더 말을 하거라. 그러면 이스마힐은 결국 네 말을 들을 것이다. 네가 쓸모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절대로 나를 떠나서 살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다. 일레노이.”

    두란트의 말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해민은 그의 말을 잘랐다.

    “내가 폐하께 그리 말씀을 드린 것은 폐하께 신의 저주가 내리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황족을 죽여 폐하께 신의 저주가 임하지 않도록 폐하께 그리 간언을 드린 것입니다.”

    “무슨...”

    두란트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나를 살리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두란트는 자기가 지금 일레노이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가 하면서 천천히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제 눈 앞의 일레노이를 바라보았다.

    일레노이는, 처음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제 손아귀에서 혹독하게 당한 탓에 옷이 듬성듬성 찢겨있고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지만 두란트도 그때에는 일레노이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이 더러운 남창 놈이 배신을 한 것인가!

    두란트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두란트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야수의 것과 같이 변해버린 눈을 보고 해민은 문을 열었다.

    찰나의 차이였다.

    두란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왔지만 민첩함으로는 해민도 그리 빠지지 않았다.

    해민은 늦지 않게 제 뒤로 문을 닫을 수가 있었다.

    혹시라도 이 패악무도한 자들이 문을 잠가두기라도 했다면 큰 일을 치를 뻔 했지만 아둔한 자들이 그런 위험까지는 감수하지 않은 덕에 해민은 막판에 몸을 피할 수가 있었다.

    문이 뒤로 닫히자 두란트가 달려와 고함을 질러댔다.

    간수들은 자기들이 두란트의 사정을 봐 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은보화가 쌓인다고 하더라도 감옥에 들어앉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분이 낮은 저희같은 사람들은 용서도 받지 못하고 잔인한 매질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을 것이다.

    해민은 두란트에게서 온전히 피하고 나서야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무관이 어느새 해민의 곁에 바짝 다가와 붙었다.

    “아무 일도 고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무관이 말했다.

    해민에게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제가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을 폐하께 고할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무관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관은 일레노이와 두란트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안에서 들렸던 그 소란스러움은 두란트의 거친 행위 때문에 황비가 소리를 지른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황비의 옷차림을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별 것이 아닐 거라고 여겼다.

    무관은 수고했다는 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비가 저를 서운하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돈을 기다렸지만 해민은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무관은 당황했다.

    황비가 죽을 뻔 하다가 살아돌아와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얼이 빠져버렸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골치 아픈 일이었다.

    무관은 몇 번이나 해민에게 그 일을 상기시키려 했으나 해민은 끝내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무관은 빈 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해민은 무관이 이스마힐에게 어찌 고할지 알지 못했다.

    괜한 말로 폐하를 근심하시게 하지 말라고 말을 해 두는 것이 좋았을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무관은 이미 돌아가버린 후였다.

    별궁에 도착한 해민은 옷부터 갈아입었고 해민의 옷을 본 에르모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황비 마마. 도대체. 도대체 어찌된 일이옵니까!”

    자기도 따라 나서겠다는 것을, 무관이 같이 가니 그럴 필요 없다고 해서 별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는데 황비의 옷이 찢긴 것을 보고 에르모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 마마... 무슨... 일이...”

    에르모나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겁에 질린 에르모나는 해민의 몰골을 보고 기어이 제가 먼저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해민은 자신의 기분도 별로 좋지 않았지만 에르모나가 울음을 터뜨려버리는 것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까지 기분이 침잠해져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억지로 기분을 끌어 올리려고 애쓰며 해민이 에르모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한 번은 봐야 하는 얼굴이지 않았더냐. 그리고 과거의 내가 저지른 일로 이리 된 것이니 내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느냐.”

    “마마... 그래도... 다른 일은 없었던 것이지요?”

    “다른 일이 있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렇게 말했지만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는 것을 해민도 느끼고 있었다.

    해민은 두란트의 목소리를 잊고 싶었지만 그것은 귀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계속해서 떠올랐다.

    고개를 젓고 머리를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해민이 차지하고 있던 일레노이의 몸이 해민의 통제를 거부하려고 하는 것처럼.

    마법의 언어가 일레노이 몸의 잠든 주인을 깨워낸 것처럼 해민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민은 두란트의 목소리를 잊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

    “종이를 가져다 줄 수 있겠느냐. 에르모나.”

    “예, 황비 마마. 그런데 어떤 것을 하시려 하옵니까? 어떤 것을 하려 하는 것인지 알면 적당한 것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러면 먹을 준비할까요?”

    “그것도 있느냐?”

    “마마...”

    이제 황비 마마의 이상한 질문에 어느 정도 면역이 돼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어도 그런 질문을 받게 되자 실로 참담해서 에르모나는 울상을 지었다.

    “그, 그래. 그거면 도움이 되겠구나, 에르모나.”

    해민이 눈치를 채고 황급히 말하자 에르모나가 밖으로 나가 그림 그릴 것들을 챙겨왔다.

    “고맙다. 에르모나.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혼자 있고 싶구나.”

    “예, 마마. 필요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 부르시옵소서. 마마.”

    에르모나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허락만 해준다면 나가지 않고 옆에 꼭 붙어있고 싶은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거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거나 노래방에 가서 소리를 질러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여기에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해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분하게 붓을 움직이며 종이를 채워나가는데, 자기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나? 하고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 것처럼 해민은 점점 재미를 붙여 나갔다.

    그럴듯하게 백지가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해민은 빠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어느 때부터는 손이 저절로 움직이며 종이를 채워나갔고 해민은 생각을 이어나갔다.

    생각은 책으로 이어졌다.

    책이야말로 자기와 계속 이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이 세계로 넘어온 것이 그 책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기가 이곳으로 넘어오면서 그 책도 우연히 같이 넘어온 것이 아니라, 주가 책이고 자기가 종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도 바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독자님의 오해입니다.

    (재미들린 호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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