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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황비 마마께서도 기다리셨던 만남이 아니었사옵니까."
무관은 얼핏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시선을 보냈다가 곧 거두었다.
짧은 순간 마주친 눈빛이었지만 강렬했다.
"네 도움을 받을 일은 없으니 너는 폐하께서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가 어떤 신하인지 아시게 된 후에도 폐하께서 너를 믿어주실지 모르겠구나."
무관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제가 오해하였사옵니다."
무관이 말했다.
그 후로는 서로 얼굴을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두란트가 갇혀있는 곳으로 가자 간수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황비를 대하는 태도가 깍듯했다.
자기가 이곳에 죄인의 신분으로 잡혀왔을 때는 전혀 그런 태도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다.
잡혀올 때까지만 해도 해민이 아니라 일레노이였다.
해민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간수들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갔다.
볕도 들지 않는 곳에서,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해민의 방문이 전혀 예고되지 않은 상태에서 꽤나 놀랐던 듯했다.
그러나 놀라움은 그의 몫만은 아니었다.
“...”
해민은 자기가 두란트를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두란트의 집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면 전하라고 불러야했겠지만 해민은 황비였다.
그러나 그 공식적인 직함과 달리 두 사람이 사적인 관계에서 어떤 호칭으로 서로를 불렀는지 알지 못했다.
그곳에 있는 남자가 두란트라는 것도 주위의 상황 때문에 알 수 있는 것 뿐이었지 그가 두란트라는 것을 해민이 스스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두란트라는 남자는 말이 필요없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잘 생긴 남자였다.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사랑을 저절로 받게 될 것 같은 그런 얼굴.
노력하지 않아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그런 부류.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거기에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
쉽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었음에도 해민은 두란트의 얼굴을 보면서 그리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해민은 두란트의 얼굴을 보면서도 자기가 왜 이렇게 냉담해지는지 알지 못했다가 어느 순간 느닷없이 두란트의 얼굴 위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해민이 죽기 전에 이별을 통보했던 남자.
두 사람의 얼굴이 닮지 않았기에 왜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해민은 두란트를 향해 갑자기 지독한 반감과 분노를 느꼈다.
남에게 쉽게 상처주고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고 주저없이 버리는 행태가 비슷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하면서도 해민은 느닷없는 감정이입에 꽤나 당황했다.
“일레노이. 이제야 왔구나.”
그 말은 해민을 질책하는 것처럼 들렸다.
“가까이 오너라. 일레노이.”
두란트가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말했다.
“여기에서 듣겠습니다.”
해민이 말하자 두란트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뭐라.”
“대공을 보고 오라는 것이 황제 폐하의 명이었기에 온 것입니다. 다른 뜻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두란트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지어지더니 이내 커다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만으로 사람을 완전히 제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해민은 새삼스럽게 깨닫는 중이었다.
“나가 있거라.”
두란트는 해민의 곁에 서 있던 간수에게 말했다.
해민은 간수가 저를 두고 나가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두란트는 그들이 제 말을 들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저 자가 너희에게 금화를 줄 것이다.”
해민은 두란트가 누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간수들의 옆에는 해민을 데려온 이스마힐의 무관이 서 있었다.
황실의 곳곳에 두란트의 손이 뻗쳐져 있었다는 것을 해민은 뒤늦게 깨달았다.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두란트의 꼬임에 넘어갈 이유가 없어 해민은 문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간수들은 자기들이 황비 마마를 그대로 내보내주어야 하는 것인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너희가 모르는 것이냐. 나를 위해서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황비 마마도 황제 폐하의 노여움을 살까 하여 이러는 것뿐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입을 다물어주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 그 대가는 후하게 치를 것이다.”
두란트의 말에 간수와 무관은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해민의 강경한 표정에 겁이 났는지 문을 잠그지는 못했다.
해민은 두란트를 찾아온 것이 멍청한 짓이었다고 생각하며 곧 떠나려했다.
그러나 해민의 손목은, 어느새 다가와있던 두란트에게 붙잡혔다.
“왜 이러는 것이냐. 죽을 고비를 넘기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느냐. 나에게 맹세했던 것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는 말이냐.”
“놓으십시오!”
해민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두란트의 힘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해민 자신의 몸이었다고 해도 이보다 더 근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레노이의 몸도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레노이의 몸이 부실해서가 아니었다.
두란트는 보기와 다르게 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민은 소리를 질러댔고 당장 누구라도 들어와 저를 구하지 않으면 황제 폐하께 모든 것을 고할 것이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그 소리는 두란트의 손에 막혀 제대로 나가지도 못했다.
해민은 제 입을 틀어막은 손을 깨물었다.
"미친 것이냐!"
해민이 반항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고 손을 놓으려다가 봉변을 당한 두란트가 해민의 뺨을 때렸다.
거침없는 손찌검에 해민이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해민은 가까스로 두란트에게서 벗어났지만 해민의 옷들은 그 사이에 어깨에서 내려가 있고 듬성듬성 찢겨 있었다.
해민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두란트를 노려보았지만 그곳에서 두란트의 잘못을 가리려 하다가는 다시 또 무슨 수모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거리를 벌렸다.
두란트는 제 눈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당연히 일레노이라고 생각을 했기에 그 모습에 당황하며 난처해했다.
“이... 일레노이... 정말로 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미친 것이냐. 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냐!”
“공이야말로 나에게 한 짓을 어찌 용서받으려고 그러시오!”
해민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자 두란트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레노이. 네가 구차한 삶에 이리도 미련이 많은 줄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구나. 그 일이 그리 맞아 떨어졌으니 망정이었지... 일레노이. 네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두란트는 해민의 기세에 눌린 듯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한 채 해민을 설득하려 했다.
해민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두란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그만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해민의 걸음이 문쪽으로 향하자 다급해진 두란트가 말했다.
“내가 한 일이다. 내가 움베르트를 시켜서 꾸민 일이란 말이다! 너는 지금 네가 형님 전하의 은혜를 받고 목숨을 구한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너를 구한 건 나란 말이다!”
두란트의 말을 믿지 않았으면서도 해민은 두란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몸은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너에게 다가가지 않을 테니 떠나지 말거라. 언제 다시 우리가 이리 같이 있을 수 있겠느냐.”
두란트가 한층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서 말했다.
해민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채 두란트를 바라보았다.
“말해주겠다. 무슨 뜻인지. 그래. 너는 알아야지. 네가 나에게 어떤 빚을 졌는지 말이다.”
두란트는 이제 여유있게 웃음까지 지었다.
그런 상황에서 웃음을 짓는 두란트의 모습이야말로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대제사장이 책을 가지고 너를 찾아가지 않았더냐.”
두란트의 입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해민의 놀란 눈이 크게 떠졌다.
두란트는 웃음을 지었다.
“움베르트가 그것을 어디에서 났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성궤가 있는 장막에... 놓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어찌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게... 무슨 뜻입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나 신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해민은 두란트가 무슨 간계를 꾸미는 것인가 하면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 자가 어찌 그 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쓸데없는 일에 호기심을 가졌다가 두란트의 계략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해민은 두란트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두란트의 목소리가 다시 다급해졌다.
“너는 그 말을 믿었던 것이냐, 일레노이. 내가 너를 그리 가르치지 않았거늘. 내 발등을 핥으면서 그리 맞으면서 나에게 배우지 않았더냐. 내가 너에게 무어라 하였더냐. 남을 믿으라 하였더냐.”
두란트의 얼굴에 비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해민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레노이와 두란트가 서로 사랑한 줄만 알았지 일레노이가 두란트의 변태적인 성욕의 희생자였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민이 동요하는 빛을 보이자 두란트는 틈을 찾은 맹수처럼 해민을 조여왔다.
“그립지 않으냐. 나는 이곳에서 언제 나가게 될지 알지 못한다. 네 안을 내가 채워줄 것이다. 헐떡이지 않았더냐, 일레노이. 너를 망가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더냐. 내 몸으로 너를 덮어달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 목소리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음란했다.
해민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헤르만 제국의 황비요. 황제 폐하의 황비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대의 형수가 되는 사람이오. 사람의 탈을 썼다면 그따위 해괴한 말을 하지 마시오!”
해민이 말하자, 그 말이 엄청난 농담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두란트는 사납게 웃어댔다.
“그래. 하던 이야기나 하지. 토라져서 나가버릴까봐 겁이 나는구나.”
두란트의 조롱하는 말을 들으면서 계속 그곳에 서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조금 후면 두란트의 입에서 움베르트의 악행에 대한 증거가 나올 것 같아 해민은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두란트의 말을 기다렸다.
“그것은 성궤를 두는 장막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움베르트에게 적당한 책을 너에게 들고 가라고 하였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라고 일러두었지. 헤르만 제국은 신의 빛으로 세워진 나라고 이스마힐은 신심이 돈독하니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할 거라고 하였다.”
해민은 두란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형도, 헤르만 제국의 신도 모두 모독하고 있었다.
애초에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거나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엉터리로 쓴 책을 정말 믿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움베트르에게 신경 써서 잘 만들라고는 하였지만. 움베르트도 대충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나를 돕기만 하면 평생 호사스럽게 살 수 있도록 약속해주었지.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아름다운 성은 벌써 움베르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일단 여기에서 나가기만 하면 그걸 되찾는 건 어렵지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는다.”
해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이 두란트와 움베르트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 사이에는 신의 간섭이 있었다.
그 책을 아는 자신이 증인이었다.
해민은 움베르트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책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꼬치꼬치 묻던 움베르트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하자 저절로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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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끊다니. 작가, 네가 미친 것이냐!
(환청 듣는 호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