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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17화 (1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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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해민은 그를 말리고 싶었다.

    “무엇이냐.”

    이스마힐은 답답하다는 듯이 해민을 바라보았다.

    “대공을... 두란트 대공을...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여쭈어도 되나이까.”

    해민이 조심스럽게 묻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국을 오르는 것 같던 이스마힐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리고 실소를 터뜨렸다.

    일레노이가 저에게 이리 친절하게 굴어준 것은 애초에 그것이 목적이었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일레노이가 자기를 좋아하게 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설렜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한없이 자신을 경멸하게 되었다.

    이스마힐은 죽일 듯이 해민을 노려보다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

    해민은 이스마힐이 오해하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다시금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폐하.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옵소서.”

    해민은 이스마힐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진노한 이스마힐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스마힐이 이대로 자신을 오해하고 또다시 상처를 입고 나가게 둘 수는 없었다.

    해민은 이스마힐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족을 죽이면 저주를 받는다 하지 않사옵니까. 폐하께서는 그리 하지 마옵소서. 만일 그래야 한다면. 그것은. 제 손으로 하겠사옵니다. 제가 그 저주를 대신 받을 것이옵니다.”

    해민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놀란 사람은 이스마힐 뿐만이 아니었다.

    해민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이 튀어나온 것일까.

    이스마힐이 잠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해민은 아직 이스마힐을 바라볼 용기는 얻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라.”

    이스마힐이 말했다.

    해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스마힐은 착잡한 심정으로 해민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대가. 나를 여러모로 놀라게 하는구나, 일레노이.”

    이스마힐이 말했다.

    이스마힐이 자기를 죽이고 그 뒤를 따라 죽으려 했던 것도 알았던 황비였다.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제사장도 읽지 못하는 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호로 쓰여진 그것을 스스로 판독해내는 모습도 이상했다.

    그리고 지금.

    두란트를 죽이면 저주가 미칠 거라고 하면서 자기가 두란트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일레노이를 보면서 이스마힐은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두란트를 보고 싶은 것이냐.”

    이스마힐이 물었다.

    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우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대공이 살아있는지를 보려는 것이옵니다.”

    “두란트가 살아있어야 하느냐. 두란트가 죽었다고 하면 어찌할 것이냐.”

    해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여 주옵소서.”

    이스마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돌려지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으로 시선이 갔다.

    “네가 보고 있는 책에 혹시. 그 내용이 있는 것이냐.”

    성궤가 있던 장막에서 나온 책이라 하였다.

    그런 것이라면 그런 신통력을 갖고 있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예언서일까 하는 생각이 이스마힐의 머릿속에 들었다.

    “말해보아라. 거기에 무엇이 쓰여 있었느냐.”

    해민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옵니다.”

    “내가 두란트를 어찌했는지. 그것은 모른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매달리는 것이냐.”

    말을 하려 했으나 너무 참담해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혹시. 나에게 저주가 내리느냐.”

    그 말은 가슴에 맺혀있다가 한참만에야 가까스로 나왔다.

    “폐하... 소인의 말씀을 들어주옵소서. 폐하의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 하여 주옵소서. 소인이 죽이겠나이다. 기필코 그리하겠나이다.”

    해민이 울먹이며 말했다.

    이스마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무거운 침묵을 만들어냈다.

    밖에서 시종이 목소리를 내었다.

    대전으로 돌아가실 시간이 되었다고 고하는 말이었다.

    이스마힐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를 불러 들였다.

    “모인 사람들에게 일러 오늘의 회의는 내일로 연기할 것이라 하여라.”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폐하.”

    다시 둘만 남겨지게 되자 해민은 이스마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그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네가 두란트를 죽이면. 어찌되는지. 너도 알고 있느냐.”

    이스마힐이 해민에게 물었다.

    눈빛에는 이제 노여움 대신 근심이 가득했다.

    “저주가. 저에게 임할 것이옵니다.”

    “저주가 나에게 임하는 것은 싫고. 너에게 임하는 것은 무관하다는 것이냐.”

    이스마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미 소인으로 인해 너무 큰 고통을 겪으셨사옵니다.”

    “그래서. 네가 저주를 받는 것은 괜찮다는 것이냐.”

    저는 이미 저주를 받았사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스마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해민을 일부러 괴롭히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는 해도 괴로웠다.

    “두란트를. 아직도 애모하고 있느냐.”

    이스마힐은 그렇게 물었다.

    그런 것을 물어서 무엇 하겠냐고 생각하면서도, 제어되지 못한 입술에서 그 말이 흘러나와버리고 말았다.

    “아니옵니다. 폐하.”

    “어찌 그리 쉽게 말을 하느냐.”

    “제 마음을 보여드릴 방법은 없사오나. 이것이 저의 진심이옵니다.”

    이스마힐은 해민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두란트가 일레노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는 해민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레노이를 믿고 싶은 마음이 이스마힐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스마힐이 묻자 해민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공에게, 폐하의 손을 대지 마옵소서. 대공의 목숨을 저에게 맡기옵소서.”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그 가냘픈 몸을 하고서 말이다.”

    이스마힐이 비웃듯이 말했다.

    “묶여있는 사람의 목을 베는 것은 저도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아니면. 숨을 쉬지 못하도록...”

    상상을 하자 역겨웠다.

    정말로 자기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란트를. 만나게 해 주겠다.”

    이스마힐이 말했지만 해민은 그 말을 듣고 자기가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았다.

    해민이 그를 마주 바라보자 이스마힐이 입을 열었다.

    “네 손으로도 그를 죽이지 말거라. 너에게 저주가 내리는 것도 나는 원치 않는다.”

    이스마힐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해민은 이스마힐이, 두란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가 이스마힐을 걱정한다는 것은 믿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민이 불안하게 서성거리고 있을 때 황제의 전교를 가져온 무관이 해민을 찾아왔다.

    “함께 가시지요. 황비 마마. 황제 폐하께서 두란트 대공을 보게 하여주라 하셨사옵니다.”

    "가지 않겠다."

    "하오나 폐하께서..."

    "내가 고하겠다. 나는 두란트 대공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두란트를 죽이지 말라는 명을 받았는데 자기가 두란트를 만나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이스마힐의 앞에서는 제법 담대하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두란트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두란트를 죽이지 말라고 말해주어서 해민은 이스마힐에게 고마웠다.

    자신을 걱정해준 이스마힐 때문에 해민도 더더욱 자신의 안위를 보살피고 싶었다.

    "가지 않을 것이니 돌아가거라."

    해민은 무관에게 말했다.

    무관은 그리 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것 같더니 결국 혼자서 돌아갔다.

    이스마힐이 두란트를 죽이지 않는다면 저주는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며 해민은 책을 다시 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스마힐이 이렇게 되는 게 두란트의 죽음과 관계가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두란트는. 이미 죽은 것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해민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웠다.

    해민은 무관이 멀리 가지 않았기를 바라며 달려나갔다.

    에르모나가 놀라서 일어나며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해민은 무관을 놓치지 않으려고 달려갔다.

    무관이 일단 돌아가서 황비 마마가 두란트 대공을 보지 않겠다고 전한 후에 다시 허락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스마힐의 기분이 다시 상할 것 같았다.

    해민은 무관의 뒷모습을 보고 그를 불렀다.

    자기를 부르는 거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 같던 무관은 한참만에야 해민을 돌아보았다.

    "돌아오너라."

    "예?"

    "가서 확인할 것이 있다. 그러니 나를 안내하거라."

    "예..."

    무관은 도무지 무슨 일인지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무관이 감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해민의 손은 어느때부턴가 계속 떨려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떨림은 심해지기만 할 뿐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민은 무관이 해민의 손을 보는 것을 알았다.

    떨고 있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손을 뒤로 돌려 잡았지만 무관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앞을 보고 걷거라."

    해민이 낮게 말하자 무관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송구합니다."

    "송구할 짓은 하지를 말거라."

    "예."

    바뀌지 않은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두란트는 이미 죽은 것인가.

    두란트가 살아 있다면, 그런데도 내용이 바뀌지 않은 거라면, 이스마힐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걱정으로 몸이 떨려오는 것인데 무관이 저를 보고 두란트와의 만남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장을 서거라."

    "하오나."

    "앞장을 서라 하였다."

    무관은 한 번 머리를 조아리더니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앞장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곳이옵니다."

    무관이 눈앞에 드러난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끝도 없이 이어진 건축물이었다.

    자기가 이곳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니 지난 일이 다시 떠올랐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자 다시금 겁이 났다.

    ‘운이 좋았던 거라고 해야 되나? 아니지. 운이 좋았으면 애초에 이런 곳으로 오지도 말았어야 했겠지. 그리고 그 전에, 그런 식으로 어이없게 죽지도 말았어야 했고. 그리고 또 그 전에... 그런 사람을 만나지도 말았어야 했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었다.

    해민은 드디어 두란트를 보게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두려움이었고 불안이었다.

    동요하지 말자고 다짐을 해도 크게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일레노이와 함께 이스마힐을 흔들어댄 남자.

    그야말로 악의 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란트 대공께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지키시라는 명도 내리셨사옵니다.”

    무관이 말했다.

    해민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이스마힐에게 임할 신의 저주를 대신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였다.

    무관은 자주 해민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해민은 그와 사사롭게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그리 말씀하셨지만 저희 집안은 두란트 대공의 은혜를 입어왔사옵니다. 제가 입을 다물면 그만인 것이지요. 은화 두 잎만 챙겨 주십시오. 황비 마마."

    무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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