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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트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해야 한다. 어떻게든 이스마힐이 신의 저주를 피하도록 해야 돼. 그래서 운명을 바꿀 수 있도록. 내가 설득해야 돼. 이스마힐은 모르니까. 알더라도. 어쩌면. 알더라도 이스마힐은 그 운명을 피하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피하게 해야 돼.’
생각할수록 정말로 그럴 것만 같았다.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이스마힐이라면 헤르만 제국을 위해, 헤르만 제국의 미래를 위해 악의 싹과 같은 두란트를 손수 처단하려고 할 것 같았다.
에르모나는 말 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황비 마마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둘 사이에서는 대화가 거의 오가지 않았다.
지나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이 겁내는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보면서 해민은 이것이 황궁에서의 생활인 것인가 보구나 하고 생각했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에르모나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해민이 웃음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내 곁을 지키는 것이 버겁지는 않더냐.”
“그거야 말할 것도 없는... 아...”
에르모나는, 자기가 모시던 상전이 자기를 그동안 너무 풀어줬다고 자기가 너무 함부로 말을 해 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해민의 눈치를 보았지만 해민은 유쾌하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움베르트 대제사장은 평소에 어디에서 지내느냐.”
“신전에 머물 것이옵니다, 마마.”
“신전에는. 일반 사람도 갈 수 있는 것이냐.”
해민이 묻자 에르모나가 해민을 바라보았다.
“항상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오나. 아니. 그 전에,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가시려고 하는 것인지를 먼저 알려주셔야 저도 정확한 답을 드릴 수가 있을 것 같사옵니다. 신께 기도를 올리고 제물을 드리러 가는 것은 언제든 가능하옵니다만 그때는 내부로는 들어가지 못하옵니다. 하오나 황비 마마께서 말씀하시면 대제사장이 기일을 잡을 것이옵니다.”
“그렇구나. 그러면 내가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 것이냐.”
“혹시. 장막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다.”
“그곳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사옵니다. 대제사장과 네 명의 제사장들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성전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경계를 서옵니다.”
“그럼 그 앞까지는 갈 수 있는 것이냐.”
“말씀 올린 것처럼, 대제사장이 먼저 기일을 잡아드릴 것이옵니다.”
“그렇구나. 신전은 어디 쯤에 있느냐.”
“지금 가서 보시려 하시옵니까.”
“신전이 궁 안에 있느냐.”
“그렇사옵니다. 황비 마마.”
원래는 일레노이가 모두 스스로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이제는 에르모나도 그런 것을 일일이 새롭게 가르쳐주면서 그다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것도 에르모나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좀. 신기한 것 같구나.”
“다른 나라에서 온 사신들도 그 점을 신기하게 여기기는 하옵니다. 그것은 헤르만 제국의 자부심이기도 하옵니다. 헤르만 제국은 신의 은총을 받고 신의 빛으로 만들어진 제국이니 말이옵니다.”
“그렇구나.”
에르모나의 말투에 자긍심이 베어있는 것을 알고 해민은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신의 빛으로 세워진 나라.
신의 백성.
신이 세운 황족.
신의 저주가 두려워 죽일 수 없는 동생.
그러나.
그러나 이스마힐은 결국 두란트를 죽이려 할 것이고 어쩌면 그 계획이 실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민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우선은 별궁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내가 혹시라도 신전을 찾아가게 될지 모르니 대제사장에게 미리 말을 해 두거라.”
“그런데. 황비 마마께는 아마도 언제든지 문이 열려 있을 것이옵니다.”
에르모나가 말했다.
“어찌 그러하냐.”
“책을 해독해 주셔야 하지 않사옵니까.”
아아아... 하는 어설픈 소리를 내고 해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모나는 이상하다는 듯이 해민을 바라보았다.
“진전이 없사옵니까, 황비 마마? 제가 볼 때마다 황비 마마께서는 책을 보시는 것 같사온데. 아직 새롭게 알아낸 것이 없사옵니까? 혹시 헤르만 제국에 흉년이나 재앙이 내리옵니까? 아니면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옵니까? 역병이 번지옵니까? 그래서 너무 참혹해서 말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온지요?”
에르모나의 말을 듣고 해민은 에르모나를 바라보았다.
외부에서 볼 때는 그렇게 보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해민은 에르모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에르모나도 눈치가 빤한지라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별궁으로 돌아간 해민은 다시 책을 펼쳤다.
이스마힐이 죽은 후에 펼쳐지는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이스마힐이 사라진 후에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민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이스마힐의 운명은 반드시 바뀔 테니 이스마힐의 죽음을 기초로 한 자신의 운명은 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눈은 책을 향하고 있었지만 글자를 따라가는 대신, 자신을 구하려고 달려오던 이스마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때의 이스마힐에게는, 해민을 다치게 할 수 없다는 마음뿐이었다는 것을 해민은 알고 있었다.
‘이스마힐이 걱정한 건 일레노이였겠지만 지금은 내가 일레노이니까. 이스마힐은, 내가 나라는 걸 모르니까...’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스마힐을 향한 마음이 퇴색되지는 않았다.
‘이제는 내가 지켜줄게요. 이스마힐.’
현생에서 죽기 전에 자기가 당했던 고통을, 이스마힐이 자기 때문에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감정이었다.
이용 당하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동정과 연민이 크게 일었었다.
그러나 지금 이스마힐을 떠올렸을 때 드는 감정은 연민이 아니었다.
단순히 고마움인 것도 아니었다.
‘그럼? 좋아해?’
해민이 자신에게 묻고 있을 때였다.
“진전은 있느냐.”
뒤에서 그 소리가 들렸을 때 해민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는 것은 그냥 있는 말이 아니었다.
“폐하.”
“너를 놀라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몇 번이나 너를 불렀다.”
딱히 사과를 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듯이 이스마힐이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이스마힐은 해민의 바로 뒤에 있었고, 자기가 불러도 해민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 책을 같이 보려고 한 것 같았다.
해민은 이스마힐이, 자신의 운명이 적힌 책을 본 줄 알고 더욱 경악했다.
“폐하...”
“신기하구나. 내게는 그림 같은 이것이 어찌 그대에게는 해독이 된다는 말인지. 황비가 이것을 해독하느라고 밤낮 없이 수고가 많구나.”
모르는 거구나.
이스마힐은 이걸 봐도 읽지 못하는 거구나.
한편으로 안심이 되어 해민은 그를 바라보았다.
“송구하옵니다.”
해민이 말하며 허리를 숙이자 이스마힐이 고개를 저었다.
“허리를 숙이지 말라고 내가 전에도 이르지 않았느냐.”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명심하겠사옵니다.”
“되었다. 요즘에는 정신을 다른 데에 팔고 있는 것 같구나.”
이스마힐이 말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이스마힐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해민은 그런 이스마힐을 보면서 이스마힐이 그곳에 온 것이 다른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스마힐은 어느덧 해민이 보고 있던 책에 눈길을 주었다.
“계속 보거라. 네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겠다. 대제사장도 네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네가 중요한 것을 알려줄 수 있을 거라고 대제사장은 기대를 많이 하는 눈치이다.”
“그러하옵니까.”
그 말을 듣고나니 더욱 근심이 커졌다.
책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묻는다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래도 쉬엄쉬엄 하거라. 일레노이.”
“그렇지 않아도 쉬려고 하였사옵니다.
해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덮었다.
이스마힐이 읽을 수 없는 글씨라고는 하지만 괜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제사장은 그리 해서 책임을 너에게 떠넘기고 싶은 것일 게다. 대제사장은 요즘 제대로 대언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신께서 대제사장에게 더 이상 계시를 주시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옵니까.”
“대제사장이 하는 말들이 틀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일은, 그 일이 닥치기 전에는 신비로워보여도 그것이 실현되고 보면 무의미한 경우가 허다하지 않느냐. 대제사장은 자기가 한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이제는 예언하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다.”
“폐하. 미래는 변하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인해서 계속 변하옵니다.”
해민이 말하자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해민에게는 꼭, 네가 지금 대제사장을 두둔하기 위해서 나에게 대항하느냐 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해민은 자기가 실수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눈을 꾹 감았다.
그 모습이 이스마힐에게는 귀엽게 보여서 이스마힐은 그런 해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전에는 왜 온 것이냐. 할 말이 있었던 것 같던데.”
“용안을 뵙고 싶었사옵니다. 평안하신지. 멀리에서라도 살피고 싶었사옵니다.”
처음부터 두란트의 일을 꺼내 입에 올리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아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를 어찌하기를 바라느냐.”
“폐하께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껏 과분한 사랑을 넘치도록 주셨사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천천히 갚아나갈 것이옵니다.”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한 얘기가 오고갔느니라. 네가 내게 바친 것에 대해서 말을 하였다. 대신들은 아직 너를 믿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하다. 일레노이.”
해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루 아침에 이스마힐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겨우 금궤 몇 짝을 주었다고 이스마힐의 마음이 바뀐다면 이스마힐에게도 문제가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던 것을 마저 보거라. 나는 잠시 쉬다 돌아가 정무를 돌봐야 하느니라.”
“차를 올리겠사옵니다. 폐하.”
“그럴 것 없다. 네가 책을 보는 모습이 고와서.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구나.”
이스마힐의 목소리가 왠지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해민은 지금 자기가 그의 말을 거절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의자에 앉았다.
“내가 없다고 생각하거라.”
이스마힐은 그렇게 말을 하고 해민의 뒤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집중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도 이스마힐은 계속 자기를 신경쓰지 말라고만 했다.
해민에게는 다시금, 저를 향해 달려오던 이스마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 모습을 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에게 달려와 자기를 끌어안아준 이스마힐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해민은 왠지 자신의 상처가 치유받는 것 같다는 생각에 잠겼다.
그 이스마힐이 지금 바로 해민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뒷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가까스로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울어버린다면 이스마힐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할 테고, 그러다보면 설명할 수 없을 이야기에 도달하게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