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3 =========================
마주 닿은 가슴에서 일레노이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일레노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게 되자 이스마힐도 일레노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조심하거라. 갑자기 가구의 배치를 바꿀 때는 이것 저것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예, 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
해민이 말하자 이스마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해민을 떼어냈다.
해민은 이스마힐이 저를 떼어놓자 아쉬움을 느꼈다.
그렇다고 대낮부터 뭔가를 해 줬으면 하고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감격스런 순간이 이대로 그냥 끝나버린다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왜 이리 창백한 것이냐, 일레노이. 산책도 하고 햇볕도 쏘이거라. 너무 안에만 있지 말고 말이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말을 하다보니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기는 한가 싶기도 했다.
어제는 일레노이를 죽이겠다고 벼르던 자신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해민은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밝게 웃으며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그대 혼자서는 무리일 것이다. 에르모나도 그대가 벌여놓은 일을 보면 도망가 버리려고 할지 모른다. 대전의 시녀들이라도 보내줄 테니 그것까지 거절하려고 하지는 말거라. 너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만 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거절하지 말거라.”
또 일레노이가 안 된다고 할까봐 이스마힐의 말이 자꾸만 구차하게 길어졌다.
“예, 폐하.”
“그럼. 계속 수고하거라. 일레노이.”
이스마힐이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다시 예의 그, 불편함이 표시나지 않는 걸음걸이가 되어 있었다.
그곳을 나서기 전에 해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머리의 그것은. 잘 어울리는구나. 네가 원한다면 좋은 것으로 사주겠다.”
이스마힐의 말에 해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또 그러시옵니까. 폐하. 폐하께서 그러시니 황실 살림이 거덜나는 게 당연한 것 아니옵니까?”
해민의 쾌활한 목소리에 이스마힐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스마힐은 속절없이 붉어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겠다고 느껴졌는지 그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잠시 후에 시종들이 와서 금궤를 가져갔고 그 후에는 대전의 시녀들이 왔다.
모두들 해민을 황비 마마로서 예우했지만 해민에게 살갑게 구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었기에 해민도 새롭게 상처를 받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가 괜한 일을 벌여서 그대들이 피곤하게 되었구나. 잘 부탁하겠다."
해민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뜨악한 표정을 다 숨기지도 못하고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자기들의 실수로 황제 폐하께 누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은 것처럼 상실하게 몸을 움직였고 그 덕분에 방은 점점 제 몰골을 찾아갔다.
해민이 나서서 일일이 지휘를 할 필요도 없었고 대전의 시녀장이 시녀들을 지휘해 일을 했다.
해민은 오히려 그곳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소심하게 이런 저런 일들을 하다가 갑자기 자기 책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디로 갔지?!”
분명히 책을 올려두었던 자리가 지금은 비어 있었다.
“책이...”
해민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혼잣말을 했다.
“뭐라 하셨는지요, 황비 마마?”
가까이에 있던 시녀장이 물었다.
“여기에 있던...”
시녀장에게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해민의 책을 들고 그것을 책장에 끼우려 하고 있는 시녀를 발견했다.
해민은 십년감수한 표정이 되어 시녀를 불렀다.
“되었다. 그것은 거기에 둘 것이 아니다.”
해민이 그렇게 말하며 다가가자 책을 가지고 있던 시녀가 사신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덜덜덜 떨며 책을 해민에게 주었다.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황비 마마. 모르고 그런 것이오니 제발 용서하여 주옵소서.”
해민은 시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느새 시녀장까지 다가와서 시녀를 위해 빌어주었다.
“마마. 제딴에는 잘 하려고 하다가 그런 것이오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해민은 그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내가 왜 화를 내겠느냐.”
해민은 책이 다시 제 수중으로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말했다.
그러자 시녀와 시녀장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희는 다시... 저희 일을 하여도 되올지요?”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한 것이 아니냐.”
해민은 자기만 혼자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서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며 다시 자기들의 일을 했다.
해민이 아니라 일레노이였다면, 그 시녀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기에 의문스러운 그 행동 때문에 그대로 끌려가 등에 채찍질을 스무 대는 맞았을 거라는 것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지만, 해민에게만은 끝내 그 의문이 풀어지지 않았다.
황비 마마와 같이 있는 것이 어색하고 겁나 죽을 것 같던 시녀장과 시녀들은 몸에서 땀이 날 정도로 부지런히 일을 했다.
빨리 일을 끝내야만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을 했기에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게으름을 부리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쉬어가면서 하여라."
해민이 아무리 그렇게 말을 해도 모두들 그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고 기록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일을 끝냈다.
사단장이 방문한다고 해서 대청소를 하던 게 생각나서 해민은 혼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웃은 것 뿐이었는데 모두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었다.
왜 그러시냐고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시녀들과 시녀장은 혹시라도 자기들 중 누군가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가 하면서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겁먹은 얼굴로 해민의 표정만을 살폈다.
"그, 그냥, 신경쓰지 말고 하던 일들을 하여라."
해민이야말로 기가 질려서 말했고 그 말에 시녀들은 다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다 끝났다고 시녀장이 말을 했을 때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원을 달리하는 청소여서 바닥은 그야말로 파리가 앉았다가 미끄러질 것 같이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흘렀다.
벽은 처음의 색보다도 더 깨끗해진 것 같았고 모든 물건이 아예 새 것처럼 깨끗해졌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책상이 새로 들어왔는데 이스마힐의 선물이었다.
이스마힐의 서재에 있던 것 중에 이스마힐이 가장 아끼는 거였다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만족스런 선물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어쩌다보니 이 세계에서는 황비로 불리고 있지만 해민은 악세사리나 옷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이런 책상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책을 연달아 대여섯권을 펼쳐 놓아도 자리가 남을 것 같은 책상이 해민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시녀장은 책상을 배치해놓고, 혹시 황비 마마가 황제 폐하의 선물을 싫어하면 어쩔지 걱정을 했는데, 누가 보더라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분명한 황비 마마의 표정을 보고 안도했다.
해민은 몇 번이나 책상을 쓸면서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방이 그렇게까지 바뀐 것은 해민에게 마술처럼 느껴졌고 시녀장과 시녀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불편해서 다시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앞으로 서로 다시 마주치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피차가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해민의 입에서, '수고했으니 이제 그만 돌아들 가 보거라' 라는 말이 들렸을 때 시녀들과 시녀장은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서둘러 사라졌다.
***
금궤가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 에르모나는 자기 심장을 도둑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을 어찌 다 드릴 수가 있다는 말인 거냐고 에르모나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황후전에 다녀오라 해서 다녀왔더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평소에도 그리 친하게 지낼 일 없던 대전의 시녀들이 득시글대고 있어서 에르모나는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들어가려고는 했는데 에르모나를 발견한 황비 마마가 또다른 심부름을 시키는 바람에 에르모나는 일이 전부 끝난 후에야 현장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황비 마마가 시킨 일을 하면서도 혹시나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금궤가 전부 다 사라지다니.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사라지다니.
황제 폐하도 매정하시지.
세상에. 아무리 황비 마마가 그걸 다 가져가시라고 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걸 정말로 다 가져가 버리실 수가 있는 건가.
자기 것을 뺏긴 것도 아닌데 정말 눈물이 나올 것처럼 서운했다.
“황비 마마. 어찌... 아, 정말 어찌...”
그러나 새로 들여놓은 책상 앞에 앉은 해민은 책에서 잠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에르모나가 한 번 더 말을 하려고 했을 때 그는 기어이 고개를 들고 에르모나를 내보냈다.
"에르모나. 이 일이 나에게 급하다는 것을 정말 모른다는 것이냐. 자꾸 그렇게 나를 방해한다면 나도 화를 낼 수밖에 없다."
에르모나는 평소와 다른 황비의 모습에 기가 질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가야 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면서는 그게 평소의 황비 마마가 화내는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바로 호통을 치면서 몸이 날아가버리도록 뺨을 후려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매질이나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을 사람이 고작 한다는 말이, 너 계속 그러면 나 화낸다?! 라는 거였다.
그런데도 어제 탑에서 돌아온 이후에 계속 보여준 친절하고 상냥한 모습 때문에, 겨우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에르모나는 겁을 냈다.
황비 마마가 화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황비 마마가 화가 났을 때 자기가 맞을까봐 싫은 것 보다는 황비 마마의 마음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는 생각이 들자 에르모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황비 마마가 이상해지니까 자기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황비 마마. 정말로 괜찮으신 거겠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르모나는 혹시라도 자기 입에서 나온 불길한 말 때문에 황비 마마가 잘못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것처럼,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으로 제 입술을 손으로 때렸다.
에르모나가 나가고 난 후에도 해민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란트.
해민은 다시 그 이름을 찾으려했다.
대전에서 온 시녀들이 물러가고 혼자 남고서도 해민은 바로 책을 보지 못했다.
앞으로는 책을 안전한 장소에 숨겨놓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급하게 들어서였다.
일단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해민은 자기가 도대체 뭘 믿고 책을 그렇게 함부로 방치했던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인 것 뿐이지, 자기가 이스마힐의 침궁으로 간 동안 다른 사람이 자신의 방으로 와서 책을 가져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다른 곳에 다닐 때도 책을 들고 다닐까 하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책 자체가 너무 크고 무거운데다 책을 자기가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그 책에 불필요한 관심을 가질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움베르트에게 생각이 미쳤다.
헤르만 제국의 사람들은 신의 저주를 두려워하니 움베르트가 조금만 자기를 도와주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추천, 코멘트로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덕분에 지금 노블 투베 46위입니다.
이틀 전에 99위이다가 어제 69위였는데 우와~ㅎㅎ
자다가 갑자기, 제가 중간에 삽입한 에피소드를 안 넣고 이전 버전으로 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잠이 깬 거예요.
설마설마 하면서 확인했더니 역시나.
해민이 이스마힐을 더 믿고 마음을 열게 되는 계기가 하나 정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넣었던 건데 그 전 버전으로 올렸네요.
파일이랑 폴더 관리가 제대로 안 돼서 생긴 실책. 아효 //ㅅ//
이제 수습이 된 것 같으니 이만 자러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