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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12화 (1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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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해민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이지 말거라. 그대는 황비가 아니더냐.”

이스마힐이 말했다.

이스마힐을 보면 황후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스마힐에게 미소를 지었었다.

그러나 일레노이는 그런 것도 없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거만하게 이스마힐을 바라보곤 했었다.

처음에는 일레노이에게 그 점을 확실히 교육시켜야 한다고 말하던 고관대작들이 있었지만 이스마힐이 일레노이를 용납해버리다보니 나중에는 그 말도 쏙 들어갔다.

황제를 보아도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는 황비.

그가 일레노이였다.

그랬던 일레노이가 처형을 당할 뻔 했다가 돌아오더니 아랫사람처럼 허리를 숙이는 것이 이스마힐에게는 좋게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일레노이에게 너무 심한 짓을 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유념하겠사옵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저리도 정중한 사과라니.

“다그치려고 한 말은 아니니 괘념치 말거라.”

이스마힐은 하는 수 없이 일레노이를 달래주었다.

“예. 폐하.”

해민은 왜 하필 황제가 이런 난리통일 때 온 것일까 하다가 지금 자기 꼴이 엉망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머리를 대충 고정한 머리띠가 생각나서 그걸 풀어내려 하자 이스마힐이 손을 저었다.

“그대로 두거라.”

“...예?”

“하던 것을 마저 하여도 좋다. 짐은 그저. 지나가다가 잠시 들른 것 뿐이다.”

"예... 그래도 이것은..."

그대로 두라는 명이 떨어져서 풀지도 못하고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는 그 모습에, 이스마힐은 자기가 넋을 놓은 채 일레노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잊고서 멍하니 일레노이를 바라보았다.

더할나위없이 귀여운 모습이었다.

평소의 그, 흠잡을 곳 없던 완벽한 아름다움과는 또다른 의미를 갖는 것 같은 청량한 상쾌함이 일레노이에게서 느껴졌다.

얼굴과 머리에, 위태롭게 뭉쳐진 먼지 인형 같은 것들이 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난리통 속에 서 있는 일레노이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그의 시선을 자꾸만 잡아당겨서 이스마힐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무엇을 그리도 보십니까! 라고 일레노이의 쟁쟁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아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갈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놔도, 다시 또 일레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레노이는 제 꼴이 지금 심각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정신은 있었는지 머리를 매만지고 얼굴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덕에 얼굴에 얼룩이 더욱 번지기만 했지만 귀여워보이기만 했을 뿐 이스마힐은 그 모습이 전혀 싫지 않았다.

“아... 차라도 드시겠사옵니까, 폐하?”

해민은 황제가 황비의 처소에 왔을 때 황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지만 일단 뭐라도 권하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되는대로 말을 했다.

"여기에서 말이냐."

이스마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마다 짐이 올려져 있어서 어디 하나 엉덩이를 붙일 곳이 없었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어렵겠구나.”

“곧 치워지옵니다.”

“시녀가 더 필요할 것이다. 일레노이. 네가 이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마땅히 나에게 청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저자세로 그리 하지 말거라. 어쨌거나 나는 그대의 남편이고 그대는 내 황비니라.”

“아니옵니다. 폐하. 저 때문에 지출을 늘리는 것은 안 되옵니다. 계속 그렇게 되면 결국 폐하께서는 저를 향한 원망을 갖게 되실 것이옵니다. 헤르만 제국의 제국민들을 먼저 생각하옵소서. 저는 제 품격을 지킬 것이옵니다. 황비의 품격은 시녀의 수나, 제가 가진 악세사리로 증명되는 것이 아닐 거라 생각하옵니다. 폐하께서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황비가 될 것이옵니다.”

해민이 말하자 이스마힐이 놀란 얼굴로 해민을 바라보았다.

"아, 악세사리... 폐하. 먼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그것을 팔았사옵니다. 폐하께서 선물하신 것들이라 들었사..."

아니지. 들었다고 하면 안 되지. 내가 스스로 알아야 하는 거지.

해민은 깜짝 놀라 입술을 모으고 눈동자를 굴리다가 말을 고쳤다.

"폐하께서 선물하신 것들이라 너무 소중했사오나 황실 형편이 좋지 않다고 들어, 아니, 좋지 않은데, 제가 이런 것들을 갖고 있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생각되어..."

해민은 말이 나온 김에 잘 됐다고 생각하며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의 시종들이 들여놓고 간 금궤 상자를 가져다 이스마힐의 앞에서 열었다.

두 손으로 들면 들어올려질만큼, 크지 않은 크기의 상자였으나 그 상자 안에 금화가 가득 가득 들어있어서 무게는 상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스마힐은 그곳에 들어오자마자 그것들을 보았었다.

그러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묻는 것이 꺼려져서 호기심을 누르고 있었다.

“폐하. 폐하께서 소인에게 주셨던 것들이옵니다.”

소첩이라고 해야 하나? 하다가 해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오버라고 생각하고 소인이나 소신이 적당하다고 스스로 타협했다.

“폐하께서 제게 보여주셨던 마음은 감사히 받았고 지금도 간직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황실의 재정이 어려운 판에 제가 이런 것들로 옷장을 채우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사옵니다.”

해민은 다시 한 번 말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수 없이 잘 했다고 스스로 흐뭇해했다.

이스마힐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해민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일레노이. 혹시 누가 찾아와서 너를 겁박하였더냐.”

“아니옵니다. 폐하. 감히 누가 그러겠사옵니까. 황제 폐하의 황비를 말이옵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리 되지 않도록 소인을 지켜주실 것이 아니옵니까.”

말이 술술 나왔다.

나는 당신을 믿으니까 자꾸 나 죽이려고 하면 안 돼.

그런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황제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그렇지만...”

이스마힐은 내친 김에 해민의 옷장으로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의 훵하니 비어있다시피 한 그곳을 보고 이스마힐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랬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죽음이 두려웠던 것이냐.”

이스마힐이 말했다.

해민은 그 자리에 선 채 생각했다.

죽음이 두려웠을까.

그랬던 것일까.

그리고 이스마힐을 향해 돌아섰다.

“그렇사옵니다. 죽음이 두렵사옵니다.”

이스마힐은 그렇게 말하는 해민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금궤는 모두 가져가시옵소서. 폐하. 폐하의 것이옵니다.”

“그러면 너에게는 무엇이 남느냐.”

“저는. 살아남지 않았사옵니까. 목숨을 얻었으니. 밑진 장사는 아니었사옵니다.”

그냥, 가볍고 밝게 말을 하려고 했는데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두 번이나 죽는다는 것은 절대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두 번을 산다는 것은 두 번을 죽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 번 산다는 건 별로 좋은 게 아닌 건지도 몰라. 이런 이상한 사람의 몸에 빙의돼서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미움을 받고 그러는 건...

해민이 조그만 입술을 삐죽거리며 혼자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이스마힐은 그런 해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네가 그리 말하니. 그럼 이것들은 받도록 하겠다.”

"예... 폐하. 무거울 테니 직접 옮기지는 마시고. 아. 알아서 하시겠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겠다.

입을 열어서 무슨 말인가를 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이스마힐이 이상하다는 듯이 저를 바라본다는 것을 해민도 깨달았다.

입만 열면 폭탄이구나.

해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스마힐은 일레노이를 바라보았다.

새벽의 일을 사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을 다시 꺼내는 것도 무엇해서 입을 다물었다.

일레노이의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일부러 와 봤던 것인데 저를 대하는 태도에 거리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던 이스마힐의 시선이 조금 위로 향하였다.

그 아래에 서 있는 일레노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옷장 하나를 옆으로 빼내면서 두 개의 옷장에 걸쳐 올려져 있던 상자 하나가 삐죽이 옆으로 빠져나와 있는 것이 이스마힐에게 보였다.

그것이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처음에 이스마힐은 자기가 잘못 본 거라고 여겼다.

꽤 무게가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그렇게 속절없이 떨어져버리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마힐은 일레노이에게 경고를 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틈이 없었다.

이스마힐은 자기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상자가 옆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하거라, 일레노이!”

이스마힐이 그렇게 말했지만 해민은 이스마힐이 한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예?”

말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갑작스런 말이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고 해민은 그저 이스마힐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레노이! 피해라!"

이스마힐은 일레노이의 머리 위로 곧 떨어질 것 같은 가방을 보다가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천천히 걸으면 황제가 다리를 전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미 알고들 있는 사실이니 주의깊게 본다면 황제의 걸음걸이가 다른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기는 하겠지만 황제가 걷는 것을 보고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잊는 경우가 많았다.

해민도 마찬가지였다.

책에서 이스마힐이 다리를 전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서 봐서 이스마힐의 걸음걸이가 때때로 조금 불편해보인다고 느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더없이 자연스러워 보였기에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이스마힐과 걷다보면 저절로 이스마힐의 속도에 익숙해졌다.

누구도 황제를 재촉하지 않았다.

이스마힐도 저를 동정하는 것 같은 그런 시선들이 싫어서, 빨리 걷는 법이 거의 없이 걸음걸이를 신경썼다.

그러나 일레노이의 머리 위로 무거운 가방이 떨어지려 하는 것을 본 그때에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따질 여유가 없었다.

해민은 이스마힐이 갑자기 허둥대면서 저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팔은 제 손을 잡으려는 것처럼 뻗어져 있었고 허리 아랫부분이 불편하게 뒤틀리다가 펴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해민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미안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이스마힐의 손이 해민의 손목으 꽉 붙잡았고 그대로 자신의 품 안으로 해민을 당겼다.

해민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제 뒤로,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상자가 떨어질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도대체 뭐가 들어있었던 것인지, 상자는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고 해민은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할 뻔 했는지, 그리고 이스마힐이 왜 그렇게 서둘렀던 것인지 알게 됐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자기도 놀라서 식은 땀이 날 것 같았지만 해민은 이스마힐이 더 걱정됐다.

다리도 불편한데, 그리고 그런 모습.

보이기 싫었을 텐데 보인 거구나 하는 생각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스마힐이 자기를 일레노이로 생각하고 서운하게 굴어도 앞으로는 얼마든지 참아주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랬다.

해민은 이스마힐에게 안겨있던 팔을 풀어 이스마힐을 안아주었다.

이스마힐은 해민의 뒤에 떨어진 상자를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다가 해민이 저를 안아주자 잠시 어리둥절한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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