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
***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은 아침 일찍 찾아왔다.
후작 부인은 에르모나에게서 전갈을 받고 바로 입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참다가 아침이 밝자마자 서둘러 입궐을 한 거였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출궁이 허락되자마자 들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행렬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헤르만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에서 가장 유서깊은 가문 중 하나인 가문의 수장이 여러 대의 마차를 끌고 입궐을 하였으니 거기에 시선이 모아진 것은 당연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저런 질문 공세가 이어졌겠지만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이 얼굴을 한 번 보이자 거의 무사 통과였다.
무슨 일로 행차를 한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황비 마마의 별궁을 찾아온 거라는 짧은 답변이 나왔을 때는 궁금증이 더욱 커지기만 했다.
황비 마마의 악세사리와 옷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잔뜩 기대감에 부푼 채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은 앞 뒤 가릴 것 없이 별궁으로 들이닥쳤다.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이 어떤 용무로 온 것인지 알고 있던 시종이 후작 부인을 잠시 기다리게 했다.
해민은 그동안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돌아왔다.
황후는 생전 처음으로 황비의 문안 인사를 받고 영 어색하고 적응이 되지 않는 얼굴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황비의 문안 인사를 받으니 참으로 좋다는 말을 아낌없이 하였다.
해민은 앞으로 아침 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올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 말을 들은 황후는 깜짝 놀라 두 손을 내저어가며 황비를 말렸다.
그럴 것은 없다고 말하며 타협 끝에 황후는, 이틀에 한 번, 아침에 오는 것으로만 하라고 했다.
해민은 그것으로는 예를 다 하는 것 같지 않다고 하였지만 황후도 그때부터는 쉽사리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그 선에서 마무리를 하는 것으로 하고 해민은 돌아왔다.
이스마힐에게도 문안 인사를 올리고 싶었지만 이스마힐이 자신을 보고 싶어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일레노이를 향한 화가 풀리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는 생각에 해민은 어전이 있는 곳을 바라만 보다가 돌아왔다.
해민은 눈 앞에 보이는 여러 전각들을 보면서 생각과 마음을 정리했다.
하루가 지났다.
혹시 잠에서 깨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다가 자기가 지금 뭘 바라고 있는 건가 하고 서둘러 고개를 저었었다.
혹시라도 자기가 방금 한 생각을 읽고 어딘가에서 해민을 주시하던 신이 정말로 해민의 바람대로 해 주겠다면서 해민을 차에 치어 죽은 모습으로 돌려보낼까 해서 걱정이 됐다.
책을 보고 하나의 행동이나 말이 일으키는 연쇄작용을 알게 된 후로 해민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조심스럽게 되었다.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조심하게 된 것이다.
그 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날처럼 보였지만 만약 그 전날 이스마힐이 일레노이를 사면해 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을 날이었다.
이스마힐이 일레노이를 따라서 죽었을 날이었고 헤르만 제국의 제국민들이 자기들이 사랑하던 황제를 잃을 날이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그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두란트. 그럼 두란트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게 되는 거지? 아직 그걸 못 봤는데?'
그 생각이 들자 해민은 두란트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궁금해져 서둘러 별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책을 찾기도 전에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과 마주쳤다.
"제국의 꽃이신 황비 마마께 인사 드리옵니다."
후작 부인은 더할 수 없이 우아한 자태로 인사를 했다.
저거야말로 어려서부터 배워온 교양인가보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흠 잡을 곳이 전혀 없는 우아한 동작이었다.
"급히 불러서 미안하오. 그런데도 와 주어서 참으로 고맙소."
해민은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두란트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책을 먼저 읽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미안하지만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소."
해민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그런 표정에서는 응당,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일을 먼저 보시옵소서, 마마 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기에 해민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안심했다.
그러나 후작 부인은, 거래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황비 마마를 놓아드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예?"
해민이 오히려 놀라서 되묻자 후작 부인이 웃었다.
"황비 마마. 지금까지 참았사옵니다. 제 자제력은 모두 고갈이 돼 버려서 이제는 조금도 더 참을 수가 없사옵니다. 바쁘시거든 제가 먼저 그것들을 보여주기라도 하옵소서."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은 애교를 부리듯이 말했다.
해민에게는 전혀 통할 리가 없는 애교였지만 그래도 해민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은 거래를 한 후에 다시 또 돌아가야 하고, 두란트의 운명을 보는 것이야 잠시 뒤로 미룬다고 그 운명이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해민은 생각했다.
해민은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쉰 살이 넘었다고 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탐욕스럽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수는 있겠지만 해민은 섣부르게 아르마리안 후작 부인을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후작 부인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가져오너라."
해민이 에르모나에게 말하자 그때까지 그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에르모나가 당장 물건들을 가져왔다.
“팔고 싶은 건 이것들이오.”
해민이 물건들을 내보이자 후작 부인은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한동안 말을 하지도 못했다.
“어떻겠소. 전부 사 줄 수 있겠소?”
“그렇긴 하옵니다만. 이것은. 값이 상당할 텐데...”
후작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흥정을 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해민이 후작 부인을 보고 웃었다.
“이것을 직접 사용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고. 선물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오. 자기들에게 선물하려는 물건을 사면서 흥정을 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심히 서운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오.”
그 말이 통할지 어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후작 부인의 허영심을 건드려 그것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통했다.
후작 부인은, 어차피 자기가 죽으면 그 재산이 누구에게 돌아가겠냐면서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이 좋은 것을 누리며 행복해하는 것을 보는 것이 자신의 낙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후작 부인이 그 값을 전부 다 금화로 지불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해민의 상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비단포로 가져오느니 금화가 나을 것이라 생각하였사옵니다. 황비 마마."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기서는 비단포도 돈처럼 사용되는가 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해민은 신기하다는 듯이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황비 마마께서 부르셨다고 하기에 아낌없이 가져왔사옵니다. 과연 황비 마마께서는 제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셨사옵니다. 그런데. 이리 전부 처분을 하시면 황비 마마께서는 무엇을 입으려 하시는 것이옵니까.”
후작 부인은 순전히 호기심에서 묻는 것이라는 듯 물었다.
"그것까지 걱정해 달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리 많은 것이 나에게 필요치 않다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일 뿐입니다."
일부러 까칠하게 말 할 필요도 없는 거라서 해민은 담담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노여움이 풀린 것은 그저 변덕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시옵니까. 아니면. 황제 폐하께서 노여움을 완전히 푸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후작 부인의 짓궂은 말에 해민이 웃었다.
“그러면 나는 곧 다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 것인가 보군요. 죽기 전에, 아직 처분 권한을 갖고 있을 때 내게 이것들을 사서 참으로 다행스럽겠습니다.”
해민은 후작 부인의 말에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충분히 화가 날 수도 있는 말이었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해민의 기분을 살피는 것 같은 속 깊어 보이는 표정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전혀 유쾌한 것들이 아니었는데 시선과 표정으로 왠지 해민을 위로하는 것 같은 느낌에 해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는 이곳에서 해민이 아닌 일레노이였고 황비 일레노이가 얼마나 패악무도한 사람이었는지는 해민도 점차 더 자세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일레노이가 유독 이 후작 부인에게만 친절하게 굴었을 리도 없을 것 같은데 후작 부인이 자기에게 왜 이리 친절을 베푸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기는 했다.
에르모나는 후작 부인이 황비 마마에게 하는 말을 들으면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아무리 자기가 대단한 가문의 사람이라고는 하나, 그리고 아무리 황비 마마가 처형 당하기 직전에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나왔다고는 하나 제국의 황비 마마께 어찌 그리 불손하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해서 에르모나는 자기라도 한 마디를 해야겠다고 별렀다.
그러나 웬일인지 황비 마마가 후작 부인의 말을 들으면서 기분이 상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짓는 웃음이 아니었다.
예의상 짓는 웃음?
황비 마마가 그런 웃음을 지은 적도 있기는 했던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에르모나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들기만 했다.
“예.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황비 마마.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요. 여러 모로 말이옵니다. 황비 마마께서 살아 계셔서 참으로 기쁘옵니다.”
"그리 말해주니 나도 고맙습니다. 참으로 큰 일을 겪었는데, 축하를 받으니 이제 더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축하 받으셔야지요. 응당 축하받으셔야 하옵니다. 넘치도록 축하해 드리겠사옵니다. 황비 마마. 저의 축하라도 좋다면 말이옵니다."
"한 번으로 족합니다."
해민이 선을 긋자 후작 부인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언제든지 다시 불러 주시옵소서. 황비 마마. 이런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 벗이 필요하면 불러주시옵소서. 아니면 제 누추한 성에 찾아와주시는 것도 언제든지 환영이옵니다. 황비 마마.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옵니다."
"말 벗이야. 가까운 데서 구해보도록 하겠소."
해민의 말에 후작 부인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황비의 앞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후작 부인이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에르모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황비 마마의 앞에서 누가 감히 저렇게 웃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 자신의 앞에 있는 황비 마마를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 황비 마마. 짠해서 어떡하냐는 듯이.
그러나 그런 일을 겪었으면 의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어야 했을 황비 마마의 얼굴은 지극히 평안해 보였다.
그리고 팽팽한 기 싸움에서 오히려 후작 부인이 진 것처럼, 후작 부인이 웃음을 거두고 황비 마마의 표정을 살폈다.
에르모나에게는 신기한 장면이었다.
"저는. 그럼 이제 서둘러야 하겠사옵니다. 황비 마마. 환대를 받고 돌아가옵니다."
후작 부인이 일어나며 말했다.
자기가 사들인 것들을 빨리 자랑하고 싶어서 마음이 급한 것 같았다.
“돌아갈 때는 마차가 가벼울 줄 알았사옵니다만. 만만치 않게 무거울 듯하여 참으로 기분이 좋사옵니다.”
후작 부인이 돌아가고 해민은 텅 비어버리다시피 한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후작 부인의 말대로 몇 벌은 남겨둘 것을 그랬나 싶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옷 한 벌의 값이 그렇게 비싸다는 것을 알고 해민은 한동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에르모나가 자기를 놀리는 것인가 하면서 진지하게 에르모나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에르모나는, 황후 마마가 매주 첫째날 성 밖의 걸인들에게 적선하던 행사도 몇 달 전부터 중단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황실의 형편이 어려워져서 모든 지출을 줄이고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도 이스마힐은 엘리노이가 원하는 것을 구해주는 데에는 아끼지 않고 돈을 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그리 행복한 커플이 되지 못했다는 게 진실이었다.
"너무 서운하옵니다. 마마. 눈물이 나올 것 같사옵니다."
에르모나가 옷장을 보며 말했다.
"그럴 것 없다. 에르모나. 나는 무엇을 걸치건 잘 어울리지 않겠느냐. 나같은 사람은 원래 그런 식으로 해서 주위 사람들과 균형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안 생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수로 나와 경쟁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서 악세사리와 옷까지 최상의 것으로 입는다면 말이다."
에르모나는 잠시 벙찐 것처럼 황비 마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비 마마 역시 지금 자기처럼, 아니,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충격을 받았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은 오히려 개운해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자기가 입을 것은 화려하고 비싸지 않은 것으로 몇 벌 새로 맞추면 될 것 같았다.
"텅 비어서 이제는... 옷장 마저도 쓸모가 없겠습니다. 이것들도 빼내고 나면 정말로 휑 하겠사옵니다."
에르모나는 정말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지, 눈가를 손등으로 찍으며 슬금슬금 밖으로 나갔다.
주군의 운명에 자신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해민은 별 생각이 없었다.
지금 옷이나 악세사리에 미련을 두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에르모나에게 옷 짓는 기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해민은 제 방 청소를 시작했다.
시녀의 수를 줄여버리는 바람에 에르모나는 할 일이 많았고 제 방 청소쯤은 자기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치렁치렁한 머리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앞으로 흘러내려 해민은 특단의 대책으로 손수건을 접어 머리띠를 만들었다.
그리 잡아 고정을 시켜놓으니 더 이상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아 편했다.
에르모나의 말대로 그동안에는 옷이 많아서 옷장도 많았고 옷장이 많다보니 공간이 좁아보였는데 이제 옷이 줄자 옷장도 정리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손을 걷어붙인 김에 일머리를 잡아 일을 하는데 허기가 돌아 과일을 대충 베어 물고서 일을 계속 했다.
나중에는 땀이 날 정도로 움직였고 에르모나가 돌아오기 전에 정리를 어느 정도 끝내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더욱 서둘렀다.
대청소가 원래 그렇듯 지금은, 치우기 전보다 훨씬 더 난장판이 되어 있었기에 에르모나에게 걸리면 잔소리를 꽤나 듣겠다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을 때 해민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에르모나. 금방이야. 금방. 지금은 난장판 같겠지만 옷장을 빼고, 내가 쓰지 않을 것들을 빼서 정리를 하면 훨씬 공간도 넓어질 거야. 그러면 거기에 책상을 들여 놓을 거고. 책을 보려고 할 때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어둡고 자리도 불편하고.”
조잘거리는데도 답이 돌아오지 않아 뒤를 돌아보자 이스마힐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