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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8화 (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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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는 생명이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모든 것이 요동치고 폭주하는 느낌이었다.

    그러지 말아야했다고, 그를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고 수도 없이 후회했지만 이스마힐은 만약 자기가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레노이는 치명적인 늪이었다.

    끝도 닿지 않는 늪.

    그런 사람이었다.

    목숨을 주어 사랑했고, 그의 마음과 시선을 얻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일레노이에게 빠져든 동안 이스마힐은 제국을 돌보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제국민들은 이스마힐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고 결국 그것이 이스마힐을 결단하도록 만들었다.

    일레노이가 두란트와 여전히 만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만나서 단순히 우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스마힐은 알고 있었다.

    일레노이가 이스마힐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처럼 약을 달여 올렸을 때 감격해서 받아마시다가 눈이 침침해져 황의의 진료를 받고서야 이스마힐은 일레노이에게서 한 걸음 물러설 수가 있었다.

    지금도 이스마힐은 그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일레노이의 계획대로 자신이 시력을 잃어간다고 믿게 하면서 이스마힐은 일레노이를 미워하고 싶어했다.

    이스마힐이 같이 있는 공간에서, 이스마힐이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두란트에게 매달리던 일레노이를 보면서 이스마힐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것으로도.

    이스마힐은 일레노이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다.

    무슨 미련이었을까.

    정원에서 일레노이와 황후를 발견했을 때 그 모든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다.

    너무 많은 기억의 양에 이스마힐이 비틀거릴 정도로.

    이스마힐은 일레노이가 황후에게 어찌 대할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탑에 갇혔던 경험 때문에 조금은 얌전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은 했다.

    그러나 일레노이는 이스마힐이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일레노이는 황후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더니 이내 어떤 확신을 갖게 된 것처럼 황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경외하는 듯한 태도로 황후에게 인사를 했다.

    황후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태도로 일레노이를 대했다.

    이스마힐은 그런 황후가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그런 감정을 내색조차 하지 않는 황후를 보면서 이스마힐은 때때로 황후가 두려웠다.

    일레노이가 죽은 후 자기도 일레노이의 뒤를 따르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황후에 대한 마음도 근거가 되었다.

    황후를 향해 남아있는 감정은 죄책감이 전부였다.

    그러니, 자기가 사라지고 황후가 양자를 들여 헤르만을 다스리도록 한다면 최상의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았다.

    이스마힐은 그 자리에서 일레노이와 황후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일레노이가 돌아선 후에 황후가 가던 길을 멈추고 일레노이를 바라보는 것을 이스마힐은 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싸늘한 표정이 황후의 얼굴에 떠올랐지만, 그거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인 거라고 이스마힐은 생각했다.

    이스마힐은 황후가 사라진 후에 일레노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침궁으로 불렀다.

    그것이 잘한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침궁으로 들어와 저를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 일레노이를 보면서 이스마힐은 불안한 정념이 저를 휘감는 것을 느꼈다.

    “폐하...”

    일레노이의 목소리가 흔들린 것 같았다고 이스마힐은 생각했다.

    제 앞에서 일레노이가 이리 구는 것은 본 적은 없었다.

    두란트의 앞이라면 몰라도.

    이스마힐은 고개를 돌렸다.

    두란트를 죽이려 했던 계획을 어찌해야 할지 이스마힐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레노이를 죽이고 자기도 그 뒤를 따르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차라리 쉬웠다.

    그것은 헤르만 제국민을 위한 거라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란트는.

    두란트를 죽이는 것은.

    그것이 두란트를 향한 질투 때문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지, 이스마힐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이스마힐은 일레노이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생각이 자라도록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늘밤 그와 몸을 섞고 나면 출궁을 시키고 다시는 일레노이를 보지 말아야한다고 그는 다짐했다.

    일레노이는 웬일로, 화려한 악세사리를 하지 않고 왔다.

    일레노이가 그것들을 얼마나 아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이스마힐은 일레노이가 갑자기 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상관 없는 일이다.

    그렇게 이스마힐은 생각했다.

    그를 통해 쾌락을 얻고 그에게 모든 욕망을 분출해내고 이 밤을 끝으로 그를 영영 잊겠다고 이스마힐은 마음 먹으며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다가오너라.”

    이스마힐이 말하자 일레노이가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벽마다 걸려있는 촛대에서 불이 밝혀졌다.

    이스마힐은 희롱하듯 일레노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벗어라.”

    이스마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일레노이가 살짝 몸을 떨었다.

    놀란 듯한 모습을 보면서 이스마힐은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이스마힐은 손으로 제 앞섶을 문질렀다.

    그런 모습이 해민에게는 한없이 낯설었다.

    침궁에서 이스마힐이 저에게 원한 것이 무엇인지는 뻔한 거라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저에게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그에게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침대로 가서 눕거라.”

    이스마힐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혼자서 술잔을 비웠다.

    “저도...”

    해민은, 긴장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해 놓고 놀라며 이스마힐을 바라보았다.

    “무엇이냐.”

    “저도. 한 잔 받을 수 있을지요.”

    이스마힐이 차가운 눈으로 해민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은 이스마힐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 이스마힐의 빈 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지만 이스마힐이 그것을 뺏듯이 낚아채 자기 잔을 스스로 채웠다.

    해민은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지만 이 몸을 하고 있는 한 황제에게서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해민은 점저 힘이 들었다.

    누군가에게서 이렇게까지 적대적인 시선을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살면서 온갖 진상들을 다 만나봤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갑자기 연락을 끊고 해민의 인생에서 증발해버리듯이 사라졌다 뿐이지 해민을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해민이 잠시 말이 없는 것을 보면서 이스마힐은 제 잔을 비웠다.

    한 잔.

    한 잔.

    비워지는 속도가 빨랐다.

    “그리 급하게 드시면 몸이 상하옵니다. 천천히 드시옵소서.”

    해민이 말했다.

    “내 몸이 상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냐.”

    이스마힐이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해민의 가슴에 예리한 생채기를 냈다.

    그러면서도 할 말이 없는 자신의 상황이 그렇게 비참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제는 황명을 거역할 셈이냐.”

    이스마힐이 말했다.

    “어찌... 제가 그리하겠사옵니까.”

    놀란 눈으로 해민이 이스마힐을 바라보자 이스마힐은 제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이길 자신도 없으면서 위험한 싸움을 걸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마힐은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하루만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이리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하면서 이스마힐은 일레노이가 한없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목숨이라도. 이어지니 좋다 이건가보군.”

    “예?”

    해민은 이스마힐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지만 이스마힐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다려봐야 이스마힐이 술을 따라주지는 않을 것 같아 해민은 조심스럽게 술 주전자를 끌어다가 제 잔을 채웠다.

    그리고 이스마힐의 시선을 피해 술을 마셨다.

    “헉!”

    목구멍으로 용암이 들어간 것 같은 기분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서 목을 움켜쥐자 이스마힐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해민을 바라보았다.

    “무얼 하는 것이냐!”

    “어찌 이런 것을 그리 태연하게!”

    해민은 미쳤다는 듯한 눈으로 이스마힐을 노려보았다.

    황제고 뭐고, 그 순간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얼음.

    아니. 물.

    뭐든지 당장 집어넣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해민은 제 목을 움켜쥔 채 두리번거렸고 다시 한 번 이스마힐을 노려보았다.

    “무얼... 찾는 게냐!”

    이스마힐은 저마저도 당황해서 물었다.

    “물요!”

    “물은...”

    이스마힐은 침대 곁에 있던 물을 가져다 주었고 해민은 물을 한참이나 들이킨 후에야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저를 죽이려고 그런 것이옵니까?”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는지 앙칼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하다. 네 가냘픈 목에 내 분명 올무를 걸려고 했지.”

    아. 맞네.

    이 사람은 나를 죽이려고 그런 것 맞지.

    해민은 그런 질문에 그런 대답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이제는 하다하다 희한한 수를 다 쓰는구나.”

    이스마힐은 그 일로 기분이 나빠진 듯했다.

    그런게 아니었는데 어째 이 사람이랑은 계속 꼬이기만 할 운명인가보다고 생각하며 해민은 한숨을 쉬었다.

    황제 앞에서 한숨을 쉬면 안 되겠지만 그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한숨이 나와버린 후였다.

    “옷을 벗으라 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아. 그랬었지.

    해민은 일어나서 옷을 벗었다.

    그러는 동안 이스마힐은 해민의 몸이 움직이는 모습을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해민을 바라보았다.

    이스마힐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올라갔다.

    해민은 이제 곧 이스마힐이 저를 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스마힐이 침대 위에 엎드리는 것을 보고 아주 잠깐 동안, 혹시? 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이스마힐이 그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하느냐. 올라오지 않고.”

    “...예?”

    설마...

    일레노이의 역할이 황제의 페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몸에... 넣는...?

    해민은 엄청난 괴리감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생각해보니 그거야말로 그냥 제 머릿속의 고정관념에 불과했던 것인데 해민은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 단단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냐. 빨아 주어야 되겠느냐.”

    이스마힐이 해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해민의 얼굴은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덩이처럼 붉어졌다.

    “아... 아니...옵...니다...”

    해민은 난관에 부딪쳤다.

    그런 줄도 모르고 속을 비우고 황제에게 받을 준비를 하고 온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그동안의 관계에서는 매번 자연스럽게 자기가 받는 역할을 했었다.

    사전에 다른 얘기가 없었어도 그렇게 됐었다.

    그러면서 해민 자신도 그 역할을 하면서 쾌감을 맛보았기에 점점 그 역할에 익숙해져 갔던 것인데, 지금 제 앞에서 엎드리는 황제를 보고 해민은 약간 멘붕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일레노이에게 그런 옷을 입히고, 일레노이는 머리를 길려가면서 몸을 가꾸고 악세사리로 치장을 했다는 걸까 하다가 해민은 그게 이스마힐의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남색을 한다고 하더라도 남색을 할 때의 역할에 대해서는 각각 다른 의미가 부여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바텀이 아닌 탑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믿도록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해민에게는 여전히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제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매끈한 몸을 드러내고 엎드려 있는 이스마힐의 몸을 바라보자 해민의 몸에서도 점점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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