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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민은 제가 살았던 곳으로 가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에르모나는 해민이 입을 옷을 가져와서 해민이 그 옷을 즐겨 입었었다고 말했다.
해민은 옷을 갈아입다가. 자기가 즐겨 입은 옷이라면 일레노이의 취향이었을까 아니면 두란트의 취향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 중 누구의 취향이었건 간에 이스마힐의 취향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해민은 에르모나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는 어떤 옷을 좋아하셨느냐.”
에르모나는 정말로 별 꼴을 다 보겠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일레노이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왔다.
허리와 소매가 조여지고 아오자이처럼 발목까지 내려온 형식의 옷이었다.
안에 바지를 입게 되어 있고 허리 옆에 길게 옆트임이 있었지만 옷을 입고 섰을 때는 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차림에 해민이 낯설어했지만 에르모나는 그 모습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던 듯했다.
“황비 마마는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에르모나는 해민을 칭찬했다.
왜 갑자기, 무슨 꿍꿍이로 황제 폐하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황제 폐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 좋게 보였던 것이다.
“언제쯤 황제 폐하를 뵈러가면 되는 것이냐.”
해민이 묻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혹시 명이 번복되고 다시 잡아들이라는 명이 새로 내려진 것인가 하며 해민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을 때, 호위무사들 뒤로 이스마힐의 모습이 보였다.
이스마힐은 여전히 복잡한 눈을 하고 해민을 바라보았다.
해민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나가들 보거라.”
이스마힐의 말에 모두가 조용히 물러났다.
에르모나도 마찬가지였다.
“놀랐느냐.”
이스마힐이 말했다.
“아니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놀라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고하지 말라 하였다.”
“예?”
“내가 들어가는 것을 고하지 말라고 말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아아아아. 예에에. 아아아. 그러셨습니까.”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해민은 그런 것이 신기했다.
안으로 들어올 때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벌써 문 앞에,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서 있었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한 번 와 본 것이다.”
황제가 말했다.
“예. 감사하옵니다. 폐하.”
“탑에서. 그 말은 왜 한 것이냐.”
이스마힐이 물었다.
자기가 죽더라도 따라 죽지 말아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하던 것이 이스마힐의 귀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일레노이가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스마힐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몸은. 괜찮으냐.”
“괜찮사옵니다. 폐하.”
이스마힐은 하고 싶은 말들을 입 안에 가두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제 와서 일레노이가 왜 이리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겁을 먹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스마힐은 자기가 그곳에 있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스마힐이 돌아서자 해민은 마음이 급해졌다.
“폐하. 부탁드릴 것이 있사온데.”
“무엇이냐.”
이스마힐은 돌아보지 않은 채 싸늘하게 물었다.
두란트를 석방해 달라는 말을 할 거라고 예상했기에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시녀들이 너무 많사옵니다. 제게는 그리 많은 시녀가 필요치 않사옵니다.”
해민의 말에 이스마힐이 천천히 해민을 돌아보았다.
“왜... 갑자기 그러는 것이냐.”
“에르모나는 총명하고, 에르모나면 충분할 것이옵니다.”
“네가 그리 말하니. 그럼 그리하자꾸나.”
“말씀을 들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에 해민이 웃자 이스마힐이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위험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나가다보니 그 모습이 꼭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이스마힐이 돌아가고 에르모나가 들어왔다.
“폐하께서...”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더라는 말을 하려다가 에르모나는 입을 다물었다.
해민의 표정도 만만치 않게 좋지 않아서였다.
“에르모나.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지금부터는 나를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당분간 외출은 하지 않고 책을 읽을 생각이다.”
“예, 황비 마마.”
“그 황비 마마라는 말은.”
해민은 에르모나에게 말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놈을 탓해야지 에르모나를 탓해서 무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마. 그런데. 탑에 갇힌 동안 몸이 상하셔서 그랬던 것인지.”
“무어냐.”
“모습이 조금 달라보이옵니다.”
“그러하냐.”
해민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있을 뿐 에르모나가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보다 훨씬 더 고우시옵니다.”
에르모나가 말했지만 해민은 그 말은 제대로 듣지 않고 손을 내둘렀다.
황제가 좋아한다는 옷은 거동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황제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리고 황제가 언제 갑자기 또 온다고 할지 모르니까 그냥 입고 있었다.
“맞다. 두란트.”
두란트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봐야겠다는 마음에 해민은 그 페이지를 찾았다.
그러나 이스마힐이 일레노이의 처형 직전에 일레노이에 대한 명령을 거두었다는 부분을 찾았을 때 움베르트가 찾아왔다.
“폐하의 명이옵니다.”
움베르트의 말에는 위엄이 있었다.
황제의 명을 전하기 위해 온 그는 황제와 같은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일레노이는 에르모나가 눈치를 주는대로 움베르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폐위를 시키지는 않으나 궁을 떠나라는 명령이옵니다.”
그 말을 듣고도 원망이 들지는 않았다.
일레노이를 살려두기로 한 지금 그것은 그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거라고 해민은 생각했다.
“명을 받잡겠사옵니다.”
해민은 이스마힐을 대하듯이 대제사장에게 말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이스마힐에게 그것이 뼈를 깎는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해민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대제사장으로서 올리는 말씀이옵니다.”
움베르트가 말했다.
해민은 일어서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말하라.”
“그 책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저희를 위해서 해독을 해 주셔야겠사옵니다. 황비 마마.”
해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르는 척 하려고 했는데, 왠지 움베르트는 쉽게 속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움베르트의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움베르트에게는 서운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움베르트는 해민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움베르트 역시 해민이 쉽게 사실을 말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레노이였다면 분명히 움베르트의 청을 거절했을 거였고 움베르트에게는 해민이 그저 일레노이로만 보였을 것이니 움베르트가 그러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도울 수 있는 한은 돕겠다.”
해민이 말했다.
움베르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런데 황비 마마는 그 글을 어찌 읽을 수 있는 것인지요. 그 글은 어느 나라의 글이옵니까.”
움베르트가 물었다.
해민은 난처했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냥 처음부터 잡아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그것은...”
그러나 해민을 구해준 것은 움베르트였다.
“황비 마마. 혹시. 그 글을 읽으실 때 저절로 목소리가 들리옵니까?”
“어?”
해민은 움베르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움베르트는 자기가 한 말에 점점 확신을 갖는 듯했다.
“황비 마마. 혹시 그런 것이라면. 저에게는 그런 현상을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되옵니다. 저도 그런 식으로 계시를 듣사옵니다.”
“계시?”
“그것은 영적인 문장인지 모르옵니다. 그리고 황비 마마께는 그것이 해독이 되옵고 말입니다. 저는 신의 계시를 듣고 대언을 할 수 있습니다. 신은 각 사람에게 각각의 능력을 주셨으니 황비 마마께서 그 특별한 글자를 보고 이해하신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못할 것은 아니옵니다.”
“아아. 그런 거였어?”
해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밝혔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알지 못해서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움베르트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알 수가 없었다.
움베르트는 역시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우쭐해진 것 같았다.
“그러면 황비 마마. 지금은 어디까지 읽으셨사옵니까? 그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대충은 말씀해 주실 수 있사옵니까?”
이번에야말로 신중하게 답을 해야 할 때였다.
해민은 말을 고르고 골랐다.
움베르트는 참을성을 가지고 해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게... 어떤... 방대한 그림처럼 보여. 그 중에 내가 봐야 되는 문장은 아주 적은 것 같아.”
“그런 것이옵니까, 황비 마마? 그렇다면 이해가 되옵니다. 저는 황비 마마께서 책장을 빨리 넘기시는 것을 보면서 황비 마마께서 어떤 특별한 장면을 찾으려고 하시는 것 같다고 생각했사옵니다.”
“아니야. 아니야. 정작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은 별로 없어서, 한 페이지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별로 안 돼. 그래서. 막. 넘기는 거야.”
해민은 움베르트가 자기의 말에 속아 넘어갈까 걱정을 하면서 움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신을 섬기는 대제사장을 속이는 것은 꽤나 껄끄러운 일이었다.
이러다가 신의 저주가 자신에게 내려서 자신의 인생이 다시 한 번 꼬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해민이 찾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중에 움베르트에게 사과할 기회를 얻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럼. 황비 마마께서 알게 되신 내용들을 제가 알 수 있겠사옵니까?”
움베르트가 말했다.
해민은 모든 것을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해민은 자기가 말해도 된다고 생각되는 작은 것을 내보였다.
“이건... 예언서 같은 건가봐. 내가 봤을 때 거기에 그게 있었어.”
해민은, 자기가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내용이 있었다가 그 내용이 바뀌었다고 말하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아무리 움베르트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남들 같으면 이해하기 힘든 것들까지 이해해주려 한다고 하더라도 책의 내용이 바뀐 것까지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에 황제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해민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면서 말했다.
움베르트는 놀란 듯했다.
정말로 그 일을 미리 알았던 거냐고 묻는 움베르트에게 해민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그럼... 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긴다고 적혀 있사옵니까, 황비 마마? 그 다음 내용도 적혀 있사옵니까?”
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미래가 나중에 바뀌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까지 구체적으로 할 수는 없었기에 보이는 게 많지 않다는 말만 반복했다.
움베르트는 몸이 달았다.
“기다릴 수 있사옵니다. 황비 마마. 뭐라도 보이는 것이 있거든 말씀해 주실 수 있사옵니까?”
계속 버틸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책을 폈다.
이제 어디쯤을 봐야하는지 알았기에 처음부터 책의 중간 부분을 폈다.
그런 해민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드러났다.
대제사장 움베르트...
해민은 움찔하며 그 페이지를 빠르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