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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로 회귀했다 나 남잔데-2화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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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장처럼 말라 굳은 검붉은 자국을 해민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더듬고 지나갔다.

해민은 그것이, 제가 죽으면서 흘렸던 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책이, 긴 시공을 넘어 저에게로 돌아왔다는 것과, 자기가 지금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나라에 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확실하게 알아졌다.

왜?

가장 궁금한 것은 그거였지만 지금은 그것을 궁금해할 때가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는 했지만 해민이 읽었던 부분에는 일레노이에 대한 부분이 나오지도 않았었다.

해민은 움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이것을 읽어보았느냐.”

“아는 글씨가 아니었사옵니다.”

‘그렇겠지. 이건 한글로 쓰여 있고. 가만.’

그러고보니 자기가 어떻게 헤르만의 언어를 알아듣고 그 나라 말로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해민은 그 의문조차도 털어냈다.

처형 당할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은 것인지도 모르는 지금 해민은 그 책에 자신의 운명이 적혀있는지 보고 싶었다.

“내가 죽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

움베르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움베르트가 태양을 바라보는 것 같아 해민도 일어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으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밖을 내려다보기는 했다.

스카이워킹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괜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움베르트는 시간을 알려주었지만 그들의 신이 오른 팔을 들어올릴 때, 발을 들어올릴 때, 귀를 기울일 때와 같은 말을 해서 해민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몇 분이나, 몇 시간이나 남은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민은 일단 다른 일을 다 제쳐두고 낮은 침대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리고 빠르게 책장을 넘기면서 일레노이라는 이름을 찾으려고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결국은 찾아냈다.

움베르트는 황비가, 자기로서는 전혀 본 적도 없는 언어로 쓰인 책을 빠르게 읽으며 그 책에서 뭔가를 찾는 것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성궤를 두는 장막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사람이 지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가 그곳에 들어가면 그들은 신의 엄벌을 받고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들이 그곳의 경비를 서는 것은 신의 거룩함이 훼손되지 않게 지키려는 것이었을 뿐 신이 지키지 못하는 것을 대신 지키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그곳에 그 책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자가 빽빽하게 들어찬 책이.

움베르트는 그 책이 어떻게 그곳에 놓이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내용을 해독할 방법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서, 곧 교수형에 처해질 황비가 책을 읽고 있는 거였다.

움베르트는 더 이상 그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빨리 대전에 들어 황제 폐하의 앞에서 그 일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간의 악행을 생각했을 때는 지금이라도 목을 매다는 것이 좋을 황비였음에도 일단은 처형을 연기해야한다고 주청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움베르트가 밖으로 나가는 것도, 해민은 알지 못했다.

해민은 일레노이라는 이름을 찾자 그때부터 일레노이의 처형일에 일어날 일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일레노이는 형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민은 그 문구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레노이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당하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앞부분으로 넘겼다.

빠르게 스킵을 하는 동안 해민의 눈에 들어온 일레노이의 악행은 상상하기 힘든 정도였다.

무슨 이런 개새끼가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헤르만 제국의 선황제는 이스마힐과 두란트라는 두 아들을 두었고 성격이 흉폭하고 급했다.

이스마힐과 두란트는 각자 제 어머니를 빼다 박은 듯이 닮았는데 선황제는 장자인 이스마힐에게 제국을 물려주려는 뜻을 확고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을 계기로 이스마힐은 부황의 미움을 받았고 부황이 어린 그를 의자에서 내던져버리는 바람에 이스마힐은 어려서부터 다리를 절었다.

이스마힐의 외모는 평범했고 두란트는 제 어머니의 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태양처럼 눈부신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선황제의 총애는 두란트에게 기울었고 두란트에게 황위를 물려줄 계획을 세워가며 이스마힐은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황족의 일원인 것을 숨기고 살도록 했다.

그러나 이스마힐은 타고난 품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고 주위 사람들은 이스마힐이 누구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두란트는 변덕이 심하고 성격이 급하고 잔인해서 선황제의 눈치를 보며 두란트에게 줄을 섰던 사람들마저 서서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선황제에게 끊임없이 주청을 올렸고 결국 선황제는 자기가 죽기 전에 이스마힐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궁으로 돌아온 이스마힐은 그간의 고난에 대해서 부황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기를 돌아올 수 있게 해 준 고관대작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성군이 될 자질을 보았고 마침내 부황도 이스마힐을 향해 마음을 돌렸다.

황태자가 된 이스마힐은 성심으로 국정을 살폈고 선황제가 붕어한 후에는 헤르만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스마힐은 황후를 맞아들였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후사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두 사람의 금슬은 모두가 시기할만큼 좋았다.

후사가 생기지 않는 것을 걱정한 대소신료들이 후궁을 들이시라 권하였지만 이스마힐은 번번이 그 청을 거절하였다.

이스마힐이 도성을 떠나있었던 동안에도 여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젊은 황제가 남색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었다.

기회를 엿보며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던 두란트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두란트는, 후사를 이을 수 없는 황제가 제국에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할지에 대해 설파했다.

이스마힐은 양자를 들이겠다고 했지만 언제나 이스마힐의 편에 섰던 대소신료들조차도 그때에는 싸늘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헤르만의 황위는 대대로 헤르만을 세운 신의 빛을 받은 자들로 계승되어 왔었다.

그 존귀한 핏줄을 이어받은 자가 이스마힐에게서 태어날 수 없다면 두란트를 황위에 올리고 두란트의 후손으로 황위를 이어가게 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나왔다.

평소에 자신의 주장이 강하지 않았던 황제였지만 거기에 대해서만큼은 호락호락하게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런 의견을 내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두란트의 성품에 대해서 아는 이스마힐은, 헤르만 제국민들을 두란트의 폭정에 시달리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후사를 이으려 했다.

이스마힐의 의지가 강한 것을 알고 더 이상 대소신료들은 그 일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도 후사가 생산되지 않자 다시 두란트를 중심으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일레노이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두란트는 형님 전하께서 건강한 후사를 생산하시기를 바란다며 자신의 가문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섬겨왔던 일레노이를 이스마힐에게 바쳤다.

이스마힐이 처음으로 일레노이를 소개받은 자리에서 두란트와 이스마힐은 모두 일레노이가 앞으로 헤르만의 역사를 바꿀 거라는 것을 알았다.

일레노이를 본 사람들이 일레노이를 악마의 작품이라고 말하며 그 얼굴에 베일을 씌우라고 했을 때, 이스마힐조차도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성군이 되어 헤르만 제국을 강성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은, 일레노이를 만난 후로 사그라들었다.

일레노이가 하는 말은 두란트의 뜻이었지만 이스마힐은 일레노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이스마힐의 힘이 되어 주었던 충신을 유배보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의 계급을 강등시키고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주는 것도 일레노이의 간청을 받고 이스마힐이 행한 일이었다.

일레노이와 두란트는 부유해지고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사치를 누렸지만 헤르만의 제국민들은 수탈을 당하며 궁핍에 허덕였다.

황제가 남색에 빠져 일레노이에게 눈이 먼 후로 헤르만 제국은 나날이 기울어갔다.

눈이 멀었다...

그것은 처음에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으나 일레노이와 두란트의 간계에 이스마힐은 시력마저 잃었다.

일레노이가 정성껏 달여서 먹인 약이 서서히 이스마힐의 시력을 나빠지게 하다가 나중에는 눈 앞의 것을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며 일레노이는 이스마힐의 침궁에서도 두란트와 정사를 벌였다.

그것이 이스마힐의 반격이었다는 것을 일레노이가 알게 된 것은, 시력을 잃은 황제에게 헤르만 제국의 정무를 맡길 수 없다며 두란트가 반역을 획책하였을 때였다.

그 뜻에 동조한 신하들의 앞에서 이스마힐은 자기가 시력을 잃지 않았음을 보이며 반역을 획책한 두란트와 일레노이를 체포해 성에 가두게 했다.

황족을 죽이면 신의 저주가 내린다는 대제사장의 간언 때문에 두란트는 탑에 가두고 일레노이는 교수형에 처하도록 명을 내렸다.

해민은 이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렇게 패악무도한 삶을 산 인간이라면 자기도 그를 위해서 변명을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왜 하필 이런 인간의 몸 속에 들어온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해민은, 만약에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시간이 주어지고 황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필 죽은 시점에 당한 일이 그런 일이라서 그런 거여서 그랬는지 해민은 어느새, 자기가 곧 죽을 거라는 것보다 자기로 인해서 인간에 대해 염증을 느꼈을 황제가 불쌍해졌다.

자기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순간을 본 이후로 더 이상 책의 내용을 알고 싶지 않았지만 해민은 황제가 그 후에 어떻게 되는지 문득 알고 싶어졌다.

일레노이는 잊고 다시 지혜롭고 어질게 헤르만 제국을 다스리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해민은 뜻밖의 서술을 읽게 되었다.

일레노이가 죽은 후 일레노이의 시신을 자신의 침궁으로 들이도록 명령한 황제 이스마힐은 탑에 갇혀있던 두란트를 데려오도록 명했다.

그리고, 황족을 죽이는 자에게 저주가 따른다는 그 말이 두렵지 않은 듯 자신의 손으로 두란트를 죽였다.

두란트를 죽이고 이스마힐은 말했다.

헤르만 제국의 제국민들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두란트를 죽이는 것이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이스마힐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날, 이스마힐의 침궁에서 불이 타올라 이스마힐이 일레노이의 시신과 함께 불탄 채 발견되자 사람들은 그 말을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스마힐이 그냥 죽게 된다면 두란트가 헤르만의 황위를 이을 것을 염려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이스마힐의 황후는 이스마힐이 정해두었던 양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그를 대신해 정무를 보았다.

그것이 헤르만 제국의 역사였다.

해민은, 죽은 일레노이마저도 잊을 수 없었던 이스마힐이 안타까웠다.

해민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읽는 동안 조용히 문이 열렸지만 해민은 그 사실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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