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하늘 전부를 가리듯 커다란 그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위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리꽂혔다. 맑았던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불길한 어둠이 찾아왔다.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하늘은 점점 거칠게 울기 시작했다.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던 지찬이 다시 허리를 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내 목숨이야?”
숨을 헐떡이며 겨우 뱉어 낸 말이었다. 하늘에 있는 청룡과의 거리가 가늠되진 않았지만, 지찬의 작은 목소리마저 들릴 거라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청룡은 지찬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하늘 어디를 봐도 구불구불한 그의 몸통이었다. 그런 거대한 존재가 무섭게 바닥으로 돌진하자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모두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 쳤고, 정체된 도로 위 차에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방으로 흩어지고, 넘어지고, 공포에 질려 울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는 듯해 눈을 질끈 감은 지찬은 강렬한 바람에 몸을 휘청였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바람이 멈추자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노려보는 청룡과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천천히 지찬에게 다가왔다.
지찬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사람의 모습이긴 했지만, 그 역시 신이었다. 지찬도 어느 신의 반려이긴 하지만 인간의 몸을 한 자였다. 무거운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네 목숨? 겨우?”
가당찮다는 듯 비웃는 청룡의 말에 꾹 다문 지찬의 입이 덜덜 떨렸다. 청룡은 뻐근한 목을 돌리면서도 서늘한 눈빛은 지찬을 향해 고정하고 있었다.
“겨우 네 목숨 하나 얻겠다고 여기까지 왔을까. 그랬으면 난 진작에 네 목을 부러뜨렸겠지.”
그 말에 지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반려이긴 하나 제 앞에 있는 신에겐 하찮은 존재일 게 분명했다. 죽이려고 했다면 지찬이 앉았던 택시를 모조리 깔고 뭉개 버리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청룡은 그러지 않았다. 더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이곳의 신. 백호였다.
“네 그 하찮은 인간의 몸으로 신에게서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야?”
또 한 걸음 다가왔다. 한 발짝 더 물러선 지찬은 등 뒤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낭패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왔구나.”
씩, 웃은 청룡의 눈이 어딘가로 향했다. 돌풍이 몰려왔다. 거센 바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다가와 멈췄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선 툭, 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건방진 새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평소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성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게 했다. 삐익- 삑- 차 여러 대에선 비명을 지르듯 날 선 경고음이 삑삑댔다.
지찬에게 향하던 몸을 돌려 한성과 마주 본 청룡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내가 좀, 급해서 말이야. 다행히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왔네.”
“뭐?”
“네 목숨이 필요해.”
“기가 막히는구나. 제 구역은 버려두고 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내 목숨?”
피식 웃던 한성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네 목숨은 아깝지 않은가 보군.”
날 선 한성의 목소리에 청룡이 나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청룡의 반려가 힘겨운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벼랑 끝까지 선 자와 지키려는 자. 누가 이길 것 같아?”
“개소리 집어치워.”
“벼랑 끝에 선 자야.”
“뭔가 잊고 있나 본데, 너 역시도 지키려는 자야. 벼랑 끝에 서서 지키려는 자.”
한성의 말에 청룡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그러네. 그럼 내가 더 절실한 거잖아?”
웃음은 순식간에 지워지고 청룡의 동공이 뱀처럼 바뀌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섬뜩했다. 인간의 눈동자보다 배는 커지고 노란 홍채가 또 다른 눈처럼 번쩍 뜨였다.
창백해지던 피부 아래에서 뚫고 올라오는 푸른 비늘이 기괴했다. 본체와 사람의 몸을 뒤섞은 형태였다. 그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도 한성은 이를 갈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넌 규율을 어겼어.”
“알아.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들을 왜 지켜야 하는지 모르잖아. 안 그래?”
“암묵적으로 모두 그렇게 살아왔어.”
“누구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그럼 나한테는 필요 없네. 난 모두를 위한 건 싫거든.”
청룡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내뱉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 목숨만 넘겨줘. 그럼 그게 모두를 위한 거야.”
한성의 목에서 크르릉, 거친 울음이 들려왔다. 청룡을 노려보는 눈빛엔 이미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지찬은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한성은 청룡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제 뒤에 있는 지찬에게 말했다. 여전히 시선은 청룡을 향해 날카롭게 빛내면서.
“반려 님, 집으로 돌아가거라. 나의 기운이 있는 곳이니 안전할 게야.”
“네가 죽으면 아무 쓸모 없는 집?”
청룡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삐뚤게 했다.
“넌 닥치고 따라와.”
말이 끝나자마자 거센 바람이 둘의 몸을 휘감았다. 지찬은 그대로 솟구쳐 올라가 버린 둘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안 돼…….”
잡을 새도 없이 그들은 새까만 먹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구름 사이에서 천둥이 울었다. 아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이제 길거리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지찬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무섭게 내리꽂는 빗줄기가 따갑고 아팠지만, 제 마음보단 아니었다.
* * *
한성은 청룡을 이끌고 올라가 서로 본체화가 되어 대치했다. 불길한 푸른색이었다. 온몸을 뒤덮는 날카로운 비늘은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형형하게 빛났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였다.
크르릉, 울리는 것이 천둥의 울음인지 청룡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해야 하는 몸엔 역한 기운이 돌았다. 무자비하게 잡아먹은 신수와 이무기의 힘이 융화되지 못함이 그 이유였다.
‘역겨워서 못 봐주겠군.’
한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도 용과 같은 형상의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비늘 대신 호랑이 무늬가 새겨졌다.
두텁고 기다란 발은 그냥 보기에도 위력이 대단해 보였다. 은은하게 하얀빛을 뿜어내고 있는 몸체는 구름 위를 가볍게 밟고 있었다.
둘 사이를 번개가 재빠르게 가르며 땅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그들은 어둠 속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청룡은 기다란 몸으로 한성을 옥죄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며, 물어뜯었다. 한성의 목을 움켜쥐고 날 선 이빨을 드러냈다.
쿵, 쿠르릉.
불길한 어둠이 계속되고 커다란 몸체가 부딪힐 때마다 번개가 번뜩였다. 마치 한 몸처럼 뒤엉켰다.
구름 아래는 더 가관이었다. 빗줄기는 가만히 맞고 서 있기조차 힘들게 퍼부었고,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번개가 가장 높은 곳의 건물 위로 떨어졌다.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지상의 모든 것들이 휘청였다. 도로 위에 나무는 우지끈 부러지며 거리를 나뒹굴고 건물의 외벽은 갈라지고 부서지며 떨어졌다.
지찬 뒤에 있는 빌딩의 유리가 속절없이 흔들리다 산산이 조각나 아래로 덮쳤다. 몸을 가누지 못하던 지찬은 유리 파편에 긁히고, 바람에 휩쓸리던 나뭇가지를 피하지 못했다.
도로 위에 버려진 차들은 들썩이고, 미처 문을 닫지 못한 것들은 문짝까지 찢겨 나뒹굴었다.
숨을 쉴 수도 없게 몰아치는 바람과 빗줄기에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것은 한성 때문이었다.
‘결국, 이렇게…….’
얼굴에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었다. 제 몸을 긁고, 상처 내는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성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나약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 꿈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이건 지찬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폭삭 젖은 몸은 비를 맞아도 상관없었다. 한성은 저곳에서 더한 것과 싸우는데, 자신만 홀로 한성의 집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지켜보기도 괴로운 이 상황에 지찬은 자꾸 눈앞이 흐려져 몇 번이고 두 손으로 흐르는 물을 닦아 내야 했다. 까맣게 가려진 구름 위로 번뜩일 때마다 누군지 가늠할 수 없는 격동적인 움직임이 비쳤다.
쾅! 귀를 찢는 굉음이 들리고 지찬이 서 있는 일대가 모두 빛을 잃었다.
한 치 앞도 분간이 안 되는 어둠 속에서 균형을 잡기란 더 어려운 일이었다. 끼기긱, 쿵, 끽. 불쾌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휘청이는 몸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 지찬을 확 낚아채 뒤로 넘어졌다.
번쩍.
번개가 도로 위로 내리꽂히고, 지찬의 눈앞엔 커다란 간판 하나가 볼품없이 찌그러진 채 바람에 의해 바닥을 긁으며 날아갔다.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불쾌했던 소음보다 더 소름 끼쳤다. 뒤를 돌아 자신을 잡아끈 이를 보니 청룡의 반려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가녀린 몸이 몰아치는 바람에 계속 휘청거렸다. 체온이 계속 내려가는지 입술은 파랗게 질린 지 오래였다.
지찬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단의 어깨에 덮었다. 젖은 옷이었지만, 반소매를 입은 채 떨고 있는 것보단 낫겠다 싶었다.
위에서 양동이로 퍼붓는 듯 내리는 비에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치고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 단이 지찬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형…….”
* * *
매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한성의 얼굴에 흠집을 내고 있었다. 청룡이 얼굴을 움켜잡자 한성의 입이 벌어졌다.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발버둥을 치고, 앞발을 청룡의 갑옷 같은 비늘 사이로 내리찍었다.
크아악. 짐승의 포효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청룡 머리 위 갈기 털을 잡아 뽑듯 움켜쥐곤 고개를 틀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한성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고 뾰족한 이빨을 드러냈다.
한성이 청룡의 목을 물어뜯기기 전에 한성에게로 벼락을 내렸다. 콰직, 콰지직.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은 커다란 눈동자 두 쌍뿐이었다.
몸을 반으로 갈라 놓을 것처럼 내리꽂는 것을 미처 다 피하질 못해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괴로운 듯이 커다란 몸을 뒤틀던 한성이 청룡에게 다시 돌진했다.
거칠게 쉬는 숨 아래서 청룡의 푸른 기운은 자꾸 빛을 잃어 갔다. 푸름보다 더 짙게, 짙게.
역한 공기와 추악한 기운이 그의 몸을 잠식해 갔다. 형형하게 빛나던 두 눈동자는 자꾸만 빛을 잃어 갔다. 한성의 발톱이 찌른 곳에선 붉음보다 더 짙은 어둠 같은 피가 흘렀다.
일격에 죽여야 했다. 목을 물어뜯어야만 했다.
서로가 노리는 곳은 단 하나였다.
쾅, 대지가 흔들릴 정도로 부딪혔다. 다시 구불거린 족쇄처럼 서로의 몸통을 옭아맸다.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며 뒹굴었다.
잠깐의 틈도 용납되지 않았다. 앞발과 뒷발로 서로를 긁고 찌르면서 뒤엉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상반되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끝나는 싸움.
서로가 알고 있었다. 지켜야만 했다.
그때, 지찬과 단이 뒤엉켜 있는 모습이 한성의 눈에 들어왔다. 단의 손에 들린 반짝 빛나는 것은 날카로운 파편이었다.
순간 한성의 등골이 서늘했다.
‘여유가 넘치는군. 이 상황에서 한눈을 팔다니.’
청룡은 아가리를 벌리며 한성의 몸을 더 옥죄어 왔다.
지찬이 떠나지 않은 걸 알고 있었다. 위험한 곳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게다가 청룡의 반려까지 무기를 들고 있다.
천재지변처럼 돌풍과 빗줄기, 천둥 벼락이 내리치는 것을 최소화하려고 일부러 힘보단 몸으로 덤벼들었는데.
위험은 예상치 못한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