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미안해요. 이렇게 좋은 날.”
“아니야. 그대가 알고 싶어서 보는 꿈도 아닌 것을.”
“그냥, 반지를 받고 보니까…… 소중한 걸 더 놓치기 싫었나 봐요.”
지찬이 씁쓸하게 웃었다.
당연히 놓치기 싫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형제, 부모와 친구들. 인생에서 누가 친절하게 삭제 버튼이라도 눌러 주는 듯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갔다.
그냥 그 어떤 타이밍이었던 것 같다.
하나가 삭제되고 나니까 그다음부턴 쉬운 느낌.
그렇게 쉽게 떠나갔다. 호감으로 다가왔던 모든 사람이 너무 쉽게 떠났다.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그게, 지금 한성에게까지 미치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잠깐은 자만했다.
반려의 운명이기에 혼자 남을 수밖에 없었다던 나는 한성을 만나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떠나야 했던 이유는 한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굳게 믿었다.
신은 그걸 원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신의 영역인 예지몽으로 보여 주는 미래는 대체 왜 그랬을까.
또다시 혼자였다.
버려진 것처럼 그렇게 낯선 곳에 주저앉아 엉망인 꼴로 울었다. 그냥 하염없이 울었다. 힘을 내서 앞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만 올려다보며, 폭풍처럼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너무 나약했다.
혼자서는 누군가를 지킬 힘이 없다. 그러면, 혼자 끙끙거리며 앓는 것보다 털어놓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래야, 더 오래 함께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약한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 주변에 끼칠 수 있는 민폐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절대 내 옆에서 사라지지 말아요.”
제가 한성의 옆에 있음으로써 그를 더 위험에 빠뜨리진 않을까, 두려움과 걱정은 마치 빠져나갈 수 없는 덩굴처럼 점점 자라나 작은 마음을 옥죄었다.
“위험하면 꼭 도망쳐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지찬이 울먹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한성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지찬아, 나를 믿고, 너를 믿어. 나는 쉽게 네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거야.”
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찬의 뒤에 서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같은 반지를 낀 손이 어깨를 둘러 지찬의 손 위에 얹어졌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두드렸다. 불안하게 요동치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그대가 미안할 일이 아니야.”
한성이 지찬의 손을 잡고 손등을 어루만졌다. 천천히, 부드럽게.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했다. 한데, 이걸 정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여전히 신의 의도는 알 수가 없다.
* * *
가맹점을 찾은 지찬이 조금 피곤한 기색으로 인사했다.
“우산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어머, 설 대리 왔구나.”
“별일 없으셨죠?”
그냥 의례적인 인사에 나이가 지긋한 여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별일은 무슨. 별일이 있어야 오려고?”
농담 섞인 말투에 지찬이 어설프게 웃었다. 그런 지찬의 반응에 유쾌하게 웃던 여자가 웃음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오늘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그런가 봐요.”
“그럴 땐 보양식을 먹어야지. 요즘 살이 자꾸 빠지는 것 같네?”
“몸무게는 크게 차이 없어요.”
“그래도 젊을 때 관리해. 나중에 늙어서 고생이야.”
그 말에 조금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이런 만남도 몇 년이나 유지할 수 있을까.
“아, 참. 그때 설 대리랑 같이 서 있던 학생, 아는 사이야?”
우산을 빌려주던 날 함께 있던 학생이라면 청룡의 반려인 단밖에 없었다.
“아, 그냥 얼굴만 조금요.”
“엊그제, 이 앞에서 쓰러져 있더라고. 엄청 괴롭게 기침을 해서 내다봤더니 피까지 토하면서 쓰러졌길래 내가 119에 신고를 했거든. 근데 다시 나가 보니까 순식간에 사라졌어.”
또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땐 피까지 토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악화된 병세가 걱정됐다. 시간이 멈추면 병의 진전까지 멈춘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렇다고 연락해서 물어볼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사라졌어요?”
작은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응, 진짜 아주 잠깐이었거든? 정신 잃고 쓰러진 거 보고, 가게에 뛰어 들어와서 핸드폰으로 전화하면서 나갔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야.”
“누가 병원에 데려갔겠죠.”
“그런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는데, 너무 찜찜한 거 있지. 피까지 토할 정도면 예사로 아픈 게 아닐 텐데. 연락하고 그러는 사이는 아니야?”
“네. 저도 그냥 오며 가며 얼굴만 아는 사이였어요.”
“그랬구나. 많이 아픈가 보던데, 괜히 걱정이네.”
정말 걱정이었다. 단의 병세가 심각해지고, 점점 더 견디질 못하는 걸 지켜보는 청룡은 무슨 생각을 할지 예측도 되질 않았다.
단의 아픔보다 그 때문에 벌어질 일이 두렵다. 그것이 마치 저와 한성에게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이야기를 하고 나섰는지 기억이 안 났다. 요즘 들어 특히 심했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지찬은 자꾸만 일에는 허술해지고, 온 신경은 한성과 그 미래에 대해 곤두서 있었다.
요 며칠 예전과 너무 다른 모습에 상사에게 처음으로 혼도 났다.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냐며 호통을 치는 소리에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좋아서 하는 거라며. 나로 살고 싶어서 하는 거라며.
예지몽일지도 모르는 꿈 하나에 이렇게 흔들려서 정작 아무것도 지키질 못하고 있는 자신을 질책했다.
한숨이 나오고, 스스로가 한심했다. 알면서도 쉽게 그 생각을 지우질 못했다.
정신은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뇌었다. 그뿐이었다.
그냥 자꾸만 의식하고 되뇌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실수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웃음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잠을 자는 것도 석연치 않았다. 다시 꿈을 꿀까 봐 두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엔 한성에게 정신도 못 차릴 만큼 사랑해 달라고 매달렸다. 그게 하루, 이틀이 되고 나자 이건 한성이나 자신에게도 못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하는 관계는 한성의 걱정만 더 키우는 꼴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나약하다고 인정하자고 했지만, 정말 우스운 꼴처럼 비쳤다.
‘내가 이렇게나 나약했던가.’
지찬은 거리를 걷다 문득 멈춰 선 채 손을 들어 바라봤다.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찬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욕심부리기에 바빠 이렇게 있었지만, 여태껏 살아 낸 인생이 제가 일군 것이 맞는지, 혹은 앞으로 살아 내야 할 인생이 정말 자신의 것이 맞는지 온통 의문뿐이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미래가 두려우면서도 출근하는 걸 빼먹지 않았다. 이것이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일까.
얼마 전에 꾼 꿈에선 사무실에서 이 대리가 뜨거운 커피를 쏟는 꿈을 꿨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하던 찰나에 커피를 들고 들어오는 이 대리를 보고 지찬이 다가가 뜨거운 커피를 빼앗아 들어 책상에 올려 두었다.
그렇게 잘 넘긴 줄 알았다. 약간의 희망도 생겼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 때문에 제가 그렇게 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꿈속에 보이는 미래를 바꿀 수도 있겠구나, 하고.
하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부장님의 부름에 서둘러 뛰어가던 이 대리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며 커피를 쏟았다.
과정은 바뀌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리고 그날 지찬은 퇴근하자마자 한성을 꼭 끌어안은 채 눈물을 삼켰다.
‘겁쟁이라고 놀려도 괜찮아요.’
‘다음엔 꼭, 미래를 바꿔 볼게요.’
그리고 지찬이 담당하고 있는 가맹점에 있는 튀김기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꿈을 꿨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만사 제치고 달려갔다. 제조 업체를 불러 제품상의 결함은 없는지, 혹시 전선이 벗겨지진 않았는지 ‘가맹점 관리’라는 명목으로 확인까지 했다.
그리고, 그날 영업이 끝날 때까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비어 있던 오전에 발화 지점을 파악하지 못한 화재가 일어났다.
역시나 과정은 바뀌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슨 꿈만 꿔도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만 쏠렸다. 과정이 바뀌면 미래도 바뀌어야 하는 게 맞지 않냐며 한성에게 억울한 마음에 투정도 부렸었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 결과에 그 이후로 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다. 이따금 두려워하는 자신에게 한성은 꼭 끌어안으며 너의 반려를 믿어 달라는 말뿐이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지찬은 지금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한성이 보고 싶었다. 휴대전화를 들어 1번을 꾹 눌렀다.
‘한성.’ 간지러운 미사여구 없이 저장된 이름을 보고 시무룩하던 한성이 떠오르자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반려 님.
“뭐 해요?”
-그대 생각.
“나도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전화기 너머로 한성의 정돈된 호흡이 들려왔다.
-지찬아.
“네.”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강해. 널 지켜 줄 힘이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말이 더 따라붙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성.
“나는, 당신을 지킬 수 없을까 봐 두려워요.”
형체가 없는 두려움이 다가오는데 손을 쓸 수도 없음에 날마다 좌절했다. 설령 이것이 그냥 ‘꿈’에 불과하다고 해도.
“보고 싶어요.”
-데리러 갈게.
코끝이 찡했다.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한성의 목소리가 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빨리 와요.”
끊어진 전화기를 든 손이 힘없이 늘어졌다. 전보다 쌀쌀해진 바람이 지찬의 몸을 휘감고 사라졌다.
* * *
조금 굳어진 표정의 해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요즘 좀 이상해요.”
그 말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한성과 지찬이 돌아봤다.
“경계 쪽이 좀 이상해요.”
“무슨 일이 있는 게야?”
“그냥, 별다른 일은 없는데 느낌이요.”
“날이 서늘해지니 예민해지나 보구나.”
“짐승뿐만이 아니라 달도 날이 서 있어요.”
찜찜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주저앉은 걸 지찬이 가만히 바라봤다.
“동의 경계 부분이 좀 일그러진 것 같기도 해요.”
“우리네 경계를 조금 더 견고하게 다져야겠구나.”
지찬은 동쪽이라는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혹시, 반려가 아프거나 이상이 있어도 결계에 이상이 생기나요?”
“그럴 수도 있지. 또는 경계를 세우는 신의 본체에 무슨 일이 있거나.”
“얼마 전에 홍단이 쓰러졌다고 들었어요. 원래 병이 있던 아이인데 그 아이가 아파서 그럴까요?”
“그러거나, 혹은 지키는 자의 본분을 잊었거나.”
“청룡의 반려가 아파요?”
해가 처음 듣는 소리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반려가 되기 전에 얻은 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악화한 건지…….”
한성이 지찬의 손을 움켜잡았다. 저도 모르게 떨고 있었나 보다. 따뜻한 온기로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면서 몸에 힘을 조금 풀었다.
“해야, 당분간은 결계에 힘을 좀 쓰거라. 달에게도 그리하라 일러 두고.”
“네. 그럴게요. 요즘 자꾸 공기가 스산한 게 느낌이 좋지 않네요. 반려 님도 몸조심하세요.”
걱정스러운 해의 눈빛이 박혀 들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일상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일상 이야기를 나눴다. 숨어 있는 불안을 없애는 일은 딱히 하지 않았다.
지찬은 특히 꿈 때문에 며칠을 정신없게 달렸더니 지치는 기분이었다.
달라지는 것 하나 없이 무기력하게 그것을 바라본다는 게 이렇게나 괴로운 일인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혹시나 혼란이 생겨도 반려 님은 꼭 지켜드릴게요.”
해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지찬이 힘없이 웃었다.
맥없이 책을 잡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지찬도 이들처럼 지켜 주겠노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