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60)

53화

영화관에서 나와 함께 걷던 지찬이 한성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제 뭐 할까요?”

“뭐 하고 싶어?”

그 말에 지찬이 거리를 둘러봤다. 요즘은 데이트를 어떻게 하려나. 길을 걷는 연인들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한성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지만, 밖으로 나오니 무언갈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글쎄요. 영화 보고, 밥 먹고, 차 마시고 또…… 흐음…… 데이트하면 다들 뭘 하는 걸까요?”

“비슷하지 않을까? 함께 걷고,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고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만남의 의미 아니겠나.”

“그렇죠. 맞아요. 팝콘을 너무 먹었더니 아직 저녁 생각은 없는데, 한성은 어때요?”

“식사는 이따가 일곱 시쯤 하자.”

정확한 시간까지 어필하는 한성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요. 그럼 그 시간까지 두어 시간 남으니까, 저기 가 볼래요?”

“어디?”

지찬이 손을 들어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 워낙 다양한 매장들이 밀집된 구역이라 정확히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이끄는 손길에 그대로 쫓아 걸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시끄럽고 요란한 음악 소리가 가득한 공간 안에는 해괴한 기계들로 가득했다.

입구부터 축구공을 막대기에 꽂아 둔 네모난 상자에 흉물스러워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하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이끌려 온 한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지찬이 그런 그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게임장이에요. 저 진짜 오랜만에 와 봐요. 단순한 것들도 많아서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재밌을 거예요.”

사방이 정신이 없었다. 기계마다 요란하고 난잡한 음악이 사방에서 귀를 울리는데도 지찬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저 좋았다.

한껏 들떠서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는 지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짤랑거리며 동전이 쉼 없이 쏟아졌고, 그것을 한 손 가득 쥔 채로 지찬은 한성을 붙잡고 수많은 기계 중 하나에 앉았다.

“이거는 왔다 갔다 하는 거고, 이건 점프, 그리고 이건 필살기. 알았죠?”

“아, 응. 근데 이거 그대랑 나랑 싸우는 거야?”

“그럼요. 그런 재미인데!”

그렇게 시작된 게임 한 판은 한성에게 진 지찬이 동전을 밀어 넣고, 다시 패배하고, 도전하고의 반복이었다.

그냥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한성은 자꾸 이겼다. 그는 통통한 입술이 살짝 튀어나온 옆모습을 힐끔 바라봤다.

‘져 줘야 하나. 저 입술이 삐친 입술은 아니겠지.’

한성은 지찬의 표정에 괜히 조바심이 났다.

“괜히 져 주기 없기예요!”

“응…….”

이젠 속마음도 읽는 능력이 생겼는지 내심 움찔한 한성이 난감한 표정으로 스틱과 버튼을 움직였다.

마지막 세 판을 외치던 지찬은 결국 완패했다.

“와…… 나 진짜 소질 없나 봐.”

툭, 한성의 어깨에 기대며 시무룩하게 말하는 지찬을 바라봤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웃는 얼굴이었다.

“어때요? 재미있죠? 우리 다른 거 해볼래요?”

마음이 상한 건 아니었는지 한성의 손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총 두 자루를 들고 좀비도 잡고, 자그마한 운전대를 놀리며 스피드광처럼 운전도 했다.

신이 나 웃음을 지우질 못하는 지찬을 바라보던 한성도 어느새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져도 상관없었다. 게임 속의 좀비가 화면 가득 들어와 GAME OVER가 떠도 그저 즐거웠다.

둘은 소리를 지르고, 박장대소를 하면서 게임장 안을 누볐다. 나란히 서서 농구공을 골대에 넣으며 서로의 점수를 비교하기도 하고, 절대 뽑힐 리 없는 인형 상자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처음에 느꼈던 난잡하고 시끄러운 공간이 지찬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고막을 울리는 여러 소리 가운데 가장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 때문에 요란한 소음도 듣기 좋은 협주곡 같았다.

신기한 듯 만져 보고 기웃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게임도 구경하다 그들은 시간을 확인하고선 밖으로 나왔다.

너무 신이 났던 터라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 것 같아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의 열을 식히던 지찬이 한성을 바라봤다.

“나도. 덕분에 별걸 다 해보는구나.”

“재밌었어요?”

“응. 너무 즐거웠어.”

“나도요. 나도 너무 재밌어요. 아까 안에 들어가서 하는 게임 있잖아요. 진짜 눈앞에서 막 좀비 떼가 튀어나오는데! 방아쇠에서 손을 못 떼겠더라고요.”

종알종알 예쁜 종달새처럼 입술을 움직이며 이야기하는 지찬의 모습에 한성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성에게도 신나고 유쾌한 경험이긴 했지만, 이렇게나 지찬이 즐거워하고 들떠서 떠드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좋았다. 감출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지찬의 말에 적당하게 대꾸를 했다.

고개만 끄덕여도 어린아이처럼 좋아서 여전히 발그레한 얼굴로 웃는 게 너무 사랑스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가여웠다.

조금 복잡 미묘한 그런 감정이었다. 지찬이 살아온 생을 모두 기억하니까.

혼자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즐기지 못한 채 살아왔을까.

요즘 세상은 혼밥, 혼영이라며 홀로 즐기는 것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 오히려 그것을 일부러 즐기는 자들도 심심찮게 생겨난 추세였고 말이다.

하지만, 그걸 즐기기에 지찬의 마음은 여유롭지 못했던 거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버텨야 했던 그의 인생이 그에겐 너무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살아 내기도 버거운 시간.

눈이 곱게 휘면서 웃던 지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인다.

“왜요? 내가 너무 나만 떠들었어요?”

“아니, 예뻐서.”

그 말에 다시 또 코를 살짝 찡긋하며 웃는다.

“배고파요.”

“응. 가자.”

* * *

“이걸 예약했다고요?”

“응.”

이번엔 한성의 손에 이끌려 온 지찬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에 들어올 때는 조금 고급스러운 파스타 집인가 싶었다.

간지럽게 무슨 파스타야, 하고 혼자 웃었는데 막상 한성의 이름을 대고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를 받고 나서는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레스토랑도 다녀요?”

“한식을 가장 좋아하긴 하지.”

“와…… 이런 데는 처음 와 보는데. 데이트라고 신경 썼어요?”

“응. 신경 써야 하니까.”

주문까지 끝내 놓았던 건지 자리에 앉고부터 천천히 음식이 나왔다. 접시가 바뀔 때마다 간단한 설명과 어떻게 먹으면 더 맛있는지에 대한 작은 팁까지 알려 주는 것에 지찬은 신기해하며 음식을 즐겼다.

처음엔 낯설어하면서도 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은 한성을 뿌듯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볼이 볼록 튀어나와서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아까 게임에 대한 여운이 남았는지 여전히 양 볼이 불그스레했다.

한성은 지찬이 메인까지 순식간에 해치우고 달콤한 디저트를 작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서 먹는 걸 기분 좋게 바라봤다.

그러다 헛기침을 하고선 슈트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작은 상자를 꺼내 지찬의 앞으로 쓱 내밀었다. 지찬은 의아한 눈빛으로 스푼을 입에 물고 웅얼거렸다.

“이게 뭐예요?”

“열어 봐.”

손을 뻗어 상자를 열어본 지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게 오물거리던 입술이 벌어지고 물고 있던 스푼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이게…….”

“첫 반지야.”

“첫 반지요?”

“응. 금방 낡고 볼품없어지겠지. 우린 그렇게 긴 세월을 살 테니까.”

“그럼 또 사 주게요?”

“응, 네가 여태껏 살아온 인생을 한 세월이라고 치자. 그렇게 한 세월을 살아 낼 때마다 그때의 가장 고운 것으로 선물할게.”

“아…… 이거 주려고 여기 예약했어요?”

“겸사겸사.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종종 오자.”

“나는 한성과 함께 있는 매일 특별하니까.”

반지를 꺼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자 딱 알맞게 들어맞는다. 피식 웃는 지찬의 눈가가 조금 발갛게 변했다.

“있죠……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

길고 그럴싸한 이야기 없이도 마음이 전해졌다.

“하, 진짜 느낌 이상하다.”

반지를 낀 손을 감싸 쥐고 테이블 위에 올렸다. 신기하고 이상한 듯 반지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실감 나지 않았다.

반지 하나가 빠진 상자 안엔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하나 더 들어가 있었다. 지찬은 그걸 조심스레 빼고 한성에게 내밀었다.

“다음엔 내가 사 줄래요.”

반지를 건네받고 같은 자리에 낀 한성이 그 말에 웃었다.

“그래.”

자신과 똑같은 반지를 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뭔가 기분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서 같은 반지를 나눠 끼고 나니 쑥스러웠다.

지찬은 괜히 달아오르는 목덜미를 문지르고 조심스레 웃었다. 그리고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발갛게 오른 눈가에 눈물이 조금 맺히는가 싶더니 입술을 다물고 꾹 참아 낸다.

“한성.”

“응?”

“나…… 꿈을 꿨어요.”

“응.”

아까부터 조금 망설이는 얼굴이던 지찬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털어놨다.

“근데, 뭐라고 이야길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 있었어?”

지찬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낮은 한숨을 뱉었다.

“이것도 예지몽일까요?”

어쩐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지찬은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마치, 예지몽이 아니길 바라는 것처럼.

그걸 지켜보는 한성은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행복하기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어찌 저 어리고 고운 제 반려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예지몽은 바뀔 수 있을까요? 미래가 바뀔 수도 있을까요?”

“지찬아.”

부드럽게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지찬을 부르자 떨림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냥…… 나쁜 꿈을 꾼 것 같아요. 폭풍우가 몰아치고, 커다란 해일이 누군가를 끊임없이 집어삼켜요. 빠져나와도 다시, 빠져나와도 또다시.”

손끝이 잘게 떨리는지 지찬은 주먹을 꾹 쥐었다.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리고, 세상이 끝날 것처럼 어두워요. 그리고…….”

숨을 깊게 쉰 지찬이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내가 울고 있었어요.”

천천히 떨리는 손을 들어 제 가슴에 올렸다. 어쩐지 자꾸만 욱신거렸다.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말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예지몽이라면.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비해 미래를 바꿀 수 있지 않겠냐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아 보고 싶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붓는 폭우 아래에서 지찬은 엉망인 꼴로 울고 있었다.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렀다. 결국엔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짧고 강렬했던 자신을 지켜보다 깨어나자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공포가 몰아쳤다.

예상할 수 있는 것들조차도 예상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끔찍한 상상이 자신을 덮쳐 올지 두려웠다.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게 미래라면.

지찬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 중 하나가 그 미래라면, 자신이 그렇게 울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정말, 몸서리쳐지게 두려웠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다. 일부러 시끄럽고 혼잡한 게임장에 가서 머리를 비워 내기도 했다. 잠깐은 즐거웠지만, 자꾸 틈을 비집고 파고들며 꿈이 떠올랐다.

마치, ‘넌 잊으면 안 돼’라고 하는 듯이.

하지만 한성에게 반지를 받고 가만히 바라보자 잠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잔뜩 긁히고 더러워진 지찬이 얼굴을 가리며 울고 있을 때 끼고 있던 반지였다.

울부짖고 온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쓰러졌다가도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누군가를 찾았다.

온통 회색빛이었던 그 장면 속에 유독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였다.

지금은 반지가 없으니까, 그곳에서 울고 있는 자신은 어쩌면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지몽이 아닌 소위 말하는 개꿈 같은 거라고 자위했다.

절정에 치달은 영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꾼 그런 꿈.

하지만, 그것이 지금 제 손에 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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