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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60)

52화

“한성! 빨리 나와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지찬이 2층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그리고 현관 앞에 있는 거울에 얼굴을 살펴보곤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째 나보다 더 설렜어. 무슨 옷을 종일 골라.”

준비가 이미 한참 전에 끝난 지찬은 방을 나설 때 한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옷장 안에 대체 뭘 숨기기라도 한 건지 제가 옷을 꺼낼 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데이트라 떨려서 옷을 못 갈아입겠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잘만 벗고 다니시던 분이 누구신데.

등 떠밀려 밖으로 나온 지찬이 하는 수 없이 1층으로 내려와서 기다렸다.

회사 앞으로 찾아온 이후로 첫 데이트라고 할 수 있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설레는 게 맞는 걸 수도 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지찬도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늘 함께 영화를 보고, 또 뭐 하는 게 좋을까.”

데이트라는 이 단어가 얼마나 낯선지 모르겠다. 낯설고 간질거리고 괜히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매일 집안에서만 부대끼다 밖으로 나서려니 긴장감에 손끝이 조금씩 저리기 시작했다.

“괜히 그래서, 나까지 긴장되네.”

“뭐가 그리도 긴장돼?”

어느새 내려왔는지 지찬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말하는 한성의 모습에 지찬이 화들짝 놀라 두어 걸음 내빼다 삐끗했다.

“아, 깜짝이야. 소리 좀 내고 다녀요.”

“쿵쿵, 걸으면서 내려왔어.”

그 말에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지찬이 한성을 훑어봤다. 진짜 오랜만에 보는 한성의 슈트 차림이었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와 몸에 맞춘듯한 옷맵시가 오늘따라 유난히 빛났다.

자기주장이 강한 한성의 이목구비는 오늘도 역시나 잘생김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멋지네요.”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한마디에 한성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대도 멋져.”

고급 슈트를 빼입은 한성에 비하면 지찬은 어쩐지 대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검은 면바지에 기본 하얀 티셔츠, 노란 바탕에 검은 체크무늬 남방을 걸친 지찬은 한성과 나란히 서 있으니 마치 대기업 간부 옆에 사촌 동생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지찬의 외모가 30대치곤 굉장히 동안인 편이라 더욱 그래 보였다.

“아, 근데 이거 우리 너무 언밸런스하지 않아요?”

“난 그대가 어떤 옷이든 예뻐.”

“아는데, 둘이 계속 붙어 다니기엔 차림새가 너무 극과 극이라니까.”

예쁜 거 알아요. 라고 인정한 지찬이 샐쭉 웃었다.

한성에게만 예쁘면 되겠지 싶다가도 힐끗 옆을 바라보니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한성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외친 지찬이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셔츠를 벗고 재킷 하나를 꺼내 걸쳤다.

그리고 기다란 거울을 바라보고 입술을 살짝 빼꼼히 내밀고 재킷을 벗었다.

“아, 진짜.”

평생 살면서 제 외모에 불만은 가져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한성을 만나고 나서부터 약간 거울 보는 일이 잦아졌다.

예쁘다, 예쁘다 해주긴 하지만, 그건 한성의 콩깍지가 씐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게 분명했다.

서른둘이나 먹고서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제 얼굴이 왜 이리도 낯선지 모르겠다.

그동안은 혼자 서 있다는 게 무서워서 거울 보기가 꺼려졌다. 거울 뒤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두려워서,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화 보려면 지금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자신을 재촉하는 그 무엇도 없었음을 절감할까 봐.

오묘한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옆에 다가온 한성을 빤히 쳐다봤다.

지금 거울 속에 비치는 나, 그리고 나의 공간. 아니, 우리의 공간은 늘 가득 차 있다. 방금 벗어난 듯한 침대의 구겨진 시트, 그리고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이 있던 흔적.

거울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동자에 비치는 또 다른 사람의 얼굴.

내가 아닌 타인.

고개를 돌려 다시 거울을 바라본 지찬이 손을 들어 거울 속 자신의 눈 위로 손가락을 올려 톡톡 두드렸다.

그래, 바로 이 눈동자. 옅게 홍조가 올라온 얼굴에 가득 찬 미소.

‘너 지금 행복하구나.’

작고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일상에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거울 하나 바라보는 모습마저도 바라보는 시각과 감정 차이가 이렇게 극명하게 갈렸다.

“이제 가요.”

결국,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지찬과 한성이 나란히 걸었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영화 시간이 조금 촉박했다. 그래도 영화관 규모가 작은 곳이라 영화 관람 시간부터 10분간 광고 후 본편 상영이 되는 터라 급히 서두르진 않았다.

“팝콘도 미리 결제할까?”

“네?”

한성의 말에 지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을 보여 주며 팝콘과 콜라 세트를 구매하겠다고 쳐다보는 한성이 보였다.

“아, 네…… 근데 한성, 많이 늘었네요?”

처음에 영화가 보고 싶다고 했을 때 예매는 자기에게 맡기라며 큰소리치는 한성을 못 미더워했었다. 잠깐 샤워를 하고 온 사이에 예매를 마친 모습을 보고서 의아하게 바라봤는데 이제는 어째 저보다 더 잘 활용하고 있는 모습에 놀라웠다.

“이 정도는 기본 아닌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으쓱하는 모습을 보며 지찬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손끝으로 톡, 톡 가볍게 터치해서 팝콘 결제까지 끝낸 한성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빨리 칭찬해 줘, 라는 듯이 바라보면서 말이다.

“잘했어요. 대단해.”

인적이 드문 곳을 걸으면서 한성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해주니 그가 기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찬은 한성 몰래 작게 웃음 지었다.

‘이게 바로 호랑이 조련인가?’

도착한 영화관에서 팝콘을 들고 여유롭게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 확인을 하자 ‘커플석’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한성을 볼 수 있었다.

어두워진 실내에 저도 모르게 속삭이며 한성의 귓가에 바짝 붙었다.

“이거 뭐예요?”

“커플석.”

한성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고선 팝콘 하나를 집어 지찬의 입에 넣었다.

달콤하게 퍼지는 팝콘 맛에 두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연이겠지. 커플석이라는 걸 알아서 예매했겠어.’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커플석에 나란히 앉은 지찬과 한성이 막 시작할 조짐을 보이는 상영관의 스크린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팝콘도 커다란 통으로 하나, 콜라도 커다란 컵으로 하나. 빨대 두 개. 딱 커플 티가 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금세 영화 제작사 로고가 올라오며 영화가 시작됐다.

지찬은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며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찬이 한참을 기다린 영화였기 때문이다. 시리즈로 나오는 탓에 오매불망 기다려 왔던 영화였다.

혼자 영화 보는 것엔 이미 익숙해져 있던 터였지만, 누군가 함께 한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눈꼴셔 옆에도 쳐다도 안 봤던 커플석에 제가 앉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 생각에 작게 쿡쿡 웃자 한성이 바싹 다가와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그냥요.”

한성은 팝콘 중 달콤하고 씹기 좋은 것을 골라 지찬의 입에 쏙쏙 넣어주고 있었다. 그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없었다.

딱딱한 껍데기는 떼서 털어버리며 손을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으로 입에 넣어주는 통에 지찬은 가만히 앉아 입만 벌리며 눈은 스크린에 고정되었다.

한참 빠져서 보다 문득 생각이 났다. 시리즈라 이어지는 내용인데 한성이 재미없게 느끼면 어떡하지.

그 생각에 옆을 바라보자 한성의 눈은 지찬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쩐지 행복한 웃음을 매달고서.

그런 한성과 눈이 마주친 지찬은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재미없죠?”

“아니, 좋아.”

“이거 시리즈라 전작 안 보면 좀 헤매거든요.”

“재미있어.”

말과는 다르게 스크린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지찬에게 향하는 시선이 더 길었다.

“그냥 나갈까요?”

“아니. 난 그대 얼굴만 바라봐도 즐거워.”

“그래도, 같이 보러 왔는데 못 즐기면 미안하잖아요.”

“나도 다 보고 있어.”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너무 보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한성이 이런 문화생활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다는 걸 깜박했다.

그 생각이 들자 영화에 집중하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괜히 애먼 2시간을 자기 때문에 할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 미안하기만 했다.

그때 한성이 지찬의 손을 움켜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서늘한 공간을 덥혔다.

“괜찮아.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그리고,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니 염려치 말거라.”

행복하면 된 거야, 에서 잠깐 미안해졌다가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말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대가 보고 싶다고 해서 미리 좀 찾아봤어.”

지찬이 언뜻 흘린 영화 이야기에 한성은 여태까지 배워 온 인터넷 서치 방법을 온통 동원했다. 지찬이 회사에 가 있는 동안 그는 유명 블로그의 리뷰와 지식 사이트를 활용해 터득한 간단한 스토리를 머릿속에 곱씹었다.

‘이 정도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 암, 그렇고말고.’

영화를 글로 배웠어요. 아니, 글로 감상했어요. 딱 이런 뉘앙스였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이런들 어떠하리.

나의 반려만 행복하다면 어떠하리, 한성의 입장은 그랬다.

그 말에 조금 안심했는지 지찬의 시선이 스크린을 향했다. 통통한 입술을 열어 넣어주는 팝콘을 받아먹으며 오물오물 씹는 그 옆모습이 영화를 못 보게 만들 정도로 중독성 있다는 것은 아마 자신만 모르리라.

가끔 지찬의 저 입술을 보고 있자면 손가락으로 그 통통한 질감을 맘껏 느껴 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꾹 누르고 살살 비벼서 보드랍고 따뜻한 촉감을 느껴 보고 싶었다.

딱, 지금처럼 말이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끼기긱, 기계 돌아가듯 한성을 바라보는 지찬의 눈빛에 그것이 상상만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건 길지 않았다.

실제로 손가락으로 입술을 비비고 꾹 누르며 촉감을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므 에으……(뭐 해요).”

“아…… 미안.”

눌린 입술로 앙증맞게 말하는 지찬의 모습에 한성의 목울대가 꿀꺽, 거칠게 움직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 닿았어.”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건 잘 알지만, 지찬은 그냥 피식 웃고 만다.

“팝콘 배불러요. 그만 줘도 돼요.”

그 말에 한동안 서로 영화에 집중하던 와중에 어깨에 툭, 하고 지찬의 머리가 와 닿았다. 슬쩍 고개를 틀어 바라보니 단잠에 빠져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예쁜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나쁜 꿈이라도 꾸나 싶어 깨울까 하던 찰나에 그가 움찔하고 깨어났다. 눈을 뜨고서도 한동안 넋이 나간 표정이더니 입술을 꾹 다물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나쁜 꿈이라도 꾼 게야?”

스크린에선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커다란 무기를 든 주인공이 분노와 절망에 찬 표정으로 적군을 향해 휘둘렀다. 극장 안을 울리는 고함과 날카로운 쇳덩이의 마찰음이 불쾌했다.

한성의 물음에도 지찬은 한동안 꿈의 여운이 길었는지 대답하지 못했다.

클라이맥스가 지나가고,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상황 종료가 된 스크린에 엔딩 크레딧이 올랐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지찬의 눈매가 어쩐지 서늘했다. 가끔 이럴 때는 한성도 그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응집되어 있기도 했고, 지찬이 마음을 닫은 순간이기도 했다.

과연, 둘 중에 뭘까. 궁금하지만 일단 반려 님의 고운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부터 해결해야 했다.

“지찬아.”

“아, 벌써 끝났어요?”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두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지 멍하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보는 지찬의 얼굴에 한성도 괜히 마음이 쓰였다.

“또 꿈을 꾼 거야?”

“우리도 나가요.”

여전히 그에 대한 대답은 없다.

꿈을 꿨으리라 단언한다. 무엇이든 숨기지 못하는 저 얼굴 안에 복잡 미묘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가끔 이럴 때면 청룡이 원하는 ‘진짜 신’이 탐나기도 했다.

그 녀석도 이런 감정이었을까, 처음으로 청룡의 입장으로 생각했다. 그저 자신의 곁에서 웃고, 행복하기만 바라는 절절한 애정 같은 것이 그를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욕심을 품게 했을지도 몰랐다.

한성은 자신이 정말 ‘진짜 신’이 된다면 지찬이 이런 일을 겪지 않고 그저 안락하고 평화로운 자신의 보호막 안에서 끝도 없이 퍼 주는 사랑만 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끔 해주고 싶었다. 지찬의 모든 고뇌와 시름을 자신이 감싸 안아 없애고 싶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할까? 그걸 정말로 원할까?’

한성이 고개를 떨구며 피식 웃었다.

아니. 이 아이는 절대 가만히 두고만 보진 않을 게 분명했다. 제 뒤에 서 있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서 나가길 원할지도 모른다.

‘나한테도 당신을, 이곳을 지킬 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영생과 같은 삶을 살아가려면 나 혼자 뒤에 숨어 있을 순 없잖아요.’

‘그래, 너는 그런 아이였지.’

한성은 일어선 지찬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말간 얼굴을 바라봤다.

“데이트, 계속하자.”

끄덕이는 얼굴에 한성은 웃음이 절로 비집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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