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유난히 피곤한 기색으로 집에 돌아온 지찬이 돌아오자마자 화장실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올라가서 씻겠다며 20분이 지나도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한성이 화장실 밖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욕조에 물을 받고 들어가 있는 것인지 이제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들려오는 소리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한성이 욕실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반려 님.”
나지막하게 지찬을 부르고 재빠르게 욕실 문에 귀를 가까이 댔다. 그래도 여전히 들려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가 닳은 한성이 다시 한번 노크하고 조금 더 큰 소리로 지찬을 불렀다.
“반려 님.”
다시 커다란 덩치를 살짝 숙여 귀를 기울여 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설마 욕조에 몸을 담근 상태로 잠이 들어버렸나, 유난히 피곤해 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던 것인가, 온갖 쓸데없는 상상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종일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지찬이 오기만을 얼마나 목 빠지게 기다렸는데, 얼굴도 보여 주질 않고서 냉담하게 구는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으면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한성이 바라보자 뿌연 수증기 안에 뽀얗게 씻은 지찬이 가운을 걸치고 발간 얼굴로 한성을 노려봤다.
‘아니, 왜?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도 내심 뜨끔한 한성이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한 채 바라보고 있자 한 걸음 성큼 다가온 지찬이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똑같아요?”
“어?”
“나 닮았냐고요. 전생이랑.”
“어?”
바보처럼 ‘어?’밖에 못하는 한성이 불만인지 지찬의 고운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내 전생부터 기다려 왔다면서요. 나랑 사랑했다며.”
“뭐?”
“어? 뭐? 만 하지 말고 대답 좀 해봐요.”
성큼성큼 다가오며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지찬에 놀란 한성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지찬의 양팔을 잡고 멈춰 세웠다.
“잠깐, 그대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가 안 돼.”
“꿈을 꿨어요.”
꿈이라는 소리에 한성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꿈?”
“이게 반려의 힘이에요?”
“아냐. 무슨 꿈을 꿨다는 거야?”
“꿈을 꾸면 그 일이 일어나요. 찾아보니까 예지몽이라고 하던데, 내가 그걸 꾸고 있는 것 같다고요.”
“예지몽을?”
“근데 내가 봤어요. 내 전생을 당신이 알고 있다고, 사랑했다고, 그리고 계속 기다렸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지찬의 입술을 넋 놓고 바라보던 한성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살짝 떨어져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많이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예지몽을 꿔서인지, 숨기고 싶은 전생을 알아버려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후자라면, 자신이 전생을 아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던 거였나, 괜히 서러움이 밀려왔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지찬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게 나라면서요. 날 사랑했다면서, 근데 왜 나한테는 숨겨요?”
“아니, 아니야. 지찬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 때문이 아니었어. 계속 숨기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네게 말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말하려고…….”
“그 언젠가가 도대체 언젠데요. 백 년 후? 이백 년 후? 죽기 직전 숨 껄떡 넘어가기 전에?”
“일단 진정 좀.”
“당신 같으면 진정하겠어요? 나도 기억 못 하는 전생에 당신이 아팠다잖아!”
버럭 소리 지른 지찬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조금씩 차오르는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문다.
“나도 기억 못 하는 과거를 지금까지 혼자 견디면서 계속 아팠다잖아.”
“지찬아…….”
“처음엔 화가 났어요. 그깟 전생이 뭐라고 나한테 그렇게 꼭꼭 감춰 둘까, 또 내게 비밀을 만들었구나. 나와는 공유할 수 없는 추억이 있던 걸까, 한성이 만났던 과거의 그 사람이 나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점점 고개가 숙여지면서 주먹을 꼭 틀어쥐는 지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질투가 났어요. 당신에겐 내가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나였겠지만, 나는 아니잖아. 나한테는 아니잖아요. 난 꼭 당신의 과거 연인을 만나는 느낌이었어. 볼 수도 없고 꽁꽁 감춰 둔 판도라를 연 것처럼 기분이 그랬어요.”
“미안해.”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눈에 눈물이 자꾸만 차올랐다. 지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참을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봤어요. 혹시 전생이 기억나진 않을까, 전생의 나는 당신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닮았을까, 똑같을까,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까, 나는 어떻게 찾았을까, 내가 반려가 된 것은 전부 그 전생 때문이었을까.”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들어 한성의 눈을 바라본 지찬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방울져 내렸다.
“그런데요. 한성 얼굴을 보자마자 그 사람을 잃고 아파했다던 당신이 떠오르는 거야. 나를 잃고서 신이 되기를 포기하기까지의 당신 마음이 그제야 눈에 보이는 거야.”
“울지 마…….”
한성이 지찬의 눈물을 닦아주는데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한성은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 아이를 울리려고 감춰 두었던 게 아니었는데.
결국, 또 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뒤를 숨죽여 따라오던 당신의 마음은 어땠을까. 날 지켜보던 당신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 아픔, 내 상처, 내 절망을 모두 지켜보던 당신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울컥하고 울음이 쏟아진 지찬이 한성의 품에 안겼다. 그런 지찬을 품에 안고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등을 도닥여 줬다.
“괜찮았어. 너 하나 볼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신에게 감사했지. 물론, 그 시련에 대해 원망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널 다시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는 끊임없이 외쳤어.”
“왜 내게는 전생의 기억을 주지 않죠. 당신 혼자 아파하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한성의 마음을 쿡쿡 찔러 댔다.
“네가 이렇게 아파할까 봐 그랬어. 너를 잃고 지옥 바닥까지 떨어졌던 나를 네가 알게 된 순간, 이렇게 울까 봐. 차라리 다행이야. 네가 과거를 알지 못하는 것에 감사해.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궁금하다면 언제든 이야기해 줄게. 대신, 우린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거야. 과거에 아파하지 마. 아팠던 것은 나 하나로도 족하다. 너는 제발, 부디 내 품 안에서 그저 행복하기를 바라.”
한성은 지찬을 품에 안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하늘 너머 그 어딘가에 있을 신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한참 후에 진정 된 지찬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가자 어느새 와 있던 해가 한성의 등짝을 냅다 후려쳤다.
“아휴! 내가 정말 못 살아. 반려 님을 또 왜 울리셨대!”
잔뜩 부어오른 두 눈과 빨개진 코끝, 그리고 살짝 부어오른 도톰한 지찬의 입술을 보고선 해가 한성부터 나무라기 시작한 거였다.
“저녁 먹기도 전에 왜 싸우셨어요!”
“아니, 해야.”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죠! 반려 님 소중히 대하시라고요!”
“아, 아니. 아닌데.”
한성이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사이에 지찬이 우물우물 예쁜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죠…… 한성 진짜 너무해요. 후읍…….”
아직 여운이 남은 감정에 지찬이 울먹이자 한성과 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우리 반려 님이 이렇게 울보일 줄은 몰랐는걸.”
한성의 여유로운 그 말에 해의 눈꼬리가 바짝 올라가며 다시 한번 한성의 등을 철썩 내려쳤다.
“아이고,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해야, 나 그래도 신이지 않으냐…….”
“신이면 반려 님을 울려도 된다는 거예요? 저는 반려 님이 이곳에 오시고 나서부터 반려 님을 지키고 보호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신수라고요!”
작은 몸집으로 듬직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애쓰는 해를 보던 지찬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어라? 반려 님, 울다가 웃으시면…… 큰일 난다고 했는데.”
“미안해요. 해님, 너무 좋아서요.”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 내고 숨을 크게 쉰 지찬이 한성을 바라봤다.
“배고파요.”
그런 지찬을 바라보는 한성의 미소가 옅게 그려졌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부어오른 눈가에 입을 맞춘 한성이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진짜 한성 님이랑 싸우신 거예요?”
“아녜요. 싸운 건 아니에요.”
해가 바짝 다가와 소곤소곤 묻는 모습에 지찬도 덩달아 속삭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봐도 ‘나 울었소’ 하는 모습의 지찬을 바라보던 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아해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니 그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성 님과 싸우게 되시면 꼭 말씀하세요. 제가 한성 님 혼쭐을 내줄게요.”
“해님이 있어서 너무 든든한데요.”
주먹을 꼭 틀어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해를 보니 절로 웃음이 배어 나왔다. 이렇게나 보살펴 주고 신경 써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지찬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지찬 군, 어서 밥 먹어요. 배고프겠다.”
주방에 들어가니 손이 불편한 재순을 도우러 들어갔던 건지 반찬을 담은 그릇들을 옮기고 있는 한성이 보였다. 제 옆에 가까이 붙어 선 재순이 지찬의 얼굴을 보고는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따 녹차 티백 차갑게 해서 줄게요. 그게 붓기가 금방 가라앉아. 한성 님이 많이 속상하게 했어요? 밥 주지 말까? 굶으라고 할까?”
이중, 삼중으로 까이는 한성의 등이 움찔 떨렸다. 또 어디선가 해가 달려와 등짝을 후려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재순마저 그러는 모습을 보고 지찬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정말. 정말, 너무…… 행복해요.”
이상하게도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이 눈치 없이 떨어지려고 해 눈을 쓱 비비고 자리에 앉았다. 마주 앉은 한성, 그리고 재순에게 앞뜰에 매달아 놓은 곶감 하나만 빼 달라며 손을 이끌고 나가는 모습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너무 행복했다. 그런 감정이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커다란 한성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계속 아팠다.
“이 행복이 당신에겐 얼마 만인 거예요…… 지금 정말 행복한 거 맞죠?”
“당연하지. 그대가, 내 곁에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더 바랄 게 없어.”
한성은 지찬을 끌어안아 천천히 따뜻한 손길로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렸다.
“내 곁에 온 네가 설지찬이어서 너무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