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홀로 뒤뜰 정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긴 한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찬이 바라는 대로 저승의 입구까지 인도한 아이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도 이름은 몰라요…… 그냥 울고 있으니, 가족이 있는 곳을 알려 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에…….’
‘어떠한 힘을 쓰더냐?’
‘파란빛이 물결치는 것은 봤어요. 그것 말고는 몰라요…… 정말이에요.’
파란빛이라. 조용히 읊조리던 한성이 숨을 크게 쉬고 하늘을 바라봤다. 온통 까만 하늘에 유달리 빛나게 비치는 달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엔 그렇게까지 욕심을 부리겠다는 거냐.”
처음의 시작은 동방의 신수였다. 제 구역의 신수를 죽여 힘을 흡수하고 그것을 모아 더 큰 힘을 갖게 되면 ‘진짜 신’이 될 거라고 믿은 자였다.
아무도 ‘진짜 신’이 되는 것을 바랐던 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하는 것이 정말로 맞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신의 세상에도 균형이 있다.
제 구역을 담당하고 수호하는 작은 신수들까지 모조리 잡아먹어 가면서 힘을 키워 봤자 그것은 기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무지한 신도 아는 사실이었다.
단단한 벽에 작은 구멍이 나면 조금씩 그 주변으로 갈라지면서 틈이 생기고 결국엔 무너지게 된다.
윤회하며 완벽한 인연으로 이어져야 했던 반려까지도 스스로 찾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을 땐 우스웠다. 비웃었다. 신이 정해 준 운명을 제 손으로 어찌 일그러뜨린다는 말인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신’으로서 제대로 된 각성을 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운명이었다. 그가 제 구역을 지키는 것을 등한시하며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반려 찾기에 목을 매고, 손에 잡히는 신수를 먹어치울 때 만해도 누군가는 그를 막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제풀에 지쳐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완벽한 오산이었고, 자만이었다.
제가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불신.
한성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결국, 절대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윤회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반려를 찾아냈고 각인했다.
자연스레 죽음을 맞이해 다음 윤회로 넘어가야 했던 그 반려를 억지로 찾아내 각성해 버린 청룡은 그 힘으로 더 큰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
세계의 균형을 어그러뜨리는 그를 ‘진짜 신’이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거라 믿었지만.
신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아무리 물어봐도 그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신도 신의 뜻을 모른다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 어둠보다 더 어둡군.”
* * *
‘재순 씨, 이젠 괜찮아요?’
‘더 쉬지 않고 벌써 나왔어요.’
‘아휴, 가만히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며칠간 많이 불편하셨죠?’
재순이 밝은 얼굴로 웃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손가락에 붕대를 감아 놓긴 했지만, 그 전보단 조금 더 가볍게 처치한 모습을 보면서 다들 한시름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인간의 상처는 정말 가늠이 안 돼요.’
‘그렇지. 어디까지가 치명상인지 조금 헷갈려.’
‘약하니까요. 상처가 작더라도 세균 감염 때문에 죽는 예도 있죠.’
재순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을 하자 모두의 얼굴이 아연실색해졌다.
‘재순 씨! 혹시 세균 감염? 그런 거 아니지? 지금 진짜 괜찮은 거 맞지?’
해의 동그란 눈에 금세 물기가 차오른다. 그 모습에 재순이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녜요. 진짜 괜찮아요. 요즘은 많이 발전해서 그럴 일이 아주 드물어요.’
‘그래.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해.’
한성이 한마디 거들고선 지찬을 바라봤다. 어쩐지 의아한 표정으로.
‘왜 거기서 그러고 서 있는 게야.’
지찬이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천장과 바닥이 휙 뒤집히며 다른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집이었다. 거실로 보이는 공간에 긴 머리의 여자가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뒤에서 저벅저벅 걸어와 털썩 앉는 사람은 현무였다.
‘그나저나, 한성 님 말이야. 전생의 그 아이가 환생한 것이 반려라니 진짜 너무 다행이지 않아?’
‘아아, 정작 본인은 모르던데.’
‘한성 님은 의외로 간이 작아. 그냥 지찬이한테 툭 털어놓으면 어디가 덧난대?’
‘전생을 전혀 기억 못 하니까.’
어깨를 으쓱이던 현무가 편안하게 소파에 기대자 현무의 반려가 바짝 당겨 앉아 다가왔다.
‘그래도 전생을 넘어서 현생까지 이어진 사랑이라니, 너무 로맨틱하잖아. 지찬이도 알면 좋아할 것 같은데.’
‘그것보다 전생의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럴 거야. 그 아이 죽고 나서 폭주 직전까지 갔었잖아. 그 아이가 왜 죽었다더라…….’
‘난 전생 같은 거 없었어?’
‘왜? 알고 싶어?’
눈을 반짝 빛내는 현무의 반려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나도 그런 로맨틱한 사랑 없었나?’
‘자기 전생은 백정이었어. 으악!’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얼음덩어리가 소파, 현무의 다리 사이로 냅다 꽂혔다.
‘계속 떠들어 보시지?’
‘아뇨. 반려 님, 죄송합니다. 저는 전생을 보지 못합니다.’
냉큼 반려에게 달려가 무릎 꿇고 비는 현무가 순간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어디 눈을 치켜떠!’
‘아, 아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눈을 돌리는 순간 지찬의 몸이 소용돌이 같은 곳에 빨려 들어갔다.
헉, 하고 숨을 삼키면서 지찬이 잠에서 깨어났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욱신욱신 저렸다.
“하아…… 하아…….”
또 꿈이야.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옆을 바라보니 자리가 비어 있었다. 창밖은 동이 트기 시작했고,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알람이 울리기 오 분 전이었다.
목이 칼칼한 게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주방으로 향했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고, 한 번에 이상한 꿈을 두 가지나 꿨다는 게 몸을 지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는데 익숙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상처가 작더라도 세균 감염 때문에 죽는 예도 있죠”
“재순 씨! 혹시 세균 감염? 그런 거 아니지? 지금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아녜요. 진짜 괜찮아요. 요즘은 많이 발전해서 그럴 일이 아주 드물어요.”
“그래.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해.”
한성이 한마디 거들고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찬을 바라보는 한성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서 있는 게야.”
계단 난간을 잡고 선 지찬이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겨우 버티고 섰다.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말자, 일단 먼저 출근부터 하자. 조용히 속으로 되뇌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아휴, 걱정하지 말아요. 나 아주 멀쩡해!”
해맑게 웃는 재순을 바라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지찬은 자꾸 떨리는 입가를 손을 들어 감추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이상함을 느낀 한성이 뒤따라 들어와 지찬의 안색을 살피자 그는 시선을 피하며 살짝 밀어냈다.
“무슨 일 있든 게야?”
“아뇨. 잠을 설쳤어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 아이는 저승으로 보냈어. 그러니 이젠 마음 쓰지 마.”
“고마워요.”
사실은 잊고 있었다. 그 아이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겠지만.
혹시나 제 생각을 읽힐까 겁난 지찬이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회사에 늦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 * *
“자, 오늘 클린데이에 나가시는 분들은 모두 준비해서 나가시고 오늘 하루도 힘냅시다!”
조회 때문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영업부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찬은 자리에 와서 재킷을 벗고 회사 브랜드가 적힌 조끼를 착용하고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설 대리, 준비 다 됐어?”
뒤에서 다가온 직원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자 지찬이 웃으며 회사를 나섰다.
가맹점의 위생 관리를 위해서 본사 영업부 직원이 직접 가맹점을 순회하면서 청소 작업을 하게 되는 ‘클린데이’였다.
오늘이 바로 지찬 팀이 도는 날이었고 말이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했는데 몸을 움직이다 보면 속 시끄럽진 않겠지 싶어서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본사에서 지원해 준 청소 장비를 싣고 한 차량으로 클린데이를 실시할 가맹점으로 이동했다.
익숙하게 고무장갑을 나눠 끼고, 주방과 홀로 나뉘어 청소를 시작했다. 가맹점 점주와 함께 매장 운영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관리 품목들에 이상은 없는지까지 점검을 끝내고 가장 마지막인 바깥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세제를 묻혀 빙글빙글 닦고 있는 와중에 문득 ‘전생’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뽀득뽀득 내던 소리가 뚝 멈췄다.
‘전생을 전혀 기억 못 하니까.’
‘그 아이 죽고 나서 폭주 직전까지 갔었잖아.’
그럼, 그때 제게 말해주었던 해와 달이 만나기 직전 이야기라는 말인 것 같은데.
‘그 아이가 왜 죽었다더라…….’
아니, 그보다 내가 전생에 한성과 인연이 있었으면 왜 말을 해주지 않았지? 폭주했던 그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럴 리가 없잖아.
‘날 언제부터 기다린 거예요?’
‘아주 오래전부터.’
쓸쓸하게 웃던 한성의 모습이 거품으로 얼룩진 창가에 겹쳐져 보였다.
‘한성 님이 널 많이 찾았어. 아주 많이 그리워하셨어. 그것만 알아주라.’
꿈에서 보았던 현무의 반려가 전에 했던 말까지 떠올랐다. 날 왜 그리워했는지, 반려가 아닌 나를 그리워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반려인 나를 찾았다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꿈에서 보았던 일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면, 그 뒤에 꾼 현무와 반려 누나의 이야기도 그저 그렇고 그런 꿈이 아니라는 뜻이다.
미래를 보는 걸까.
자신이 없는 미래까지 보는 게 맞는 건지, 현무와 그의 반려 꿈도 미래가 맞는지 확실치 않았다. 심지어 꿈속의 현무는 제가 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예민한 감각을 내세웠다.
머릿속은 복잡한데도 기계적으로 몸은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창에 물을 끼얹고 깨끗하게 닦인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
혹시, 전생이 기억나진 않을까 싶었다.
‘전생의 나는 대체 뭐였어. 한성을 만났던 거야? 지금처럼 사랑했어? 내가 모르는 네가 그를 사랑한 거야? 내가 모르는 한성을 사랑한 거야?’
“지찬 씨! 창이 너무 투명해서 넋 놓고 감상 중인 거야?”
와서 툭 치는 느낌에 정신을 차린 지찬이 고개를 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모르는 나와 사랑했다고? 그러면 한성이 지금 사랑하는 건, 그때의 나야? 아니면 지금의 나야?’
물통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스르륵 빠져 둔탁한 소리를 내며 통이 나뒹굴었다.
“내가 나한테 질투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