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회사를 나서자 그 앞에 익숙한 한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새 비는 그쳤는지 바닥만 조금 축축할 뿐이었다.
“웬일이에요?”
“마중.”
씩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조금 설렜다. 종종 나오자던 말을 잊지 않고 와 준 한성이 고마웠다.
둘은 어둑해지는 길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해님은 가셨어요?”
“아니, 아직. 종일 약과 만든다고 집에 단내가 진동하더구나.”
“여태요? 정말 많이 만드시나 보네.”
“달에게도 가져다준다고 넉넉하게 만드는 모양이야.”
“맞다. 달님도 약과 좋아한다고 하셨지.”
“그보다 그대의 반려가 무얼 하고 지냈는지를 궁금해해 줘.”
“한성이야 잘 있었겠죠.”
“아닌데.”
투덜거리는 모양새를 보며 지찬이 일부러 무심한 척 대꾸하니 한성의 입술이 톡 튀어나왔다.
“그럼 못 지냈어요?”
“응. 그대가 없으니 낙이 없잖은가.”
“겨우 여덟아홉 시간 정도인데요.”
“겨우? 아홉 시간은 자느라 못 보고, 나머지 아홉 시간은 그대가 바깥일 하느라 못 보면 남는 것은 기껏해야 여섯 시간 남짓인데. 하루 동안 이리도 야박한 시간 동안 그대를 볼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래도 따지고 보면 일 나와 있는 아홉 시간 빼고는 계속 붙어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난 계속 보고 싶단 말이지.”
어린애처럼 불퉁해진 목소리를 들으며 지찬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그럼, 한성은 자지 말고 나만 봐요.”
장난으로 던진 말인데 한성의 얼굴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그렇군. 그대는 역시 비상해.”
“아뇨. 장난이죠. 진짜로 안 자려는 건 아니죠?”
“그대가 잠들었을 땐 깨어 바라보고, 그대가 바깥 일을 하는 동안에 잠자리에 들면 되는 게 아니냐.”
“그게 뭐예요.”
피식 웃으며 그것도 좋은 방법이랍시고 눈이 반짝해져서 말하는 한성의 한쪽 팔을 툭 쳤다. 사람이 좀 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한성의 손이 지찬의 손을 움켜잡았다.
“역시 이리 손을 잡고 걷는 게 가장 좋구나.”
지찬은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를 한성과 천천히 거닐었다.
“이렇게 같이 걸으니까 꼭 데이트 같네요.”
“매일 데리러 올까?”
“아녜요. 가끔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보이는 것이 아직 두렵구나.”
“조금요. 매일 덩치가 이만한 사람한테 끌려간다고 소문이라도 나 봐요.”
지찬이 한성의 어깨를 쓰다듬고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한성이 피식 웃었다.
‘그래, 아직 두려울 법도 하지.’
술집이 즐비한 번화가를 지나서 조금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오다 한성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여기서 저녁 해결하고 갈까?”
간판을 바라보니 순대 볶음 집이 보였다.
“순대 볶음 먹게요?”
“응, 그대가 좋아하는 거 아닌가.”
“아…….”
맞는 말이었다. 사실, 허름한 간판을 달고 있는 이 집은 예전부터 제 친구 찬영과 자주 찾던 단골집이었다. 찬영이 결혼과 동시에 외국으로 발령받아 나가고 나서부터는 혼자서 갈 수 없던 곳이기도 했고 말이다.
메뉴의 특성상 1인분씩은 판매가 안 되는 거여서 가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조금 머뭇거리긴 했었다.
그냥 눈 딱 감고 2인분 시켜서 먹어 볼까 하고 고민을 수차례 했지만, 그냥 혼자라는 쓸쓸함만 배가 되어 힘없이 발걸음을 돌리기 일쑤였다.
혼자라는 것은 그럴 때 자신을 가장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함께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우울함과 외로움이 찾아왔다. 그래서 나중에는 지름길이었던 이 골목을 일부러 빙 돌아가기도 했었다.
잡은 한성의 손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날 언제부터 기다린 거예요?”
“아주 오래전부터.”
쓸쓸하게 웃으며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한성의 손길에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아직도 있는 거죠.”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조금 망설이는 중이야.”
“그래도 말해줄 거죠?”
“응. 꼭.”
“아주 조금만 기다릴게요.”
“응. 아주 조금만.”
작게 끄덕이는 한성을 이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맞이하는 사장님을 향해 인사하자 나이 지긋한 여성이 놀란 얼굴로 냉큼 달려왔다.
이게 얼마 만이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부산스럽게 지찬의 안부를 묻던 그녀가 한성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갸웃거렸다.
“그때 같이 오던 찬영 군은 어디 가고?”
“그 녀석 지금 외국에 있어요.”
“아, 그래서 도통 보이질 않았구나. 그럼 지찬 군이라도 종종 오지!”
“혼자라…….”
“내가 설마 지찬 군이 우리 집 순대 먹고 싶다는데 그냥 돌려보냈겠어? 진짜 서운하네. 앞으론 혼자서도 종종 들러요. 내가 지찬 군 전용 메뉴 만들어 놓을게!”
“아녜요. 이제 여기 있는 이 사람하고 자주 올 것 같아요.”
어머니처럼 혹은 가까운 친척처럼 살갑게 대해 주었던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스무 살, 찬영에게 군대 영장이 나왔을 때도, 휴가, 제대 그리고 첫 입사 축하까지.
어떻게 보면 지찬은 인생의 커다란 사건들을 이곳에서 위로하고 슬퍼하고 기뻐했다.
그런 곳을 혼자라는 이유로 자꾸 멀리 대했다는 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실 게 뻔했는데 뭐가 그리도 두려웠던지.
동그란 양은 탁자 위에 마주 앉아 푸짐하게 내와 준 순대 볶음을 집어 먹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이제 당신이 내 세상의 전부네요.’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들은 한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내 세상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그대가 전부였어.”
* * *
오랜만에 추억의 장소에서 한성과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지찬은 거실에 현무와 해가 투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약과!”
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옆에 앉은 현무를 바라봤다.
“재순 씨한테 더 만들어 달라고 하자. 해, 너도 저번에 함께 만들어 봤다며. 이젠 네가 직접 해보는 건 어때?”
“그렇지만! 재순 씨 손맛은 못 따라가겠는걸요. 그래도 현무님, 이걸 다 드시면 어떡해요!”
어디선가 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현관 앞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성이 의아한 얼굴로 지찬을 돌아봤다.
“에이, 저번에 산삼주 네가 마지막 잔 마셨잖아.”
“산삼주는 산삼주고요.”
“이건 약과잖아요…….”
해의 다음 말을 조용히 읊조린 지찬에게 시선이 쏠렸다.
“어? 반려 님 오셨네요. 한성 님, 반려 님, 이것 좀 보세요. 현무 님이 제 약과를 다 뺏어 드셨어요!”
“넌 왜 주인 없는 집에 와서 분란을 일으켜.”
“주인이 없긴 왜 없어. 여기 이렇게 있잖아.”
한성이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 하자 현무가 냉큼 대답하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그 순간 주방에서 재순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난 지찬이 제일 먼저 달려가 보니 재순이 손가락을 움켜쥐고 주저앉아 있었다.
“괜찮으세요?”
“어머, 죄송해요. 칼에 살짝 베였는데…….”
움켜쥔 손가락에서 조금씩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혼란스러워진 지찬이 숨을 헉하고 집어삼키는데 뒤에서 한성이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대는 보지 말고 가 있어. 내가 살펴볼게.”
“아, 아니…….”
“괜찮으니 어서 가 있어.”
억지로 떠밀려 밖으로 나온 지찬은 소파에 앉아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어째서 꿈에서 본 일이 그대로 일어나는 걸까.
현무와 해도 주방에서 재순의 다친 손을 치료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독하고 대충 응급처치를 끝낸 재순이 손에 붕대를 감고 머쓱하게 빠져나왔다.
“별거 아닌데 괜히 놀라게 했죠.”
“별거 아니긴요. 작은 상처라도 조심해야죠. 모셔다드릴 테니 병원부터 가요.”
한성이 차 키를 집어 들고 나갈 채비를 하고선 지찬에게 다가와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눈을 맞췄다.
“놀란 게야?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해와 함께 있어.”
“이모님, 괜찮으세요?”
“전 괜찮아요. 진짜 아주 살짝 베인 거예요.”
재순의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된 지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 못 본다면서요. 괜히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아녜요. 아녜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어서 치료받고 오세요.”
한성과 재순이 나가고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온 곳에 멍하니 앉아 있는 지찬에게 해가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반려 님, 많이 놀라셨어요?”
“아뇨. 아…… 놀라긴 했는데, 그게…….”
“괜찮아, 괜찮아. 재순 씨 많이 안 다쳤으니 걱정하지 마요.”
현무와 해가 곁에 다가와 놀란 지찬을 달래느라 애썼다. 하지만, 지찬은 재순이 다친 것도 다친 거였지만 꿈에서 보았던 일이 똑같이 재현됐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대체 왜.
그냥 우연일까? 남들이 말하던 데자뷔 같은 그런 현상이었을까.
하지만, 이게 우연이 아니고 계속 반복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모호한 상황이었다. 꿈에서 보았다고 한들 이번 한 번이 그저 우연으로 잘 맞아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을 괜히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지찬은 현무와 해에게 괜찮다고 웃어주고는 주방으로 가서 어질러진 곳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칼과 도마를 씻어 널어 두고, 반찬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었는지 썰어 놓은 파와 부재료를 작은 반찬 통에 넣어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내가 혹시 잊고 있던 꿈은 없을까.’
만약 정말로 매번 꿈이 들어맞는다면, 어디선가 자신이 놓친 꿈 때문에 나쁜 일을 못 막게 되는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다못해 해와 현무가 투덕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넋 놓고 있지 않고 재빨리 재순에게 달려갔다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바보처럼 왜 가만히 있었냐.’
더 빨리 움직였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재순은 정말 괜찮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 여태 꿨던 꿈까지 다시 곱씹고 있었다.
그래 봤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이었다. 여전히 아파하는 단, 그리고 황룡이 되겠다던 청룡. 그리고 낮에 만나 했던 그 대화.
욱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지찬은 멍하니 서 있다 말고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쥔 채 호흡을 고르면서 다시 한번 천천히 상황을 정리했다.
‘만약 이게 정말 꿈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미래를 본 거라면.’
“신이 되려고 더 큰 힘을 얻고 싶어 할 거야. 진짜 신, 이무기로도 부족한 힘을 어디에서 얻을까. 다른 이무기? 다른 신수? 아니면…… 신?”
신이 신을 죽이겠다니.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이미 신이 될 자질을 가진 이무기를 죽였던 청룡이었는데 과연 말이 안 될까?
“하아…….”
“반려 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거예요?”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지찬이 걱정되어 주방으로 들어온 해가 머리를 감싸 쥔 채 주저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다가왔다.
그 소란에 현무까지 덩달아 달려와 무슨 일이냐고 부산을 떨자 지찬이 표정을 지우고 천천히 일어나 웃어 보였다.
“아녜요. 잠깐 머리가 아파서,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어디 아프면 아프다고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맞아. 아픈 거 참으면 큰일 나. 그보다 한성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현무의 말에 지찬이 피식 웃고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괜찮아요. 그냥 잠깐 두통 때문에요.”
“빨리 올라가서 쉬세요.”
“아녜요. 이모님 오시는 거 보고 올라갈래요. 걱정돼서 맘 놓고 쉬지도 못하겠어요.”
“그럼 소파에 앉아 계세요. 따뜻한 차 한 잔 내드릴게요.”
두 번이나 쫓겨나듯 주방에서 나온 지찬이 소파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꿈을 확인할 수 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뭐가 맞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디, 별일은 아니길.’
만약에 제가 꿈을 통해서 미래를 보는 것이라면, 두려움 없는 꿈만 꾸길.
아직 풀리지 않은 단과 청룡의 이야기가 어쩐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닐 것 같다는 불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지찬은 작게 떨리는 손을 마주 잡고 한성이 빨리 돌아오길 기도했다.